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라서 그런데, 그노시스랑 함께 아니그마 왕국에 가시는 게 어때요?”
내가 직접 페르데스에게 말하는 건 조금 껄끄러웠지만, 그노시스가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하니 어쩔 수 없이 나섰다.
“…….”
페르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찌나 집요하게 쳐다보는지 조금 부담스러웠다.
순수한 호의 외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들킬까 봐 걱정되기도 했고.
그래서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진짜 들킬 것 같아 애써 담담한 척 연기하며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진심인가?”
그러자 페르데스가 고개를 약간 삐딱하게 기울였다.
“진심으로 내가 그노시스와 함께 아니그마 왕국으로 가길 바라고 있어?”
“네.”
순수한 의도는 아닐지라도 그가 아니그마 왕국에 가길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내가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눈매가 가자미처럼 얇게 접혔다.
내가 진심으로 말한 건지 가늠하려는 듯, 나를 뚫어지도록 쳐다봤다.
아까처럼 집요한 시선이었지만, 이번에는 진심이라 그런지 딱히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왜 그런 눈으로 절 보세요?”
웃으며 묻자, 페르데스가 눈썹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어째서 내가 아니그마 왕국에 가길 바라는 거지?”
“그야 페르데스 님은 예전부터 대륙을 자유롭게 여행하시면서 마도사 공부를 하고 싶어 하셨잖아요. 그런데 저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이곳에 발이 묶이셨죠.”
예상했던 질문이었고, 어떻게 대답할지 미리 생각해 두었던 터라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으니, 꼭 붙잡으셨으면 하는 마음에 말씀드리는 거예요.”
페르데스가 눈썹을 구긴 채 말했다.
“난 그대 때문에 이곳에 발이 묶였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그런 이상한 생각은 버려.”
“페르데스 님은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하셔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렇게 보여요.”
“…….”
“그건 저도 마찬가지고요.”
페르데스의 미간 사이에 잡힌 주름이 깊어졌다.
그가 기분 나빠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페르데스 님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게 있기도 하고요.”
“……내게 부탁하고 싶은 것?”
“네.”
“그게 뭐지?”
“우선 모처럼 아니그마 왕국까지 가셨으니, 페르데스 님께서 바라신 대로 많은 걸 보고 배우셨으면 좋겠어요.”
“흐음.”
페르데스가 팔짱을 끼고, 소파 등받이 깊숙한 곳에 몸을 묻었다.
“시작부터 그런 말을 하는 걸 봐서, 어려운 걸 부탁하려는 모양이네.”
“조금 번거롭긴 해도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옆에서 감시만 하면 되거든요.”
“감시?”
“네. 그노시스가 마법진이나 여기서 보고 들은 내용들을 외부에 누설하지 않는지, 페르데스 님이 옆에서 감시해주세요.”
페르데스의 눈썹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그 말은 그노시스를 믿지 않는다는 거네.”
“완전히 믿는 건 아니죠.”
그노시스는 페르데스가 신뢰하는 사람이니 다른 사람들보단 믿었지만, 페르데스나 알도르 경 같이 마음 놓고 일을 맡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믿을 수 있는 감시역이 필요했는데, 여러 가지를 따져 봤을 때 페르데스가 적임자였다.
“페르데스 님 말고 달리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
“그러니 부탁드릴게요, 페르데스 님.”
“……하아, 정말이지.”
페르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헤집었다.
“그대가 그렇게 말하면 거절할 수가 없잖아.”
“그노시스와 함께 아니그마 왕국으로 가실 거죠?”
“그래. 갈게. 가면 되잖아.”
다행이다.
혹 그가 거절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비로소 안심됐다.
이걸로 마음 편하게 계획을 계속 진행할 수 있겠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는 건데 날 떼어 놓으려고, 이런 핑계를 대는 건 아니지?”
안심하기 무섭게 정곡을 파고드는 말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굳은 입술 끝을 억지로 끌어 올리며, 아무것도 모르는 양 눈을 크게 깜빡였다.
“제가 페르데스 님을 왜 떼어 놓으려고 한다는 거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게 아니면 된 거지.”
페르데스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내게 물었다.
“그래서 아니그마 왕국으로는 언제 출발하는 거지?”
“그 부분은 그노시스와 좀 더 이야기를 해 봐야겠지만, 늦어도 다음 주 초에는 출발할 것 같아요.”
“뭐?”
당황한 듯 페르데스의 눈이 약간 커졌다.
“그렇게 빨리 출발한다고?”
“그러면 안 되나요? 아, 혹시 니콜 테시스와 사업하는 것 때문에 그러세요?”
“아니. 황제 때문에 그러는 거야.”
페르데스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턱을 괬다.
“아무리 빨리 조사를 끝내고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한 달은 걸릴 텐데……. 그럼 결혼식에 참석할 수가 없잖아.”
