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등, 많은 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덕분에 내년에 쓸 식량까지 비축할 수 있었습니다.”
관리가 환하게 웃으며 보고를 이었다.
“지진과 화산재 때문에 농사를 망쳐서 내년까지 어떻게 버티나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그러게요.”
정말로 다행이지.
농사를 망치지 않았어도 내년부터는 식량을 구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이 정도면 식량 문제는 해결된 듯하니 식량 쪽은 더 이상 지원을 받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요. 계속 받도록 하죠. 어떤 문제가 터질지도 모르고, 식량은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받은 만큼 나중에 갚아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구호 물품은 겉보기엔 순수한 호의처럼 보였지만, 아니었다.
언젠가 반드시 갚아야 하는 일종의 ‘빚’이었다.
물론 순수한 호의로만 구호 물품을 보내는 천사 같은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그건 아주 극소수였다.
대부분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목적으로 순수한 호의를 빙자해서 강제로 빚을 지도록 만들었다.
구호 물품이 필요한 입장에선 그걸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정말 필요한 양만 받고 나머지는 거절했는데, 내가 전부 받겠다고 하니 관리가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그들은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을 테니까.
만약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그땐 신분이 바닥까지 떨어져 있을 테니, 받아 줄 이유가 없었다.
속내가 어떻든 겉보기에 구호 물품은 순수한 호의이니, 빚을 운운하며 강제로 뭔가를 뜯어 가는 것도 불가능했고.
“영지민들의 거처 문제는 어떻게 됐죠? 예산과 계획을 보고서로 작성해서 올리라고 했을 텐데.”
“여기 있습니다.”
뒤에서 대기하던 다른 관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나와 보고서를 올렸다.
첫 장부터 무수한 숫자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숫자는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다니까.
특히 그들이 짠 예산이 맞는지 확인하고자 주판을 두드리는 건, 골머리가 아팠다.
이런 건 페르데스가 잘하는데.
“페르데스 님을…….”
무심코 페르데스를 부르려다가, 그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페르데스가 그노시스와 함께 아니그마 왕국으로 떠난 지, 어언 사흘째였다.
슬슬 그가 없다는 사실에 적응할 법도 하건만,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무의식적으로 그를 찾았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사람들은 눈을 U를 뒤집어 놓은 듯한 모양으로 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페르데스 님이 많이 보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금방 돌아오실 테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각하.”
금방이라.
헛웃음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물론 사람들은 페르데스가 테시스 영지에 간 걸로 알고 있으니, 저렇게 말하는 게 당연했지만…… 그래도 웃겼다.
페르데스는 절대로 금방 돌아올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뿐더러, 설령 내가 막지 않는다고 해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슬슬 프로페테스 4세에게 편지가 올 때가 됐는데.
“모두 수고했어요. 이만 나가 봐요.”
나는 관리들을 내보낸 뒤, 하네스를 불러 물었다.
“하네스. 내 앞으로 새로 온 편지가 있나?”
“오늘 아침에 드린 편지 외에 새로 온 편지는 없습니다, 각하.”
“그래?”
아직 편지가 오지 않은 걸까.
아니면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걸까.
다시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편지들을 담아 둔 상자를 살펴봤다.
고위 귀족이나 황실 등,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편지는 서랍에 따로 보관해 두고, 상자에는 굳이 내가 확인할 필요가 없는 편지들을 넣어 두었다.
예를 들면 귀족이 보냈다던가, 고위 귀족이라도 나와 인연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온 편지라던가.
프로페테스 4세는 그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부유한 평민 혹은 하급 귀족인 척하며 내게 편지를 보냈다.
그래서 그의 편지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이 상자에 집어넣었을 수도 있었다.
일단 내가 아는 그 이름은 없는 것 같은데.
설마 또 신분을 바꾼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편지를 일일이 확인해 봐야 하니, 일이 상당히 번거로워졌다.
부디 그건 아니길 바라며 편지에 적힌 이름을 살펴보고 있는데, 낯익은 이름이 시야에 들어왔다.
[페르데스.]
어째서 그의 이름이 여기에?
나는 깜짝 놀라며 그 편지를 집어 들었다.
발신자 부분에 통신 도장이 찍히지 않은 걸 봐서 우체국을 통해서 온 편지는 아니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페르데스가 아니그마 왕국에 있는 걸 들키면 안 되니, 절대 그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해 두었으니까.
그리고 만약 내게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면 번거롭게 편지를 보내는 게 아니라 마법 통신 반지로 이야기를 하면 됐다.
그럼 이 편지는 뭘까.
수신자란에 내 이름이 적힌 걸 보면 나한테 보내는 편지는 맞는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페이퍼 나이프로 편지 봉투를 열었다.
혹 다른 사람이 페르데스를 사칭해서 보낸 건 아닐까, 의심했는데 그의 필체가 맞았다.
그리고 편지의 내용은…….
“괜찮으십니까, 각하.”
불현듯 귓속을 파고드는 목소리에 하네스가 있다는 걸 새삼 자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혹 하네스가 편지 내용을 볼세라 편지지를 반듯하게 반으로 접었다.
“괜찮으니까 이만 나가 봐.”
