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
갑자기 왜 쓰러진 거지?
설마 독이라도 먹은 건가?
그럴 리가.
감옥에 집어넣기 전에 입 안까지 구석구석 확인해 봤지만, 독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발렌드 페일의 상태를 살펴봐야 할 것 같아 감옥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알도르 경이 팔을 뻗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그래요.”
그게 맞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감옥 안으로 들어간 알도르 경은 발렌드 페일의 맥을 짚고, 눈동자를 보는 등 그의 상태를 면밀하게 살펴봤다.
“어떻지? 죽은 건가?”
“다행히 죽지는 않았습니다만, 맥이 너무 약합니다.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주치의를 불러라. 아니다. 저 남자를 직접 주치의에게 데리고 가야겠다.”
혹여 주치의가 오는 동안 발렌드 페일이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내 말에 알도르 경은 발렌드 페일을 들쳐 메다 말고 멈칫했다.
“왜 그래요, 알도르 경?”
“이것 보십시오, 아가씨.”
알도르 경이 발렌드 페일의 왼쪽 손바닥을 내게 보여 주었다.
그의 손바닥에는 정체불명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설마 이것 때문에 발렌드 페일이 발작을 일으킨 건가?
“주치의에게만 보여 줘서 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며 뒤에 서 있는 간수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페르데스 님에게 그노시스와 함께 주치의실로 와 달라고 전해 주렴.”
* * *
“아델. 날 찾았다고…….”
내게 살갑게 말을 건네려던 페르데스는 침대에 누워 있는 발렌드 페일을 보고 멈칫했다.
뒤따라오던 그노시스가 그의 등에 부딪혔는지 작게 신음했다.
“왜 갑자기 멈추시는 겁니까, 페르데스 님.”
페르데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날 쳐다봤다.
저 남자가 왜 여기 있어?
그의 눈빛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심문하던 와중에 갑자기 발작하며 쓰러졌어요.”
“갑자기? 독이라도 먹은 건가?”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주치의가 말하길 독을 먹은 건 아니래요.”
“그럼 뭐 때문에…… 혹시 마법 때문인가?”
역시 바로 알아채는구나.
뭐, 그노시스까지 불렀으니 당연한 거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며 알도르 경에게 잠시 나가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페르데스에게 발렌드 페일의 왼쪽 손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을 보여 주었다.
“이게 무슨 마법진인지 아시겠어요?”
페르데스가 성큼 다가와 마법진을 유심히 살펴봤다.
뒤에서 부딪쳐서 약간 빨개진 코를 만지던 그노시스도 마법진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긴 듯 다가왔다.
“……!”
마법진을 본 그노시스가 무척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반응을 본 페르데스가 물었다.
“이게 무슨 마법진인지 알아?”
“아니요. 무슨 마법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노시스가 약간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을 이었다.
“디아볼로스를 실행하기 위한 마법진인 건 알겠습니다.”
“디아볼로스?”
“……!”
나는 처음 듣는 단어라서 알아듣지 못했지만, 페르데스는 알아들었는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정말로 이 마법진이 디아볼로스용이란 말인가?”
“확실합니다. 디아볼로스 외에 저 마법진을 사용하는 마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디아볼로스는 악마가 쓰는 마법인데…….”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악마라고?
“그 말은 발렌드 페일에게 마법진을 새긴 자가 악마라는 건가?”
내가 들은 게 맞는지 확인차 물어보자 그노시스가 고개를 저었다.
“거기까지는 저도 모릅니다.”
“이 마법진이 악마가 쓰는 마법진이라고 확신해 놓고 모른다고?”
“디아볼로스를 주로 쓰는 대상이 악마이긴 하나, 악마만 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드래곤 같은 마법 쪽에 높은 능력을 갖춘 이종족도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사용하지 못해.”
페르데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고 해도 인간은 디아볼로스를 쓸 수가 없어.”
“어째서죠?”
“디아볼로스는 마나가 아닌 마력을 쓰는 마법이거든. 당연히 마법진에도 마력을 부여해야 하는데 인간 중에서 마력을 가진 사람은 없어.”
“마나와 마력이 다른 건가요?”
“다릅니다.”
이번엔 그노시스가 대답했다.
“마나는 자연에서 빌리는 힘이라면, 마력은 태생부터 지니고 있던 힘입니다. 사람은 절대로 마력을 지니고 태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노시스는 그 외에도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지만, 문외한인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건 한정적이었다.
