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좋아하는 사람.
꾸밈없이 솔직하게 부딪쳐오는 그의 마음이 부담스러워 입을 꾹, 다물었다.
반면 페르데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대가 직접 움직인다면, 그놈들이 눈치를 채고 도망칠 수도 있으니 더욱 말할 수가 없었어.”
“……그렇군요.”
왜인지 목이 메 간단한 말을 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의 마음이 부담스러워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영문을 알 수 없는 감정에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어느덧 내 앞으로 다가온 페르데스가 내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물었다.
“화났어?”
“……아니요.”
“화난 것 같은데.”
“정말 화 안 났어요.”
화가 난 건 아니었지만, 고구마를 잔뜩 먹은 것처럼 속이 답답하긴 했다.
왜 이런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더욱 무지근했다.
“그럼 내 걱정을 한 거구나.”
……그런가.
여전히 혼란스러운 이 감정의 정체를 알 수가 없어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미안.”
페르데스가 엄지로 내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있으면 무조건 그대한테 말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꼭 그렇게 해 주세요.”
이건 확실하게 바라는 거라 냉큼 대답했더니, 페르데스가 눈매를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평소와 같은 웃는 모습인데, 오늘따라 요사스럽게 느껴져 괜히 볼이 붉어졌다.
그가 잡은 손 역시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서 슬쩍 손을 빼내며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건 찾으셨어요?”
본래의 궤도를 벗어난 대화의 주제도 다시 원래대로 돌렸다.
페르데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아니. 그건 알아내지 못했지만, 대신 분출구 주변에 퓨라 파편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건 발견했어. 그리고…….”
페르데스는 말을 하다 말고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분출구 안쪽에도 퓨라의 파편이 있었어.”
“분출구 안도 살펴보신 거예요? 그러다 떨어지면 어쩌시려고요!”
깜짝 놀라며 소리치자, 페르데스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볼을 긁적였다.
“이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페르데스 님!”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만 살짝 집어넣었던 거야. 위험한 짓은 안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것만 해도 충분히 위험한데.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페르데스는 헛기침을 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
“하여간 분출구 안쪽에도 퓨라의 파편이 있다는 건, 퓨라를 집어넣었다는 거잖아.”
“…….”
“그래서 화산 폭발이 일어난 게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닌 그 남자가 강제로 일으킨 것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됐지. 퓨라는 뜨거운 불에 집어넣으면 폭발을 일으키는 성질이 있으니까.”
그의 말대로였다.
그래서 기차를 움직일 때도 순도 높은 퓨라를 사용했다.
“그것만으론 그 남자가 한 짓이라고 확정 짓기 힘들었을 텐데요.”
“아, 그 부분이라면 다음날 그 남자의 뒤를 밟으면서 확실하게 알게 됐어.
“그 남자가 계속 공작령에 남아 있던가요?”
“다행히 남아 있더라. 뭐, 성문이 닫혀서 도망치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화산 폭발 같은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그 영지는 위험 지역으로 분류되어,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성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이러면 안에 있는 사람들도 마음대로 나가지 못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외부인이 들어왔다가 문제가 생기는 것보단 나을뿐더러.
혼란을 틈타 침입한 외부인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빈번했던 터라 성문을 닫는 게 맞았다.
나 역시 그리 판단하고 즉시 성문을 걸어 잠갔다.
그 탓에 남자는 도망치지 못하고 영지에 발이 묶인 것.
어쩌면 처음부터 도망칠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었다.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성문을 닫는다는 건 기본 상식이었으니까.
그 남자가 몰랐을 리가 없었다.
“뒤를 밟다가 그 남자가 마법 통신 반지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걸 엿듣게 됐는데, 그때 그가 한 짓들을 줄줄이 나열하더라.”
“그래서 그 남자가 한 짓이라는 걸 확실하게 알게 됐군요.”
“응. 그리고…….”