하네스가 나가고, 나는 다시 편지지 내용을 확인했다.
편지 가장 아래 찍힌 날짜는 그가 아니그마 왕국으로 떠나기 바로 전날이었다.
이래서 그때, 페르데스가 내게 할 말이 없냐고 물어봤던 거구나.
비로소 그날의 일이 이해가 됐다.
편지를 보냈으니 확인해 달라고 넌지시 언급을 해 줬다면, 바로 확인했을 텐데.
평소 그답지 않은 미련함이 조금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 이해가 되는 건, 그만큼 편지에 적힌 내용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꼭 대답을 해 줬으면 좋겠어. 정말로 내가 고백한 게 부담스러워서 그런 건지…… 말해 줘.]
그의 고백이 전혀 부담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페르데스를 아니그마 왕국으로 보낸 건 아니었다.
그가 나 때문에 위험해지는 걸 바라지 않아서 억지로 떼어 놓은 거였다.
그런데 페르데스가 이런 오해를 할 줄이야.
예상 밖의 일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지금이라도 그게 아니라고 대답을 해 줄까 싶었지만…….
“……그러지 말자.”
어쩌면 페르데스가 계속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 그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이대로 페르데스가 마음을 접는다면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정말로 좋은 일일까?
문득 든 의문에 편지지를 쥔 손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다.
구겨지면 안 되는데.
나는 편지를 고이 접어 서랍에 넣고, 창밖을 내다봤다.
곧 비라도 쏟아질 예정인지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 * *
레오폴드 공작령에서 아니그마 왕국까진 대략 일주일 정도 걸렸다.
이것도 날씨가 도와준 덕분에 예정했던 것보다 일찍 도착한 거였지만, 그래도 장시간의 이동은 사람을 지치게 했다.
“아고고, 죽겠다.”
말을 탄 그노시스의 입에서 곡소리가 나오자 페르데스가 혀를 찼다.
“이제 겨우 국경을 넘었을 뿐인데, 벌써 지치면 어떡해?”
페르데스의 타박에 그노시스가 억울하다는 듯 반박했다.
“도련님이야 젊으니 이 정도로 지치지 않겠지만, 전 아니란 말입니다!”
페르데스가 신분을 숨긴 만큼, 그노시스도 그를 페르데스 님이나 황자 전하가 아닌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벌써 육십이 넘었어요. 이렇게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집에서 편하게 쉬며 손주들의 재롱을 볼 나이란 말입니다!”
“결혼도 안 했으면서 손주들의 재롱은 무슨.”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분도 너무하시지. 아무리 말이 빠르다지만, 늙은 노인네에게 마차가 아닌 말을 타라고 하더니…….”
그노시스가 투덜거렸지만, 페르데스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분.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아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레오폴드 공작령을 떠난 지 어언 일주일째.
자신이 쓴 편지를 읽고도 남을 시간이건만, 아델은 깜깜무소식이었다.
중간에 보고 차원에서 마법 통신 반지로 연락했을 때도 그녀는 편지의 ‘편’도 언급하지 않았다.
‘설마 아직도 편지를 발견하지 못한 건가.’
알도르를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책상 중앙에 떡하니 두고 나왔어야 했나.
“……님.”
그래, 그랬어야 했어.
알도르가 편지를 발견했어도 무슨 짓을 하진 못했을 테니까.
괜히 바보같이 겁을 먹어서는…….
“도련님! 제 말 듣고 계십니까!”
“!”
찢어질 듯한 고함소리에 페르데스는 깜짝 놀라며 혼자만의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 래. 다 듣고 있었지.”
그리고 다 듣고 있었던 척 연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국경 마을이니까 조금만 참아. 거기서 안내인이 올 때까지 푹 쉬자고.”
본래 예정했던 도착일은 이틀 뒤였다.
안내인도 그때 도착할 터.
그때까지 여독을 풀며 푹 쉬자고 그노시스를 설득하며 국경 마을로 향했는데.
“어서 오십시오, 헤스페로스 도련님.”
예상과 달리 안내인이 먼저 국경 마을에 도착해 있었다.
혹시 가짜는 아닐까.
페르데스는 순간 의심했지만, 안내인의 옷차림이 아델이 미리 일러 준 것과 똑같았기에 금방 의심을 지웠다.
“일찍 도착했군.”
“하하. 두 분께서 일찍 도착하실 수도 있으니,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자자,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여관으로 가시죠. 미리 객실을 잡아두었습니다.”
안내인을 따라 여관으로 가던 페르데스는 신문을 팔고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다른 나라의 신문도 있습니다!”
“혹시 제국 신문도 있나?”
연합국에서 제국 신문을 구하는 건 무척 힘들었다.
페르데스도 사흘 전, 기차에서 읽은 게 마지막이었다.
길거리의 작은 노점상에서 제국 신문을 팔지 의문이었지만, 혹시 모른다는 마음에 물었는데 소년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있습니다! 드릴까요?”
“그래.”
“50실링입니다!”
값을 치르고, 제국 신문을 받은 페르데스의 눈동자가 한순간 커졌다.
[속보. 위조 금화 대량 발견. 엘레프테리아 제국의 경제 대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