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내 옆에 설 기회.
그건 호위 기사 이상의 관계가 되고 싶다는 거겠지.
예를 들면 연인이라던가.
“…….”
알도르 경과 연인 사이가 된다니.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인지라, 그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두 번째 생에서 알도르 경과 결혼하긴 했지만, 그건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생존 수단이었다.
그렇다 보니 으레 부부 사이에 존재하는 애정 같은 건 없었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랬다.
알도르 경은……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그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밤의 일로 생각이 흔들렸다.
게다가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진다면 그땐 절대로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건, 설마…….
“레오폴드 공작.”
순간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나는 옆을 돌아봤다.
날 부른 사람은 루센 공작이었다.
다른 귀족들도 날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알레테이아 중이었지.
그날 밤, 알도르 경이 했던 말이 자꾸만 생각나기도 했고.
쓸데없이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니, 너무 지루해서 나도 모르게 다른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루센 공작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길래 사람이 몇 번이나 불렀는데도 듣지 못하는 겁니까.”
“무슨 생각을 하긴요. 당연히 어떻게 하면 위조 금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죠.”
정기 회의 날도 아닌데 알레테이아가 소집된 건, 위조 금화 사건 때문이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경제가 흔들릴 만큼 많은 양의 금화들이 시중에 풀린데다가.
그것도 ‘골드’, 제국에서 발행한 금화만 위조되는 바람에 제국의 경제는 위태로워졌지만, 연합국은 오히려 이득을 보는 상황이었다.
그렇다 보니 연합국에서 제국을 뒤흔들기 위해 골드를 위조한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알레테이아 귀족들도 그 이야기를 했고.
‘정말이지, 재미있단 말이야.’
바로 눈앞에 범인을 두고 찾지 못하는, 엄한 곳을 찔러 대는 꼴이 상당히 우스웠다.
“그래서 좋은 방법을 떠올렸습니까?”
“아니요.”
루센 공작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퍽이나 안타깝다는 어조로 말했다.
“좀처럼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네요. 어떻게 하면 극악무도한 범인을 잡을 수 있을지…….”
“역시 공작 각하께서도 범인부터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하하, 저희와 같은 생각을 하실 줄 알았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반 황제파 귀족들이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황제파 귀족들은 더러운 거라도 씹은 양, 인상을 쓰며 날 쳐다봤다.
두 시간가량 회의하면서 나온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취합됐는데, 하나는 위조 금화를 만든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경제부터 수습해야 한다는 거였다.
전자는 반 황제파가, 후자는 황제파가 낸 의견이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의견이 맞다고 주장하며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반 황제파 귀족들의 의견에 손을 들어 주는 발언을 하니, 황제파 귀족들이 약간 화가 난 얼굴로 따지듯이 물었다.
“정말로 각하께선 범인부터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다 경제가 완전히 무너지면, 그 뒷수습은 어떻게 하죠?”
“각하께선 이 일로 고통받는 제국민들이 걱정되지 않으시는 겁니까?”
제국민들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너희들의 재산을 걱정하는 거겠지.
“경제부터 되살려야 합니다. 범인을 잡는 건 그때 해도 늦지 않습니다.”
“아니요. 늦습니다. 경제를 살리느라 온 신경을 거기 집중하는 사이 범인은 도망칠 테니까요. 그러니 범인부터 잡아야 합니다.”
“쥐새끼 하나 잡자고, 집을 전부 태우겠다는 말입니까?”
“어허, 말은 똑바로 해야죠. 이 사건의 범인은 쥐새끼가 아니라 몬스터 떼거지입니다. 먼저 소탕하지 않으면 후폭풍이 더 클 겁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공방이 다시 시작됐다.
이렇게 떠들 시간에 차라리 밖에 나가서 움직이는 편이 좀 더 도움이 됐을 텐데.
나는 속으로 혀를 쯧, 내차며 프라시스 후작을 쳐다봤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반 황제파 귀족들과 싸우고 있는 황제파 귀족들과 달리 프라시스 후작은 자라처럼 목을 쑥 집어넣고 주변 눈치를 살폈다.
“……!”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보아하니 지난 일 때문에 이번 위조 금화 사건에 연루될까 봐 걱정돼서 몸을 사리는 것 같은데.
오히려 그 모습이 더 눈에 띄고, 의심스러웠다.
“프라시스 후작 각하께선 어디 불편하십니까?”
거봐. 다들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잖아.
“크, 큼. 몸이 조금 안 좋아서 그런 거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긴. 후작 각하께선 이번 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셨으니…….”
“골드의 가치가 떨어지는 바람에 제국의 상단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하더군요.”
