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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화 (176/262)

182화

발렌드 페일이 범인이라는 것과 그가 했던 이야기들은 널리 알렸지만, 그가 발작을 일으켜 죽은 건 알리지 않았다.

그러니 ‘평범한’ 황태자라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

내가 그 사실을 지적하자, 황태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다녔다.

정말이지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라니까.

나는 순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누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생각하던 황태자는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바쁜 공작을 배려해 줘야겠다는 생각만 하느라, 그를 만나야 한다는 걸 깜빡 잊고 말았군요.”

“잊으신 거군요.”

“네. 잊은 겁니다.”

“정말로 그것뿐인가요?”

“물론입니다. 설마 저를 의심하는 겁니까, 레오폴드 공작.”

황태자가 눈썹을 찡그리며 노골적으로 기분이 나쁜 티를 냈다.

그래서 더는 캐묻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원하는 정보는 충분히 얻었으니까.

“그럴 리가요. 그저 황태자 전하께서 절 배려해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하고,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잊으신 게 안타까워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캐묻는 대신 감사의 인사와 함께 비난 섞인 말을 던지자 황태자가 볼을 살짝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래서 발렌드 페일을 만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아니요. 불가능합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한 뒤, 성큼 걸어가 응접실 문을 열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황태자 전하.”

* * *

발렌드 페일을 만나지도 않고 가냐고 비아냥거렸으면서, 만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건 굉장히 모양새가 이상했다.

내가 황태자였다면 무척 화가 났을 텐데, 그는 화를 내긴커녕 순순히 떠났다.

내가 발렌드 페일을 만날 수 없는 걸 아는 사람 같다고 대놓고 물어봤는데도 그 부분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았지.

역시 황태자는 발렌드 페일이 죽은 걸 알고 있구나.

이로써 황제와 황후 중 한 명이 이번 일에 가담되어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그들이 제 3자와 손을 잡았을 거라는 가설도 좀 더 신빙성을 얻었고.

하지만 전부 심증인지라 이걸 가지고 황제나 황후를 추궁하는 건 불가능했다.

괜히 나섰다가 원하는 대답을 얻긴커녕, 내가 소문을 낸 장본인이라는 게 들킬 수 있기에 아쉽더라도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엉망진창이 된 영지를 복원해야 하는 것도 있었고.

마지막 계획을 위한 발판이 전부 준비됐기 때문이기도 했다.

“각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앞으로 모든 거래의 대금을 골드가 아닌 모나로 받기로 했습니다.”

골드는 제국에서 발행한 금화를, 모나는 연합국에서 발행한 금화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골드에는 초대 황제의 얼굴이, 모나에는 연합국의 상징화가 새겨져 있었다.

금화에 새겨진 그림과 부르는 말은 다르지만, 돈의 가치는 똑같았다. 

덕분에 사람들은 굳이 환전하지 않아도 제국이나 연합국에서 물건을 자유자재로 살 수 있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갑자기 모든 거래의 대금을 모나로 바꾸신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제국에선 금화를, 연합국에선 모나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느닷없이 이런 결정을 내렸으니 관리가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남작도 들었겠지만, 연합국이 최근 모든 거래 대금을 모나만 받겠다고 선언했잖아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도 모나를 받는 거예요. 연합국과 거래를 하려면 모나가 많이 필요하니까요.”

공작이 되기 전부터 연합국과 거래를 할 거라고 밑밥을 계속 깔아 두었던 터라, 관리는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군요. 하긴 은행에서 돈을 환전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번거로우니 처음부터 모나로 받는 게 좋지요.”

“그렇죠.”

“허허, 연합국도 참. 어차피 가치가 똑같은데, 왜 모나만 받겠다고 선언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자존심을 세우려는 거겠죠. 제국이 그러는 것처럼.”

제국은 오래전부터 모든 거래에서 골드만 받고 있었다.

제국이 대륙에서 최고라는 걸, 다른 나라의 눈치 따위는 보지 않는다는 걸 과시하기 위한 행보였다.

그런데 연합국에서도 모나만 받겠다고 선언한 건 일종의 선전 포고나 다름없었다.

내가 아는 황제는 이걸 눈 뜨고 가만히 지켜볼 사람이 아니었다.

황제가 아니더라도 자존심이 드높은 제국의 귀족들이 연합국에 본때를 보여 줘야 한다며 개처럼 짖어 대겠지.

……진짜 본때를 보여 주는 게 누군지도 모르고 말이야.

“수고했어요. 이만 퇴근해도 좋아요.”

“그럼 이만.”

관리가 떠나고, 나는 그가 가지고 온 서류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관리가 말한 대로 모든 거래 대금을 모나로 받겠다고 확실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프로페테스 4세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줘야겠네.

나는 준비가 다 됐다고.

당신만 준비가 끝난다면 언제든지 시작해도 좋다고 말이야.

