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발렌드 페일.
페일 자작가의 장남이자, 이번 폭발 사건의 범인 이름이었다.
내가 발렌드 페일을 만나러 지하 감옥에 간 건, 사건이 일어난 지 약 일주일째 되는 정오 무렵이었다.
그동안 찾아가지 않았을뿐더러, 심문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둔 건, 발렌드 페일을 심적으로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때로는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 게 더 효과적인 법이었으니까.
그리고 발렌드 페일에게 이번 일을 사주한 배후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고자 일부러 이번 사건을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널리 알렸다.
한데 내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 발렌드 페일이 전부 다 실토하면 어쩌려고 저러는 거지?
혹시 그 남자가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는 건가?
“그게 더 이해 안 되는데.”
아나토메 친위대 소속인 그 호위 기사는 이런 쪽에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지만 발렌드 페일은 아니었다. 그는 평범한 귀족이었다.
조사한 것에 따르면 말이지.
아나토메 친위대 소속 기사들이 대체로 신분이 노출되지 않고, 베일에 싸여 있는 만큼 발렌드 페일 역시 그럴 수 있었다.
겉보기엔 검이나 이런 쪽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혹시 모르니 확인해 보는 게 좋겠지.
“오셨습니까, 단장님.”
지하 감옥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꾸벅, 허리 숙여 인사했다.
기사단장 취임식 이전에는 기사들이 날 부르는 호칭이 아가씨, 공작 각하 등 제각각 달랐는데, 이후에는 단장님으로 통일됐다.
단 한 명, 알도르 경을 제외하고.
기사들이 한꺼번에 호칭을 바꾼 걸 보면 알도르 경의 입김이 작용한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만 호칭을 바꾸지 않은 게 조금 이상해서 한 걸음 떨어져 따라오고 있던 알도르 경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친 알도르 경이 특유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그에게 아가씨라고 불러도 좋다고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아가씨라고 부르냐고 묻는 건 이상한 것 같아 묻지 않았다.
“그럼 들어가지.”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자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몇 번을 맡아도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유쾌하지 않은 냄새였다.
나는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으며 발렌드 페일이 갇혀 있는 가장 안쪽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이전에 체르노서를 호위했던 호위 기사가 갇혀 있던 그 감옥이었다.
그 호위 기사는 매일같이 지독한 심문을 받아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발렌드 페일은 비교적 멀쩡했다.
이전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거세게 반항하다가 알도르 경에게 얻어터진 것 말곤 다친 곳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 겉보기엔 말이지.
속이 어떤지는 들여다볼 수 없으니 알 수 없었다.
“……!”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발렌드 페일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허겁지겁 일어나 다가왔다.
그러자 알도르 경이 나를 보호하려는 듯 한 발 앞으로 나와 손을 뻗었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그의 팔을 잡아 내린 뒤 발렌드 페일을 쳐다봤다.
덜컹-
쇠창살이 흔들리는 소리가 고요한 지하 감옥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발렌드 페일이 원숭이처럼 창살에 매달려 소리쳤다.
“억울합니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에선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듯한 소리가 났다.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저를 붙잡아 오신 겁니까! 아무리 공작 각하라도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이 모든 건 부당한 대우라고, 지금이라도 자신을 풀어 달라고 발렌드 페일은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처절하고 애처로운지, 정말로 억울하게 붙잡혀 온 사람처럼 보였다.
나 역시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렇게 생각했겠지.
전부 다 알면서 보니 그의 행동이 가당찮고 우스웠다.
“정말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발렌드 페일.”
내가 이름을 부르자 발렌드 페일의 눈꺼풀이 살짝 흔들렸다.
그것도 잠시, 그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물론입니다.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페일 자작가는 황제파 귀족으로 신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저런 발언을 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조금 놀라웠다.
아무리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해서는 안 되는 발언이었으니까.
물론 그가 정말로 잘못한 게 없다면 가능했지만, 아니었다.
발렌드 페일은 이번 화산 폭발 사건의 범인이 확실했다.
그런데 이리도 뻔뻔하게 나오는 건 절대 들킬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
발렌드 페일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페르데스가 봤다던 발렌드 페일의 옷은 평민들이 입는 평범한 옷이라서, 그의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가 없었다.
초대받지 않은 그가 이곳에 있는 거나, 화산 분출구 근처에서 퓨라 파편이 잔뜩 발견된 것도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증거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발렌드 페일이 배후로 추정되는 자와 나눈 대화를 전부 녹음한 브로치는 아니었다.
일회용인 게 다소 아쉽기는 했지만, 그에게 자백만 받아 낸다면 상관없었다.
