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페르데스에게서 두 번째 연락이 온 건, 그가 레오폴드 공작저를 떠난 지 정확하게 일주일째 되는 늦은 저녁이었다.
혹시 몰라 목욕할 때도 반지를 빼지 않긴 했지만…… 진짜 지금 연락이 올 줄이야.
당황스러우면서도 조금 민망했다.
마법 통신 반지는 상대에게 목소리만 전해 줄 뿐, 내 모습이나 상황을 보여 주진 않았다.
그건 알지만, 반지에 박힌 퓨라가 반짝이는 순간 몸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보글보글 올라온 입욕제 거품 속에 맨몸을 숨기고, 통신을 받았다.
“무…….”
[그대가 한 거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질문이 날아왔다.
목적어가 없는 모호한 질문이었지만, 페르데스가 뭘 묻고 싶어 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엘레프테리아 제국의 경제를 공황 상태로 만든 위조 금화 사건.
그 사건을 일으킨 범인이 나인지 물어보는 거였다.
페르데스는 내가 위조 금화를 만든 걸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 사건이 일어나면 바로 눈치챌 거라곤 예상했지만, 그 시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빨랐다.
위조 금화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 건,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벌써 아니그마 왕국의 국경에 있는 페르데스의 귀에 들어갔다는 게 조금 신기했다.
[그대가 한 일, 맞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페르데스가 재촉하듯이 다시 물었다.
“네, 맞아요.”
[…….]
“제가 했어요.”
바라던 대답을 해 줬건만,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충격이라도 받은 걸까.
설마 그럴 리가.
그도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일 텐데.
“충격받으셨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더니,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너무 당연한 걸 묻는군.]
그런가.
[그 방법은 공작이 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군.]
“물론 아니죠.”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위조 금화를 만들었는데, 고작 한 번 쓰고 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다.
애초부터 이걸 계획하고 있기도 했고.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알고 있겠지?]
페르데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하듯이 말했다.
[자칫 그대가 한 짓이라는 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대뿐만 아니라 레오폴드 공작가 전체가 위험해질 거야. 가문 자체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확실히 사라지겠지.
금화를 위조하는 건 반역만큼이나 중죄니까.
[내 말 듣고 있어?]
“듣고 있어요.”
나는 어느덧 턱 밑까지 올라온 거품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쉽게 들키지 않을뿐더러, 그들이 제가 했다는 걸 알아챌 무렵엔 저를 신경 쓸 겨를이 없을 테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긴요. 말 그대로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거죠.”
[…….]
내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페르데스는 잠시 침묵하더니 아까보다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려. 지금 당장 공작령으로 돌아갈 테니.]
“돌아오신다고요?”
[그래. 그대가 위험한 일을 하려는데, 나 혼자 여기 있을 수는 없지.]
“혼자는 아니죠. 그노시스가 있으니까요.”
내가 약간 우스갯소리로 말하자,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장난칠 기분 아니야.]
“그럼 바로 말할게요. 돌아오지 마세요.”
[하지만…….]
“제가 페르데스 님에게 부탁한 건, 제 옆을 지키는 게 아니라 정체불명의 마법진에 대해 조사하는 거예요.”
나는 페르데스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 조사가 끝날 때까지, 혹은 제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돌아오지 마세요.”
[…….]
“만약 마음대로 돌아오신다면, 그날 이후로 저희의 계약은 끝이에요.”
그러니 돌아오지 말라고 재차 강조하자, 순간 흥분한 듯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대는…….]
곧 화가 잔뜩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우리의 관계가 단순한 계약 관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내가 고백을 했는데도…….]
고백.
그 단어를 듣는 순간, 페르데스가 내게 했던 말들이 와르르 떠올랐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톡, 거품을 터뜨리자 기억들도 같이 터졌다.
“저희의 관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
“서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만난, 계약 관계죠.”
[……그게 내 편지에 대한 대답인가?]
편지라는 말에 순간 움찔했지만, 목소리만큼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네. 맞아요.”
* * *
찬란했던 불빛이 사라지고, 새카만 어둠이 드리웠다.
페르데스는 아델과의 통신이 끊긴 뒤에도 한참이나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보름달을 가리던 구름이 바람을 따라 흘러가면서 환한 달빛이 창문을 통해 쏟아져 내렸다.
그제야 페르데스는 마른세수를 하며 푹신한 침대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그리고 아델과 나눴던 대화들을 떠올렸다.
여러 가지가 마음에 걸렸지만, 가장 걸리는 건 거의 마지막 무렵 그녀가 했던 대답이었다.
