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175/262)

181화

결국은 죽었구나.

발렌드 페일이 이상한 마법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안 순간부터, 그가 살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던 터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그저 제대로 된 자백과 배후를 밝혀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아쉬움만 남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브로치는 쓰지 말 걸 그랬어요. 그랬더라면 좀 더 유용한 곳에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어쩔 수 없지.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설마 그 자에게 이상한 마법이 걸려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으니까.”

페르데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내게 물었다.

“말을 하다가 갑자기 쓰러졌다고 했지?”

“네.”

“그전에는 이상 증상 같은 게 전혀 없었어?”

“네. 없었어요. 손바닥 안쪽에 마법진도 갑자기 생겨난 거고요.”

만약 발렌드 페일의 손바닥에 마법진이 있었다면, 그의 몸수색을 담당한 기사들이 내게 보고했을 것이다.

“그럼 역시 어떤 조건에 의해 발동된 것 같은데…… 그 자가 발작을 일으키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뭐야?”

무슨 말을 했었더라.

발렌드 페일이 워낙 횡설수설했던 터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나는 그와 나눴던 대화를 곰곰이 되짚어 생각해 봤다.

그러니까 발작을 일으키기 전에 분명…….

“폐하……라고 한 것 같아요.”

그걸 떠올리니 한 가지 가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황제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만약 황제가 인간이 아니라면 신전 측에서 바로 알아봤을 것이다.

대신관들은 생명체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신의 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그럼 발렌드 페일이 말한 폐하는 누구지?

설마…… 황후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또 다른 제 3자인 건가?

“머리가 아프네요.”

페르데스가 동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가 살아 있었다면 배후를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군.”

“그러게요. 그래도 찔러보기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찔러보기?”

페르데스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 말은 범인이 누군지 안다는 건가?”

“아니요. 말 그대로 그냥 한 번 찔러보는 거예요. 만약 범인이라면 견디지 못하고 제 발 저리면서 나서게 말이죠.”

* * *

레오폴드 공작의 기사단장 취임식 도중 화산이 폭발한 사건은 사흘도 채 되지 않아 제국 전역에 파다하게 퍼졌다.

몇백 년 동안 잠잠했던 화산이 돌연 폭발한 건 전부 아델 레오폴드가 레드 드래곤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라는 것과 함께.

“하긴 현 레오폴드 공작은 선대 레오폴드 공작이 인정한 정식 후계자가 아닌데 공작위를 승계받았으니 레드 드래곤이 분노할 만도 하지.”

“그렇긴 하지만 그분은 레오폴드 공작가의 유일한 혈육이잖아. 달리 공작이 될 사람이 없다고.”

“맞아. 그 논리라면 4황자 전하가 공작이 됐어도 레드 드래곤이 분노했을 것 같은데?”

그럼 그 이유 때문에 레드 드래곤이 분노한 게 아닌가?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게 뭘까?

혹시 현 공작이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육이 아니라던가?

그런데 정말로 레드 드래곤이 분노해서 화산이 폭발한 게 맞는 건가?

단순한 자연재해가 일어난 건 아닐까?

온갖 망상이 뒤섞인 추측성 가득한 소문들이 무성하게 퍼졌다.

둘 중 어느 쪽인지 내기까지 하며 레오폴드 공작령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온 소문에 입을 쩍 벌리며 기함했다.

“레드 드래곤이 분노한 게 아니라 누군가 기사단장 취임식을 방해하려고 일부러 화산을 폭발시킨 거라며?”

“그렇다고 하더라. 게다가 그 범인이 폐하의 명령을 받았다고 자백했다던데.”

“폐하라면…… 설마 황제 폐하?”

“황후 폐하도 있긴 한데…….”

황제와 황후.

과연 둘 중 누가 범인인가.

제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두 사람이 얽힌 역대급 사건에 사람들의 관심이 단번에 집중됐다.

사람들은 황실에서 어떤 변명이나 대답을 할지 궁금해하며, 귀를 쫑긋 세우고 기다렸다.

그러나 황실은 아무런 해명도 내놓지 않고 침묵했다.

그만큼 사람들의 궁금증과 의심은 점점 커졌다.

어쩌면 둘 다 이번 일에 가담했을지도 모른다고. 

이번 기회에 황실에서 레오폴드 공작가를 집어삼키려는 거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황태자가 이끈 구호 물품 보급대가 레오폴드 공작령을 방문했다.

화산 폭발이 일어난 지, 열흘째 되는 아침이었다.

* * *

외부인이 영지에 들어오지 못하게 성문을 굳게 걸어 잠갔지만, 예외적으로 출입을 허락하는 경우가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가 각 영지에서 보낸 구호 물품과 봉사자들이 도착했을 때였다.

레오폴드 공작령을 도와주러 온 사람들을 문전 박대하는 건 말이 되지 않으니 성문을 활짝 열고 그들을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레오폴드 공작.”

그래서 안타깝게도 황태자가 공작령에 들어오는 걸 막지 못했고.

