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편지를 쓰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페르데스는 다크서클이 짙은 눈덩이를 지그시 눌렀다.
한두 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웬걸, 하루를 꼬박 쏟아부어야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편지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다시 돌아가 수정하고 싶었지만, 내일 아침 일찍 아니그마 왕국으로 떠나야 해서 그럴 시간이 없었다.
지금 편지를 주는 것도 상당히 늦은 거였다.
‘어쩔 수 없지.’
그냥 전해 주는 수밖에.
“후우.”
페르데스는 짤막한 한숨을 뱉으며 아델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델은 현재 회의실에서 관리들과 회의 중이었다.
즉, 현재 그녀의 집무실은 비어 있다는 의미.
페르데스는 허락을 받지 않아도 그녀의 집무실에 들어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델이 없을 때 들어간 적이 없었다.
주인이 없을 때 방에 찾아가는 건 무례한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그런데 그 무례한 짓을 하게 됐으니 긴장됐다.
뭔가 훔치는 등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니라 단순히 편지만 두고 나오려는데도 입 안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페르데스는 아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책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편지를 내려놓았다.
‘여기 두면 잘 보이려나.’
다른 곳에 두는 게 나을까?
집무실보단 침실이 나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하면 아델이 바로 편지를 발견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
페르데스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당연히 아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알도르였다.
그게 더 당황스러워 페르데스는 눈을 크게 뜬 채 그대로 굳었다.
“…….”
놀란 건 알도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델의 명령을 받아 서류를 가지러 왔는데, 이곳에서 페르데스와 마주하게 될 줄이야.
그것만으로도 의심스러운데 페르데스가 마치 뭔가 훔치다가 들킨 사람처럼 놀라니, 더욱 의심스러웠다.
알도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 여기 계시는 겁니까?”
“…….”
평소였다면 내가 어디 있든 간에 무슨 상관이냐고 쏘아붙였을 페르데스였지만,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직 손에 쥐고 있는 편지가 신경 쓰이기도 했고.
침묵이 길어질수록 의심이 깊어졌다.
“페르데스 님?”
“자, 잠깐!”
알도르가 제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려고 하자, 페르데스는 화들짝 놀라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 와중에 편지를 등 뒤로 숨기는 건 잊지 않았다.
“채, 책을 가지러 온 것뿐이니,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도록.”
누가 봐도 오해할 만한 표정과 말투인데, 오해하지 말라니.
알도르의 미간 사이에 자리 잡은 주름이 깊어지는 걸 본 페르데스는 휙, 주변을 둘러봤다.
“마법과 관련된 책인데…… 아, 저기 있군!”
페르데스는 때마침 눈에 들어오는 책을 집어 들면서 편지를 슬쩍 내려놓았다.
아델이 바로 발견할 수 있는,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싶었지만, 알도르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놈이라니까.
페르데스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알도르를 흘겨봤다.
보지도 않을 책을 집어 드는 등 연기까지 했건만, 여전히 알도르는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흠흠. 그럼 난 이만.”
여기 더 있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페르데스는 책을 챙겨 들고 황급히 집무실을 나갔다.
“…….”
알도르는 페르데스의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책상으로 다가갔다.
아델이 말한 서류는 책상의 정중앙에 고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알도르는 서류를 챙기지 않고, 그 주변을 훑어봤다.
곧 그의 시야에 이질적인 편지 봉투가 들어왔다.
편지 봉투 자체는 흔했다.
한데 이질적으로 느껴진 건, 가문의 문양이 없거니와 편지 봉투 윗부분에 페르데스의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에 적힌 이름은 당연히 아델이었다.
멀리 떨어져 사는 것도 아니고, 할 말이 있으면 직접 하면 될 텐데 굳이 편지를 쓴 이유가 있을 터.
‘혹시 고백하려고 그런 건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알도르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었다.
이 편지가 정말로 고백의 편지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정말이라면 그땐…….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알도르는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짚었다.
이딴 망상을 하다니.
잠깐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다.
편지 따위 신경 쓰지 말고 서류나 가져가자.
그래. 서류를 가져가는 게 맞는데…… 왜 자꾸 편지가 신경 쓰이는 거지.
알도르는 자꾸만 편지 쪽으로 향하는 시선을 억지로 끌어당기다가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손에는 문제의 편지가 있었다.
알도르는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편지를 내려다봤다.