생각한 김에 바로 편지를 쓰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나는 대답하며 작성하던 편지를 옆으로 밀어냈다.

“실례하겠습니다, 공작 각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그노시스였다.

이 늦은 시간에 그가 날 찾아왔다는 건, 설마…….

“뭔가 알아낸 건가?”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묻자, 그노시스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아, 아니었구나.

순간이지만, 기대했던 만큼 실망이 밀려왔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럼 이 시간엔 어쩐 일이지?”

“마법진에 관한 겁니다.”

알아낸 게 없다면서, 마법진에 관한 거라고?

계속 말하라는 의미로 쳐다보자 그노시스가 헛기침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계속 책을 뒤져 가며 조사를 해봤지만,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진전이 거의 없습니다.”

“…….”

“그래서 말인데, 아니그마 왕국에 가서 조사해 보고 싶습니다.”

아니그마 왕국.

연합국에 속한 7개의 왕국 중 하나로, 마조사와 마법사들이 많아 ‘마법의 왕국’이라고 불렸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아니그마 왕국에는 다른 나라와 달리 유난히 이종족들이 많다고 했다.

그러니 그곳에 직접 가서 그 마법진에 대해 알아보면 확실히 도움이 되겠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몇 가지 있었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마법진에 대한 정보를 외부에 유출한다는 거였고.

그다음은 아니그마 왕국이 제국과 전쟁하자는 프로페테스 4세의 제안을 거절한 왕국이라는 거였다.

정확히는 상황을 봐서 어떻게 할지 정하겠다고 대답을 보류한 거였지만,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허가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법진에 대해 알아보려면 보내 주는 게 맞았다.

으음, 어떡하면 좋지.

“듣자 하니 아니그마 왕국에서 대현자의 칭호를 받은 남자가 엘프와 인간의 혼혈인 하프라고 합니다.”

고민하고 있는데 나를 설득하려는 듯 그노시스가 말을 덧붙였다.

“그 사람이라면 마법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마법진은 악마들이나 쓰는 흑마법의 일종이라고 들었는데. 신성 마법만 쓰는 엘프들이 과연 알고 있을까?”

“마법을 쓰는 것과 알고 있는 건 다른 법이니까요.”

그거야 그렇지.

“그리고 엘프는 드래곤과 가장 가까운 종족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자가 드래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건가.

날 설득하기 위해 드래곤 이야기까지 꺼내는 게 조금 언짢긴 했지만, 마음은 확실하게 동했다.

어쩌면 제삼자가 드래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으니까.

게다가 이걸로 골칫거리도 같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니그마 왕국에 가서 조사하는 걸 허락하지.”

그노시스가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단, 조건이 있네.”

“비밀 유지는 당연히 하겠습니다.”

“아니. 내가 말한 조건은 그게 아니야.”

“허면……?”

“페르데스 님과 함께 떠나도록.”

“……네?”

그노시스가 제 귀를 의심하는 듯 내게 되물었다.

“지금…… 페르데스 님과 함께 아니그마 왕국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맞아.”

“아니, 갑자기 왜 그런…….”

그야 마지막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페르데스를 떼어 놓아야 하니까.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페르데스 님은 예전부터 대륙을 여행하며 마조사 공부를 무척 하고 싶어 하셨네.”

절대로 말할 수 없는 이유를 억지로 삼키며, 다른 이유를 댔다.

“그런데 나 때문에 이곳에 발이 묶이신 것 같아 계속 신경이 쓰였는데, 이 기회에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있는 이야기를 빗대어 말하니 꽤 그럴싸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노시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오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왜 그런 표정이지?”

“그것뿐입니까?”

“뭐?”

“각하께서 페르데스 님을 아니그마 왕국으로 보내려는 이유가 정말 그것뿐인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예리하게 정곡을 푹, 찌르고 들어온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는 굳은 입술 끝을 억지로 끌어올리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럼?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건가?”

“그건 제가 아니라 각하께서 잘 아시겠지요.”

……뭔가 눈치챘구나.

이럴 땐 뭐라 변명하는 것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노시스도 침묵했고, 그렇게 눈싸움을 하듯이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던 와중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그노시스였다.

“알겠습니다. 공작 각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페르데스 님과 함께 아니그마 왕국으로 가겠습니다.”

원하는 대답을 들었는데 왜 이렇게 찝찝한 건지.

“한데 페르데스 님이 저와 같이 가시려고 할지 모르겠군요.”

“마법진 공부를 하러 가자고 말하면 갈 거야.”

“글쎄요.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그분은 마법진보다 공작 각하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이니까요.”

“…….”

페르데스의 마음을 몰랐다면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했을 텐데, 너무 잘 알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노시스는 다시 입을 다문 나를 향해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이 부분은 공작 각하께서 페르데스 님께 직접 말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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