지금 페르데스가 말하는 결혼식은 나와 그의 결혼식이었다.
정확히는 우리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 황제가 일방적으로 잡아 둔 결혼식이었다.
“황제가 이 사실을 알면 노발대발할 걸.”
“그 부분이라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 그러고 보니 이전부터 결혼 문제는 알아서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지.”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린 페르데스가 작게 탄성을 뱉었다.
곧 가늘어진 눈동자가 날 향했다.
“어떤 계획인지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아실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 말은 아직도 말해 줄 생각은 없다는 거네.”
내가 대답 대신 웃자 페르데스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날 믿는다면서 정작 이런 건 말해 주지 않는군.”
“죄송해요.”
“아니, 괜찮아. 이젠 익숙해졌으니까.”
괜찮다는 말과 달리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지금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페르데스 님이 아니그마 왕국에서 돌아오실 무렵에는 전부 정리되어 있을 거라는 거예요.”
“어디까지…… 아니다. 물어봤자 대답해 주지 않을 테니까 그냥 안 물어볼래.”
페르데스는 반쯤 체념한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일어섰다.
“그럼 난 이만 가 볼 테니, 좋은 밤 보내.”
그는 내 쪽은 보지도 않고 짤막한 인사를 남긴 뒤, 훌쩍 방을 나갔다.
“화가 난 건가.”
하긴 믿는다고 해 놓고 계속 비밀을 만들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었다.
푹신한 소파는 엄마의 품처럼 포근하게 날 감싸 주었지만, 머릿속이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서 그 안락함을 느낄 여력은 없었다.
아까는 페르데스를 아니그마 왕국에 보내야겠다는 것에 집중해서 몰랐는데, 그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다른 문제들이 떠올랐다.
그중 하나가 페르데스 님이 아니그마 왕국에 도착할 때쯤, 그 일이 터질 것 같다는 거였다.
그라면 내가 터뜨린 일이라는 걸 바로 눈치채고, 제국으로 돌아오려고 할 테지.
그럼 기껏 그를 아니그마 왕국으로 보낸 의미가 없어지니,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부탁해야겠네.”
그 사람에게 사적인 부탁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린 나는 그노시스가 갑자기 찾아오는 바람에 쓰다 만 편지지를 불에 태우고, 새로운 편지지를 꺼냈다.
* * *
그노시스와 이야기를 나눈 결과, 다가오는 월요일에 떠나는 걸로 확정을 내렸다.
페르데스도 그때가 괜찮다고 했고.
다가오는 월요일이라고 해 봤자 고작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그 안에 떠날 준비를 하려니 조금 빠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준비해야 해서 더욱 버거웠다.
그노시스와 페르데스가 떠나는 걸 아는 사람은 당사자 두 사람과 나, 그리고 알도르 경뿐이었다.
알도르 경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날 대신해서 그들이 떠나기 위한 준비를 해 줘야 하는 터라 어쩔 수 없이 말했다.
“말씀하신 기차표와 아니그마 왕국의 통행증입니다, 아가씨.”
“수고했어요.”
기차표는 따로 확인할 게 없으니 통행증만 살펴봤다.
그노시스는 평민이니 신분이 노출돼도 상관없지만, 페르데스는 아니었다.
황족이다 보니 신분을 그대로 쓸 수가 없어, 어느 자작가의 영식으로 위장했다.
그것도 제국이 아닌 아르티나 왕국의 귀족으로.
제국보다는 같은 연합국 귀족인 게 비교적 눈에 띄지 않을뿐더러, 만약 무슨 일이 생겨도 프로페테스 4세가 바로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 번에 허용되는 체류 기간은 1년뿐인지라 그걸로 발행받았는데,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수고했어요, 알도르 경.”
“또 부탁하실 건 없으십니까?”
“그럼 기사단으로 돌아가면서 이 장부를 하네스에게 전해 줄래요?”
“네, 아가씨.”
장부를 건네주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알도르 경의 표정이 평소보다 밝았다.
눈동자에도 반짝반짝 생기가 도는 것 같았고.
“알도르 경, 기분 좋은 일 있어요?”
그냥 물어본 건데, 알도르 경은 비밀이라도 들킨 사람처럼 흠칫 놀라며 날 쳐다봤다.
“뭐야. 왜 그렇게 놀라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닌데.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알도르 경을 20년 가까이 지켜본데다가, 한때 그와 결혼까지 했던 내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집요하게 쳐다보자 알도르 경은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딱히 기분 좋은 일은 없습니다. 그저…….”
“그저?”
“조금 기쁜 일이 있긴 합니다.”
그게 그거 아닌가.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알도르 경은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밖으로 나갔다.
누가 봐도 내가 꼬치꼬치 캐물을까 봐 무서워서 꼬리를 빼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귀여운 면이 있네.
나는 픽, 웃으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