그래도 발렌드 페일의 손바닥에 마법진을 그린 자가 사람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당연히 황제가 한 짓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더 골치가 아픈 건 이번 사건에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이 끼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게다가 디아볼로스라는 마법을 드래곤도 쓸 수 있다고 하니,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설마…… 이번 일에 레드 드래곤이 관련되어 있는 건 아니겠지?
페르데스도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발렌드 페일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자가 갑자기 쓰러진 것도 이 마법진 때문이겠지.”
“아마도요.”
만약 그렇다면 발렌드 페일을 깨우려면 마법진을 해제해야 한다는 의미.
페르데스도 같은 생각인지 그노시스에게 물었다.
“그노시스. 이게 어떤 마법진인지 알아낼 수 있을까?”
“글쎄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악마나 저주에 관한 책을 뒤져 보면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악마나 저주에 관한 책이라고?
“문제는 그런 책들은 대부분 금서라서 찾기가 힘들다는 거지요.”
“……저주에 관한 책이라면 내가 가지고 있어.”
페르데스와 그노시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특히 그노시스는 무척 놀라며 내게 되물었다.
“정말로 저주에 관한 책을 가지고 있습니까?”
“응.”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공작저의 지하실.
그곳에 아버지를 비롯한 선대 공작들이 모아 둔 저주에 관한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 * *
알도르 경에게 발렌드 페일의 감시를 맡기고, 곧장 지하실로 내려가 저주와 관련된 책들을 챙겼다.
책의 양이 워낙 많다 보니 나 혼자서 전부 옮기는 건 절대로 무리였다.
이 중에 어떤 책이 필요한지도 몰랐고.
이럴 때 가장 좋은 건 그노시스를 지하실에 보내는 거였지만, 지하실은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과 공작의 허락을 받은 자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인지라 그럴 수가 없었다.
이번 일 때문에 그노시스가 지하실에 출입하는 걸 허락할 수도 없었고.
그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한 번 허락을 내리면 거둘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눈에 띄는 몇 개만 가지고 나와 그노시스에게 내밀었다.
아주 잠깐 지하실에 들어갔다가 나온 건데, 무려 12시간이나 흘러 있었다.
“다른 책들도 있으니,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가져다 줄게.”
“네. 각하.”
“혹시 알아낸 게 있으면, 즉시 내게 말하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은 그 누구에게도 절대로 말하지 말도록. 만약 유출한다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겠지?”
약간 무섭게 말하자 그노시스가 겁을 먹은 듯 눈동자를 잘게 떨며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좋은 마음으로 날 도와주는 사람인데 너무 했나.
아니야. 이런 일일수록 입단속을 잘해야지.
그렇게 그노시스와 헤어지고, 집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페르데스와 만났다.
정확히는 페르데스가 집무실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무슨 일이에요?”
“묻고 싶은 게 있어서.”
페르데스가 그리 말하며 집무실을 흘겨봤다.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나는 페르데스를 데리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문을 닫자마자 페르데스가 물었다.
“지하실에 저주에 관한 책들이 많다고 했지?”
“네. 과장을 조금 보태서 평생 봐도 다 못 볼 정도로 많아요.”
“그중에서 우리가 필요한 자료가 있는지는 어떻게 찾지?”
“글쎄요. 일단 눈에 띄는 책을 몇 개 가져다주긴 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나를 들여보내 줘.”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뜬금없는 말에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전에 듣자 하니 공작의 허락을 받으면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이 아니더라도 지하실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던데. 맞지?”
“그렇긴 한데…….”
“그럼 날 들여보내 줘. 내가 직접 들어가서 필요한 책이 있는지 찾아볼게. 그러는 편이 확실하잖아. 만약 자료가 있다면 빨리 찾을 수도 있고.”
“그건 안 돼요.”
내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페르데스의 얼굴에 짙은 실망감이 서렸다.
“왜 안 된다는 거지? 혹시 나를 못 믿는 건가?”
“아니요. 그런 이유가 아니라 제 허락을 받더라도 페르데스 님은 책이 있는 안쪽 방까지 들어가지 못해요.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공작가의 혈족뿐이거든요.”
“아. 그런 거였어?”
비로소 이해한 듯 페르데스가 작게 탄성을 뱉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상한 오해를 했네. 미안.”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에요. 절 위해서 그러신 건데,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내가 더 고마운데.”
“제가 더 고맙게 생각해요.”
“아니야. 내가 더 고마워.”
“풉.”
문득 지금 행동이 약간 바보같이 느껴져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페르데스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도 웃었다.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며 한참을 웃던 와중, 비보가 들려왔다.
바로 발렌드 페일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