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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화 (178/262)

184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페르데스는 늘어지게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이틀 전, 아델과 나눴던 대화들을 곱씹어 보았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그노시스를 감시하기 위해서 아니그마 왕국으로 가달라던 그 말.

구구절절 맞는 말이기도 했고, 자신을 믿는다고 하니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몹시 찝찝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가령 나를 떼어 놓고자 그런 거라던가.

“…….”

문득 떠오른 생각에 페르데스의 얼굴이 볼썽사납게 일그러졌다.

부지런히 짐을 챙기던 잭이 그의 표정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디 아프세요, 페르데스 님? 박사님을 부를까요?”

“아니. 괜찮으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곧 먼 길을 떠나실 텐데, 아프시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페르데스가 아니그마 왕국으로 가면 장시간 공작저를 비우게 되니, 그가 없는 걸 계속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아델은 계획을 바꿔서 페르데스가 사업상 테시스 영지로 가는 걸로 해 두었다.

“혹 아프신 곳이 있다면 참지 마시고 바로 말씀해 주세요. 작은 병이라도 참으면 큰 병이 될 수 있다고요. 게다가 장시간 여행까지 가셔야 하니…….”

“그만.”

잔소리가 쏟아지려고 하자 페르데스는 눈썹을 찡그리며 손을 내저었다.

“하나도 안 아프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 넣어둬.”

“하지만 표정이 안 좋으신데요.”

“이건 아픈 게 아니라 고민할 게 있어서 그런 거야.”

“고민이 뭔데요?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말씀해 보세요.”

페르데스는 괜찮다고 거절하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며시 입을 열었다.

“이건 내가 아니라 아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밑밥부터 깔고.

“그 지인에겐 뜻을 함께하는 동료이자 친구가 있었어.”

그래도 잭이 자신의 이야기인 걸 눈치챌 수 있으니, 함정도 같이 깔아 둬야지.

“두 사람은 정말로 좋은 동료이자 친구였어.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지인이 그 친구를 단순한 동료가 아닌 이성으로써 하게 된 거야. 사랑하게 된 거지.”

사랑하게 됐다는 부분에서 잭이 흠칫했지만, 제 이야기에 빠진 페르데스는 미처 그의 반응을 살피지 못했다.

“그 친구는 지인을 이성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지인은 마음을 숨기려고 했어.”

그래. 숨기려고 했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결국 숨기지 못하고 친구에게 고백했어. 내가 너를 한 여자로서 좋아한다고.”

문득 그때의 일을 떠올린 페르데스는 두 손을 꽉 마주 쥐었다.

너무 섣불리 고백한 것 같아 후회되면서도.

시간을 다시 되돌린다고 해도 같은 행동을 반복했을 것 같아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그 뒤에 어떻게 됐어요? 그 지인의 친구가 고백을 받아 줬나요?”

잠시 과거의 잔상에 사로잡힌 페르데스가 침묵하자, 잭이 몹시 궁금하다는 듯 그를 재촉했다.

페르데스는 쓴 약초를 씹은 것처럼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거절당했어.”

“어, 어째서요!?”

“…….”

잭이 마치 그가 거절당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소리치자, 페르데스가 이상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잭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제가, 너무 이야기에 감정 이입을 한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페르데스 님.”

“……죄송할 건 없지.”

오히려 잭이 어째서냐고 물어봐 준 덕분에 페르데스는 아델이 왜 거절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됐다.

“그 친구가 지인의 고백을 거절한 건 아마도…… 부담스러워서가 아닐까. 지인이 설마 자신을 이성으로 볼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거지.”

페르데스는 그 외에 다른 이유도 떠올랐지만, 그건 입 밖으로 뱉지 않았다.

이것까지 말하면 그 지인이 자신이라는 걸 들킬 것 같은 것도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아델은 나를…….

“……멀리 보내려는 거지.”

페르데스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걸 들은 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서 떠나시는 거예요?”

돌아온 질문에 페르데스 역시 흠칫 놀라며, 잭을 바라봤다.

“…….”

“…….”

두 사람 사이엔 무겁고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서로를 보고 있지만, 절대 눈을 마주치지는 않는 기묘한 상황 속에서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페르데스였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아니라 내가 아는 사람의 이야기야.”