그렇다고 바로 쓸 생각은 없었다.
우선은 추궁했다가, 그가 끝까지 발뺌한다면 그때 사용해야지.
“잘못한 게 없다니. 그것참 이상하군.”
나는 턱에 손을 대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4황자 전하께선 자네가 화산에 올라가는 걸 봤다고 하던데.”
순간 발렌드 페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는 당황한 듯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는 그날 화산 근처에도 가지 않았으니까요!”
“호오, 그래?”
“네! 평민들 틈에 섞여 광장에서 각하의 기사단장 취임식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귀족이면서 귀족석이 아닌 평민들 틈에 섞여 있었다니. 왜지?”
“저는 초대 받지 못한 손님이니, 각하께 괜히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다소 횡설수설하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발렌드 페일처럼 평민들 틈에 끼어 행사를 구경하는 귀족들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난 그날이라고 했을 뿐, 기사단장 취임식 날이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날이 그때인 걸 안 거지?”
“……!”
“대답해라, 발렌드 페일. 어떻게 안 거지?”
“그, 그것이…….”
변경 거리를 생각하는 듯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다녔다.
나는 발렌드 페일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재촉했다.
“바로 말하지 않는다면, 자네가 이번 사건의 범인이라고 단정하고 처벌하겠다.”
“버, 범인을 찾는다고 하셔서 그랬습니다!”
처벌이라는 단어를 강조하자 발렌드 페일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가, 각하께서 그날 화산에 퓨라를 넣어 강제로 폭발시킨 범인을 찾는다고 하셔서…… 그래서 그날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하핫.”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발렌드 페일이 눈에 띄게 굳었다.
조바심과 불안감이 뒤엉킨 눈동자가 부질없이 떨렸다.
“왜, 왜 웃으시는 건지…….”
“알도르 경.”
나는 대답하는 대신 알도르 경에게 물었다.
“이 남자를 붙잡을 때, 왜 붙잡는 건지 설명해 줬나요?”
“그러지 못했습니다.”
“왜죠?”
“저 남자가 페르데스 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도망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도망치기 전에 붙잡아야 했기에 설명할 틈도 없이 기절시켜야 했습니다.”
“확실한가?”
나는 발렌드 페일에게 물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무슨 의미지?”
“제가 그때 도망치려고 했던 건 4황자 전하와 저 남자가 절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니, 무서워서 그랬던 겁니다.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때의 일이 생각나기라도 했는지,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아니나 다를까 저 남자는 절 무자비하게 때렸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했는데 다시 깨어 보니 이런 곳에 갇혀 있어서 어찌나 당황했는지 아십니까?”
“그 말은 중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전혀 안 난다는 건가?”
“물론입니다. 기절했는데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발렌드 페일이 제 억울함을 알아 달라는 듯 말했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방금 한 말로 지금까지 그가 했던 변명들이 전부 헛수고가 됐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알고 있지?”
“네? 그 무슨…….”
“화산 폭발이 자연재해나 드래곤의 분노가 아닌 누군가 고의로 일으킨 사건이라는 걸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묻는 거다. 그 사실이 밝혀진 건 자네가 기절한 뒤의 일인데?”
“……!”
“그리고 자네는 그 뒤로 지금까지 이곳에 갇혀 바깥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지. 그런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하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적이었는지, 발렌드 페일의 얼굴에 짙은 낭패감이 서렸다.
“혹시 폐하가 알려 주신 건가?”
더는 질질 끌고 싶지 않아 대놓고 물었다.
“……!”
그러자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발렌드 페일의 눈동자가 부질없이 흔들렸다.
수프 한 그릇 얻어먹지 못한 사람처럼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 저는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끝까지 발뺌하겠다는 건가.”
“바, 발뺌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이해가 안 돼서 물어보는 겁니다. 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뒤에도 몇 번 더 물어봤지만, 그는 끝까지 모르는 척했다.
어떤 변명을 해도 손해 볼 것 같으니 모르는 척하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보루를 써야겠군.
“이걸 듣고도 계속 모르는 척할 수 있을까.”
나는 발렌드 페일에게 녹음된 내용을 들려주었다.
이를 악다물고 모른 척하던 발렌드 페일의 얼굴이 서서히 무너졌다.
철장을 꽉 쥐고 있던 손은 미끄러져 내려와 바닥을 더듬었다.
“다시 묻겠다. 발렌드 페일.”
나는 그런 그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혔다.
“황제 폐하가 시킨 건가?”
“그, 그, 그것이,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제가, 그래서, 아니, 폐하께서…… 컥!”
두서없이 더듬더듬 이야기하던 발렌드 페일은 돌연 외마디의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