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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화 (183/262)

189화

루센 공작이 나타난 것 자체는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이곳은 알레테이아가 열린 대회의장과 이어지는 회랑이었으니까.

문제는 그가 내게 말을 걸 때까지 여기 왔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거였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면 다른 기척에 묻혀 그렇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것도 아닌지라 그의 등장이 조금 놀라웠다.

루센 공작은 프라시스 후작이 사라진 쪽을 흘끗, 보곤 말했다.

“프라시스 후작과 친한 줄은 몰랐는데.”

“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을 높여 달라고 했을 텐데요, 루센 공작.”

“아, 그랬지요. 잠시 깜빡했습니다.”

루센 공작처럼 머리가 좋은 사람이 이런 걸 깜빡했다고?

믿을 수 없었다. 

분명 고의겠지.

“그럼 친하지도 않은 프라시스 후작과 무슨 이야기를 긴밀하게 나눴습니까?”

“그런 적 없습니다.”

“없긴요. 제가 다 봤는걸요. 프라시스 후작이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공작에게 부탁하는 것까지 말이죠.”

나는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들었다.

“공작에게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군요.”

“엿들은 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묻지 않았겠죠.”

어쩜 이리도 뻔뻔한지.

내가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라보자 루센 공작은 눈매를 초승달처럼 휘어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아무리 매력적이라도 반하면 안 됩니다. 공작에겐 약혼자가 있으니까요.”

“……진심인가요?”

“전 항상 진심으로 말합니다.”

……라는 개소리를.

루센 공작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사교계에선 그가 말을 하지 못하는 조각상이 아닌 걸 안타까워한다던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래서 그런 거였어.

“그래서 프라시스 후작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길래, 그가 공작에게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한 겁니까?”

제가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나요?

마음 같아선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이건 그를 자극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미친놈을 자극해서 내게 좋을 건 없을 뿐더러, 숨기려고 하면 더 파고드는 미친놈이니 탐탁지 않아도 대답했다.

“퓨라 거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위조 금화 사건으로 막스 상단의 손해가 막심해서 대금을 지불하는 게 어려워졌으니, 대금 기일을 조금 미뤄 달라고 하더군요.”

물론 사실대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루센 공작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번 사건으로 제국 내에 있는 상단들이 큰 피해를 보았지요.”

“그렇죠.”

“얼른 범인이 잡혀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텐데…….”

“그러게요. 얼른 범인이 잡혔으면 좋겠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

영혼 없이 적당히 맞장구를 치고 있는데, 돌아온 질문에 하려던 말을 삼키고 그를 쳐다봤다.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말 그대로입니다. 정말로 공작이 위조 금화를 찍어서 유포해 제국의 경제를 어지럽힌 범인이 잡히길 바라는지 궁금해서요.”

이런 걸 물어보는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단 한 가지뿐.

“지금, 절 의심하는 건가요?”

“맞습니다.”

“너무 당당하게 대답하는군요.”

“솔직한 게 제 매력이라서 말이죠.”

다른 사람이 저런 소리를 하면 어처구니가 없었을 텐데, 상대가 루센 공작이라 그런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가 있었다.

“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는지 모르겠네요. 딱히 의심받을 짓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공작은 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했지요.”

“다른 사람이요?”

순간 머릿속에 페르데스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위조 금화 사건을 터뜨리는 데 큰 도움을 준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서 누가 꼬리를 밟힌 걸까.

“프로페테스 4세 말입니다.”

궁금했는데, 루센 공작이 묻기도 전에 알아서 말해 주었다.

“레오폴드 공작은 프로페테스 4세가 왕비로 들이고 싶어 할 만큼, 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게 절 의심하는 것과 무슨 연관 관계가 있는 거죠?”

“그야 이번 위조 금화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연합국, 그것도 아르티나 왕국이니까요.”

연합국이 이번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알레테이아에서도 언급됐었고.

하지만 아르티나 왕국이라고 콕, 집어서 말하는 사람은 이 남자가 유일했다.

그만큼 뭔가 알고 있다는 의미.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이것 참, 제가 하는 말마다 전부 근거를 대라니.”

루센 공작은 팔짱을 끼고, 곤란하다는 듯 콧잔등을 찌푸렸다. 

“레오폴드 공작은 근거를 참으로 좋아하는군요.”