“그럼요. 알고 있습니다.”

잭이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며 대답했지만, 전혀 믿는 것 같지 않았다.

더 말해 봤자 제 무덤을 파는 것 같아, 페르데스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다른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다. 혼자 있고 싶으니까, 이만 나가 봐.”

“네? 하지만 짐을 챙겨야 하는데…….”

“한 시간만 혼자 있게 해 줘.”

페르데스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기도 하고.

한 시간 늦게 짐을 챙긴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으니, 잭은 군말 없이 그의 명령에 따랐다.

혼자 남은 페르데스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소파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었다.

아델이 자신을 아니그마 왕국으로 보내려는 이유가 고백한 게 부담스러워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누군가 날카로운 바늘 같은 걸로 계속 심장 부근을 쿡쿡 찌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마음 같아선 아델에게 달려가 따지듯이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는 건 그녀의 마음이 이해됐기 때문이다.

“최선의 방법이긴 하지.”

항간엔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었으니까.

어쩌면 아델은 이참에 마음 정리를 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일 수도 있었다.

“과연 정리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

이렇게 쉽게 정리가 될 마음이었다면, 진작 정리했을 것이다.

예전엔 아델을 생각하면 마냥 기분이 좋고 행복했는데, 지금은 슬프면서도 답답했다.

조금 화가 나기도 했고.

이 기분으로는 아델을 보면 안 되겠어.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델을 보지 말아야지, 그렇게 다짐했는데.

“페르데스 님, 공작 각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가지.”

아델이 찾는다는 말에 다짐과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였다.

* * *

“여기 아니그마 왕국 통행증과 기차표에요.”

통행증과 기차표를 내려다보는 페르데스의 표정이 오묘했다.

어떤 상태인지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기는 힘들었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왜 그러세요?”

페르데스는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조금 피곤해서 그런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 제가 괜히 불렀나 봐요.”

“그것도 아니야.”

……그래, 아니지.

페르데스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통행증을 확인했다.

곧 그의 눈가가 얇게 접혔다.

“체류 기간이 1년이나 되네.”

“아니그마 왕국에 얼마나 계실지 몰라서 넉넉하게 기간을 잡은 거니, 그 부분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

페르데스가 길게 물고 늘어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바로 넘어갔다.

나는 그 사실에 안도하며 말을 덧붙였다.

“안내인도 미리 준비해 뒀어요. 아니그마 왕국의 국경을 넘으시면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안내인이 필요하려나?”

“당연히 필요하죠. 처음 가는 곳이잖아요.”

“나야 처음 가지만, 그노시스는 몇 번 가 봤다고 하던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안내인은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바로 대처할 수도 있고요.”

“그래.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겠지.”

안내인 부분까지 무탈하게 넘기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외 주의해야 할 사항이나 앞으로의 계획 등 의논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기울어지고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됐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같이 저녁 드실래요?”

“아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미안하지만 따로 먹을게.”

“아, 그러실래요?”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놀랐다.

당연히 같이 먹을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그런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페르데스가 저리 단호하게 거절하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걱정돼서 말했더니, 페르데스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나를 바라봤다.

“한 가지 물어봐도 돼?”

“물론이죠.”

“혹시 그대는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차마 얼굴을 보고는 물어볼 수가 없을 때…… 어떻게 해?”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그의 표정이 워낙 심각해서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글쎄요…….”

오히려 나까지 심각해져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진지하게 생각했다가 대답했다.

“편지를 쓰는 건 어때요?”

“……편지?”

“네. 때로는 말보다 글이 의사 표현을 하기 좋기도 하고, 얼굴을 보고 할 수 없는 말이라면 역시 편지가 좋을 것 같아요.”

“편지라…….”

페르데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그거 좋네.”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네요.”

“응. 상당히 도움이 됐어.”

페르데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난 편지를 쓰러 가 볼게. 나중에 보자.”

그런데 누구에게 편지를 쓸 거예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나는 그를 붙잡으려고 뻗었던 손을 안쪽으로 말아 쥐며, 굳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폭풍우가 휘몰아친 것처럼 마음이 뒤숭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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