그런 소문을 퍼뜨렸으니 황실에서 반응을 보일 거라곤 예상했지만, 설마 황태자를 보낼 줄이야.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조금 놀라웠다.

누구의 머리에서 이런 생각이 나온 건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만큼 황태자를 보낸 건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황태자는 황제와 황후, 누구의 편도 될 수 있었으니까.

만약 어느 한쪽에 치우친 사람을 보냈다면, 사람들은 그자가 범인이라고 수군거렸을 것이다.

나 역시 그 사람을 이번 사건의 배후라고 생각했을 텐데, 그럴 수가 없게 됐다.

“레오폴드 공작령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황태자 전하.”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시다시피 공작령의 상황이 좋지 않아, 좀 더 융숭하게 대접해 드리지 못하는 점.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당연히 이해합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제게 너무 격식을 차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곧 가족이 될 사이니까요.”

“너무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네, 레오폴드 영애. 우리는 곧 가족이 될 사이니까.”

누가 부자지간 아니랄까 봐, 하는 말과 행동이 똑같네.

그 자체도 역겨웠지만, 가장 역겨운 건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나를 집어넣는 거였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삼키고자 차를 마셨다.

향긋한 캐모마일 덕분에 울렁이던 속이 조금씩 진정됐다.

“기사단장 취임식 도중에 화산이 폭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놀랐습니다. 게다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범인이 따로 있었다니.”

황태자는 몹시 안타깝다는 듯 탄식했지만, 그의 눈동자는 웃고 있었다.

황제나 페르데스와 달리 황태자는 연기를 상당히 못 하는 편이었다.

나야 상대하기 쉬워서 좋지만.

“그나마 피해가 생각했던 것보다 크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부디 하루라도 빨리 수습되기를 바라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뒤로 황테자는 페르데스의 안부를 묻는 등,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나와 친한 것도 아닌데, 자리를 뜨지 않고 구태여 저런 걸 묻는다는 건 내게 할 말이 있다는 의미.

“중요하게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먼저 일어서도 될까요? 황태자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영지 복구로 조금 바쁜 상황이라서요.”

할 말이 있으면 쓸데없이 뜸을 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라.

그런 의미를 담아 말했더니, 순간적으로 황태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소문을 들었습니까?:

역시 그 이야기구나.

“무슨 소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다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되물었다.

그러자 황태자는 조금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두 손을 꼭 마주 쥐고, 말을 덧붙였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중 한 분이 화산 폭발 사건의 배후라는 ……소문 말입니다.”

“아, 그거요.”

내가 비로소 알아들은 듯 연기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황태자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깊어졌다.

그는 아까보다 더 낮아진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혹시 그 소문을 믿습니까?”

“그럴 리가요. 그런 헛소문을 믿을 리가 없잖아요.”

“그렇죠?”

잔뜩 구겨져 있던 황태자의 얼굴은 다리미질이라도 한 것처럼 쫙 퍼졌다.

그는 반색하며 말을 이었다.

“부황 폐하는 물론 어마마마께서도 진심으로 레오폴드 공작과 공작가를 아끼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번 화산 폭발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무척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안타까워하긴 했겠지.

계획이 실패한 것에 대해서 말이야.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들만 두고 보면 제삼자가 유력한 용의자 같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제 3자와 황제나 황후 중 한 명이 손을 잡고 이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두 사람 중 유력한 후보는 당연히 황제였다.

“그런데 이딴 소문이 퍼지다니…….”

생각만 해도 화가 난다는 듯 황태자는 이를 악물었다.

눈동자에 선명한 분노가 보이는 걸 봐서 이번에는 진짜 화가 난 모양이네.

“이는 엄연한 황족 모독이니, 꼭 범인을 잡아서 처벌하겠습니다.”

“부디 그렇게 해 주세요.”

그럴 수 있다면 말이지.

나는 시커먼 속내를 감추며 웃었다.

황태자도 화답하듯 웃다가 시간을 확인하고 짧게 탄성을 뱉었다.

“제가 바쁜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요.”

황태자가 일어서자 나도 일어섰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레오폴드 공작.”

“벌써 가시는 건가요?”

“네. 마음 같아선 좀 더 머물며 공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니 어쩔 수 없지요.”

“그럼 범인은요?”

내 질문에 황태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날 쳐다봤다.

“황태자 전하께선 그 소문을 낸 범인을 꼭 잡겠다고 하셨지요.”

“그랬죠.”

“누가 소문을 퍼뜨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소문의 근원지는 화산 폭발을 일으킨 범인, 발렌드 페일입니다. 그가 ‘폐하께서 시키셨다’라고 자백했으니까요.”

“……!”

“소문을 들으셨다면 이 사실도 알고 계실 텐데, 어째서 발렌드 페일을 만나 보지 않고 그냥 가시려는 거죠? 마치…….”

나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씩, 웃었다.

“그 사람을 절대 만날 수 없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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