“좋아하는 게 아니라, 루센 공작이 자꾸만 이상한 이야기를 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본 겁니다.”

“이상한 이야기요? 어째서 야르티나 왕국이 유력한 용의자라는 게 이상한 이야기라는 겁니까?”

“그야 아르티나 왕국이 범인이라는 증거가 없으니까요. 공작은 혹시 제가 모르는 증거를 알고 있습니까?”

있을 리가 없었다.

프로페테스 4세가 위조 금화를 만들긴 했지만, 그걸 제국에 유포한 건 나니까.

‘신전’을 이용해서 말이지.

그러니 증거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고 확신하면서도, 혹여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나 싶어 물어봤다.

그러자 루센 공작이 입술 끝을 매끄럽게 끌어 올리며 웃었다.

뭔가 있는 것 같은 미소.

“증거 같은 건 없습니다.”

……인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잠시나마 불안해했던 내가 바보 같이 느껴졌다.

“증거도 없이 그런 말을 하다니. 아르티나 왕국에서 이 사실을 알면 노발대발하며 제국에 정식으로 항의할 텐데, 괜찮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루센 공작이 싱긋 웃었다.

“다른 곳에선 이런 말을 하지 않았으니, 공작만 조용히 해 준다면 아르티나 왕국에서 알게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를 믿나요?”

“그럼요. 공작도 제국의 귀족이니, 제국이 곤란해지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말로는 나를 믿는다고 했지만, 눈빛에는 불신과 의심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루센 공작은 이번 위조 금화 사건에 내가 연루되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부 증거가 없는, 뜬구름 같은 믿음이었다.

만약 증거가 있다면 이렇게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니라, 직접적으로 나를 압박했겠지.

아니면 황실에 고발했거나.

“제게 감동한 모양이군요. 이것 참, 너무 감동할 필요는 없는데.”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어딜 봐서 제가 감동했다는 거죠?”

“말이 없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걸 저런 쪽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말이 없었던 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랬던 겁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프로페테스 4세가 저를 왕비로 들이려 한다고 떠들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더는 근거 없는 뜬소문으로 애꿎은 사람을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 말은 제가 귀찮다는 겁니까?”

“네, 귀찮아요. 공작의 입에 제가 오르내리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빙빙 돌려서 표현해 봤자 알아들을 놈이 아니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루센 공작의 눈매가 얄팍하게 접혔다.

못마땅한 얼굴이네.

정작 그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비수를 꽂았으면서, 저런 표정을 하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더 할 말이 없으면 이만…….”

“이것 참, 곤란하군요.”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건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는데, 문득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지? 

뒤를 돌아보려는데, 루센 공작이 내 팔을 잡았다.

“지금은 나한테 집중했으면 좋겠는데.”

뭐?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냐고 쏘아붙이려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반대쪽 팔을 잡았다.

“단장님의 손을 놔주시길 바랍니다, 루센 공작 각하.”

동시에 가시가 잔뜩 선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이 목소리는 알도르 경?

나는 약간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알도르 경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루센 공작을 노려보고 있었다.

“흐음?”

반면 루센 공작은 흥미롭다는 듯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내가 자네의 말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나?”

“의무는 없지만, 부디 그렇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니면 단장님을 지키는 호위 기사로서,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힘으로 날 제압하겠다는 건가?”

“원하신다면요.”

“두 사람 다 그만해요.”

내버려 두면 루센 공작이 신분으로 알도르 경을 찍어 누를 게 분명할뿐더러.

날 사이에 두고 싸우는 게 계속 거슬렸던 터라, 그들의 손을 뿌리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루센 공작은 질척거릴 줄 알았는데, 그는 예상외로 깔끔하게 물러났다.

“돌아가시죠, 단장님.”

대신 알도르 경이 질척거렸다.

그는 뿌리친 팔을 다시 잡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 이러는 거지?

“푸핫.”

평소와 다른 태도가 의아해서 알도르 경을 보고 있는데, 돌연 루센 공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쏟아지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던 루센 공작이 다가오자 알도르 경이 나를 등 뒤로 보내며 앞으로 나섰다.

“참으로 충직한 충견이야.”

그러자 루센 공작은 알도르 경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부디 앞으로도 주인을 무는 개가 아닌 충견으로 남아 있길 바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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