“맞습니다. 제국인데도 골드가 아닌 모라로 받는 곳이 생겨날 정도니 말 다 한 셈이죠.”
“예전에는 모라와 골드의 가치가 똑같았는데, 지금은 1모라가 3골드의 가치를 하니…….”
골드의 가치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한 귀족들은 파벌에 상관없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로 한 시간 정도 열띤 토론을 나눈 결과, 황제의 뜻대로 하기로 결론이 났다.
황제가 당연히 자신들의 편을 들어 줄 거라고 생각하는 황제파는 의기양양하게 웃었고, 반 황제파는 썩은 생선처럼 얼굴을 구기며 회의장을 나갔다.
나 역시 회의장을 나왔고, 내 호위로 따라온 에런 경이 다가와 외투를 건네주었다.
평소라면 알도르 경만 호위로 데리고 왔겠지만, 그날 밤의 일 때문에 그와 단둘이 있는 게 어색해서 에런 경까지 호위로 데리고 왔다.
그런데 알도르 경이 안 보이네.
주변을 쓱 둘러봤지만, 그 어디에도 알도르 경은 보이지 않았다.
“알도르 경은 어디 갔나요?”
“부단장님은 지인이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바람에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지인이요?”
“네. 단장님께서 나오시기 전에는 금방 돌아오겠다고 말씀하시긴 했는데…… 이야기가 길어지는 모양입니다.”
알도르 경의 지인이라.
황궁 기사 중에는 알도르 경의 아카데미 동창이 많으니, 지인이 찾아온 건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알도르 경이 내 허락도 없이 자리를 비운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지인이라는 건데…… 누구지?
조금 궁금했다.
“당장 단장님을 찾아오겠습니다.”
에런 경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말하자 손을 내저었다.
“번거롭게 그러지 말고, 우리가 알도르 경이 있는 곳으로 가죠. 그는 어느 쪽으로 갔나요?”
“회랑을 건너 옆 건물로 가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그럼 일단 옆 건물로 가 보죠.”
그렇게 회의장 건물을 나와 긴 회랑을 걷고 있을 때였다.
“고, 공작 각하.”
어느덧 쫓아온 프라시스 후작이 불안한 음색으로 날 불렀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는 얼굴에도 불안감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죠?”
이젠 내가 직위가 더 높으니 말을 놓아도 상관없지만, 연장자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적당히 말을 높였다.
“각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그래요. 하세요.”
“그것이…….”
프라시스 후작은 곧장 이야기하는 대신 에런 경을 쓱, 쳐다봤다.
잠시 자리를 비켜 달라는 암묵적인 신호였다.
그러나 에런 경은 떠나지 않고 꿋꿋이 버티고 서 있었다.
내 호위로 따라온 거니, 내 명령 없이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에런 경, 잠깐만 물러나 있어요.”
“네, 단장님.”
그제야 에런 경은 몇 발 뒤로 물러났다.
프라시스 후작은 그런 에런 경을 못마땅한 눈으로 흘겨본 뒤, 나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각하께서 오해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전 아닙니다.”
“뭐가 아니라는 거죠?”
무슨 의미인지 바로 알아챘지만, 모르는 척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물었다.
“그, 위조 금화 사건 말입니다.”
“아아.”
그제야 깨달은 듯 탄성을 터뜨리자 프라시스 후작이 한층 핼쑥해진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각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제겐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했더라도 모라를 위조했겠죠. 골드를 위조해 봤자, 제 금고만 바닥날 뿐인데, 왜 그런 짓을 했겠습니까. 그러니 제발 제 결백을 믿어 주십시오, 각하.”
“믿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프라시스 후작.”
그를 믿는다기보다 진범이 누군지 알고 있어서 그의 말을 믿는 거지만.
“그, 그럼 나중에 제가 연루되더라도, 제 결백을 증명해 주시겠습니까?”
아하, 목적은 그거였군.
“네. 그럴게요.”
“정말이신가요?”
“물론이죠.”
프라시스 후작의 편을 들어 주는 척하며 수사에 혼선을 줘야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각하!”
여전히 내 새카만 속내를 모르는 프라시스 후작은 마냥 기뻐하며 허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내게 재차 부탁한다고 말한 뒤, 가벼운 걸음으로 사라졌다.
정말이지, 바보 같은 남자라니까.
체르노서의 멍청함이 누구의 유전인지 알 것 같았다.
점점 멀어지는 프라시스 후작을 보고 있는데,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당연히 에런 경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프라시스 후작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지?”
“……루센 공작.”
왜 이 남자가 등장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