편지를 확인할까.
하지 말까.
저울질하던 마음이 기울어진 곳은 확인하지 말자는 쪽이었다.
대신 페르데스의 편지를 편지들을 따로 담아 둔 상자 안에 넣었다.
그것도 가장 아래.
“……이 정도 심술은 괜찮겠지.”
페르데스는 이것보다 더 많은 심술을 부렸으니까.
그러니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훔쳐보거나, 아델이 못 보게 편지를 없애는 게 아닌 잠시 숨겨 두는 것뿐이니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알도르는 자기 최면을 하듯 중얼거리다가 아델이 말한 서류를 챙겨 들고 도망치듯이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 * *
지금쯤 편지를 읽었겠지.
읽었을 거야.
알도르 때문에 눈에 띄는 곳에 두진 못했지만, 그래도 서류를 정리하다 보면 보이는 장소에 뒀으니까.
아델은 과연 편지를 읽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리고 어떤 대답을 해 줄까.
페르데스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뒤숭숭해서 쉬이 잠들지 못하고 밤새 뒤척거렸다.
내일 아침 일찍, 아니그마 왕국으로 가야 하니 일찍 자야 한다는 건 알지만,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페르데스는 비척비척 방에서 나왔다.
그 모습을 본 그노시스가 혀를 끌끌, 찼다.
“설마 어린아이처럼 여행을 떠난다는 것에 설레 잠을 못 이루신 겁니까?”
“……그런 거 아니다.”
“아니긴요. 페르데스 님의 얼굴을 보아하니 맞는 것 같은데요.”
“아니라고…… 됐다. 그만하지.”
지금은 그노시스와 사소한 실랑이를 하는 것조차 귀찮았다.
곧 아델을 만날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기도 했고.
아델도 편지로 답을 해 주면 좋을 텐데.
얼굴을 보고 이야기해 주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건 너무 상처받을 것 같단 말이지.
크게 심호흡하며 중앙 계단 쪽으로 걸어가는데, 맞은편 복도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걸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공작 각하.”
바로 아델이었다.
뒤에 알도르와 메이도 따라오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야, 그노시스.”
아델은 그노시스의 인사를 받아 주며, 그들의 앞에 다가와 섰다.
페르데스는 너무 긴장해서 뒷걸음질 치려는 발을 바닥에 딱 붙이고, 아델을 내려다봤다.
내 편지, 읽었어?
그래서 대답은?
날 아니그마 왕국으로 보내려는 이유가…… 혹시 내가 부담스러워서 그런 거야?
입 안에서 말들이 맴돌다가 사라졌다.
“…….”
페르데스는 아델에게 대답을 듣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듣기가 무서워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아델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는 순간, 페르데스는 숨을 죽였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뭐?”
그것도 잠시, 뒤이어 나온 질문에 그의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다.
“지금…… 뭐라고 했지?”
“제게 하실 말씀이 있냐고 물어봤어요.”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페르데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네?”
“나한테 할 말 없어?”
아델이 눈을 크게 깜빡였다.
할 말이 없다는 암묵적인 표현이었다.
“하.”
페르데스는 실소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델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직 편지를 읽지 못한 모양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알도르의 방해를 받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눈에 띄는 곳에 뒀는데 어째서.
긴장의 끈이 탁, 풀리면서 그 자리를 공허함이 가득 채웠다.
아델이 어떤 대답을 할지 생각하며 밤을 지새웠던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졌다.
허탈하기도 했고.
페르데스의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본 아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가요?”
페르데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아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중에 내 편지를 다 읽으면, 그때 말해 줘.
페르데스는 그렇게 말을 덧붙이려다, 그러지 않았다.
그러기엔 듣는 귀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알도르가 신경 쓰였다.
아델이 긍정적인 대답을 준다는 확신이 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니 알도르가 있는 곳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잘됐어.’
지금은 아델이 편지를 읽었어도, 대답하기 애매했을 테니까.
읽지 않는 편이 서로 어색하지 않아서 차라리 나았다.
나중에 돌아오면 그때 대답을 들어야지.
아델이 아니그마 왕국으로 답장을 보내 줘도 좋고.
“슬슬 출발하지 않으면 기차를 놓칠 수도 있으니, 어서 가요.”
……그래도 조금 아쉽기는 하네.
아델의 진심을 알고 싶었는데.
페르데스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앞서 걸어가는 아델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