자신이 준 편지에 대한 대답이 맞다던 그 말.
“……차라리 묻지 말걸.”
그랬더라면 신경은 쓰일지언정,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때늦은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너무 궁금해서 물어봤던 것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돌아올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럼 난 아델이 어떤 대답을 해주길 바랐던 거지?
설마…… 내 마음을 받아 주길 바랐던 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한 스스로가 우스워, 페르데스는 실소하며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기껏 용기 내서 고백하고, 편지까지 남겼는데, 돌아온 건 완곡한 거절이었다.
이에 자존심이 상하고, 양잿물이라도 들이켠 것처럼 속이 쓰렸지만, 그뿐이었다.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 포기하지 않을 거야.”
만약 아델이 저를 완전히 밀어낼 생각이었다면, 레오폴드 공작저로 돌아올 여지조차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지를 남겼다는 건, 아직 기회가 있다는 의미.
그 기회를 반드시 붙잡고 말리라.
어둠 속에 드러난 황금색 눈동자가 의지로 활활 불타올랐다.
* * *
“…….”
순간 알 수 없는 오한이 등골을 타고 올라오면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닭살이 오소소 돋은 팔을 감싸 안으며 침실을 둘러봤다.
그러자 침대를 정리하던 메이가 약간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아니, 아무것도.”
누군가 노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내 착각이었나 보네.
페르데스의 일을 너무 신경 써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깍지 낀 손을 무릎에 올리고 소파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리고 페르데스에게 했던 말들을 곰곰이 되짚어 생각해 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심했던 것 같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것 말고는 페르데스가 레오폴드 공작저로 돌아오지 못하게 막을 방법이 없었으니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 후회하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잠들지 못할 것 같은데.
나를 강제로 잠재워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가령 수면제라던가.
아니면 술이라던가.
수면제를 받으려면 주치의를 찾아가야 해서 조금 번거로웠지만, 술은 바로 얻을 수 있었다.
“메이, 주류 창고에 가서 술을 가져다줄래?”
“술이요?”
“그래. 마시고 잘 수 있게 독한 걸로 가져오렴.”
메이는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봤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메이가 돌아올 때까지 소파에 늘어지게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당연히 메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알도르 경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 손에는 쟁반을 들고서.
나는 놀라며 늘어져 있던 상체를 곧추세웠다.
“어째서 알도르 경이…….”
“하녀를 대신해서 가지고 왔습니다.”
알도르 경이 가지고 온 쟁반을 소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쟁반에는 와인병과 안주, 그리고 술잔이 두 개 있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아가씨의 술 상대가 되어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제야 알도르 경의 속내를 알아채고 웃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들어왔군요.”
“원치 않으시면 나가겠습니다.”
글쎄. 어쩔까.
혼자 마실 생각이었지만, 그건 너무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알도르 경과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같이 마시죠.”
* * *
말 그대로 술 상대만 되어줄 생각인지, 알도르는 아델의 술잔이 빌 때마다 채워 주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요한 정적 속에 술잔이 기울어졌다.
마지막 잔을 비운 아델이 약간 풀린 눈으로 알도르를 쳐다봤다.
“알도르 경.”
“네, 아가씨.”
“제가…….”
아델은 말을 채 잊지 못하고 쓰러지듯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
그리고 술내음이 가득한 숨을 토해 내며 눈덩이 위에 손을 올렸다.
“졸리네요.”
“…….”
“졸릴 때 자야지.”
그러려고 독한 술을 마신 거니까…….
아델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고른 숨소리가 침실에 널리 울려 퍼졌다.
소파가 편하다고 해도 침대만큼 편하지는 않을 터.
알도르는 아델을 침대로 옮기고자 안아 들려다, 뻗었던 손을 거뒀다.
지금 그녀에게 닿으면 멈출 수 없을 것 같아서.
평생 두고두고 후회할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서 도저히 건드릴 수가 없었다.
대신 담요를 가져와 그녀의 몸에 덮어 주고, 한 발 떨어져서 곤히 잠든 아델의 얼굴을 한참이나 내려다봤다.
“만약…….”
비틀어진 입술이 벌어지면서 처량한 음색이 흘러나왔다.
“제게 당신의 옆에 설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진다면, 그땐 절대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텐데…….”
알도르는 제 입으로 말하고도 무척 놀라며, 서둘러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 직후, 내려앉았던 아델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매끄럽게 올라갔다.
그보다 더 떨리는 초록색 눈동자에는 잠기운이 한 터럭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