페르데스는 우리 둘밖에 없는 방 안을 쓱 훑어보더니,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도 말했어. 이제 어떻게 할까요, 폐하? 라고 말이지.”
“……!”
현재 제국에서 폐하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사람은 단 두 명, 황제와 황후뿐이었다.
그럼 역시 황제가 범인인 건가?
가능성은 매우 컸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확실한 건 이안은 이번 일과 연관이 없다는 거였다.
만약 그 남자가 이안을 불렀다면 전하 혹은 소후작님이라고 불렀을 테니까.
“그리고 그 남자가 오늘, 텔레포트 스크롤을 이용해서 몰래 공작령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계획도 알아냈어.”
“그래서 알도르 경을 데리고 가신 거군요.”
“맞아. 그 남자의 검술 실력이 어떤지도 모르고, 혹시 모를 호위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알도르 경에게 그 남자를 붙잡아달라고 했지.”
그렇게 된 거였구나.
비로소 그동안 페르데스가 보였던 이상한 행동들이 전부 이해가 됐다.
“이제 남은 건 그 남자를 추궁해서 진짜 배후를 밝히는 거네요.”
“그렇지.”
“그런데 그 남자가 순순히 실토할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페르데스 님이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도, 아니라고 부정하면 그만이니까요.”
“그래도 상관없지만, 부정하지도 못할 거야.”
“그걸 어떻게 장담하세요?”
페르데스는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큼지막한 퓨라가 박힌 브로치였다.
“이 브로치에는 녹음 마법진이 그려져 있어.”
그 말은 설마…….
“그 남자가 폐하라는 상대와 대화한 걸 전부 녹음하신 건가요?”
페르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한 증거를 확보한 거니 기뻐해야 할 일이건만 이상하게도 페르데스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이 브로치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그게…… 조금 불안정해.”
불안정하다니?
영문 모를 말에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볼을 긁적였다.
“시간에 쫓겨 급하게 마법진을 새겼다 보니…… 상태가 불안정해서 딱 한 번밖에 쓸 수가 없어.”
그러니까 일회용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증거품으로 쓰이기엔 부족했지만, 괜찮았다.
적어도 그 남자가 그가 저지른 일들을 전부 부정하는 건 막을 수 있었으니까.
페르데스도 그래서 그 남자가 부정해도 상관없다고 말한 것일 테지.
페르데스가 고개를 숙이고 답지 않게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완벽한 마법진을 그리지 못해서 미안.”
“페르데스 님이 미안해하실 건 조금도 없어요.”
나는 브로치를 잡은 그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듯이 잡았다.
“오히려 고맙게 생각해요.”
페르데스가 없었다면 레드 드래곤의 분노를 산 공작이라는 오명을 벗지도, 범인을 잡지도 못했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고, 그만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고마워요, 페르데스 님.”
그가 떠나지 않고 내 곁에 남아줘서 정말 다행이야.
진심으로 안심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몹시 불안했다.
* * *
안개처럼 공기 중에 뿌옇게 남아 있던 화산재는 한바탕 쏟아진 빗줄기에 말끔하게 씻겨 내려갔다.
영지민들의 가슴 속에 있던 아델에 대한 불신과 의심도 같이 씻겨졌다.
대피소에서 페르데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나서며 모든 진상을 설명해준 덕분이었다.
그녀가 공작이 되길 진심으로 바라며 응원했을 때가 불과 얼마 전인데.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고 그녀를 욕했던 걸 다들 부끄러워했다.
공작 각하를 만나면 진심으로 용서를 빌어야지.
나도 진심으로 사과할 거야.
저마다 굳건한 의지를 불태웠으나, 정작 아델은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 *
사람들은 아델이 화가 나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여러 업무 처리로 바빠서 나오지 못한 거였다.
밤이 깊어가는 것을 잊은 듯, 정신없이 일하던 아델의 시선이 문득 신문 더미에 닿았다.
중요한 기사가 실린 신문들은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
아델은 가장 위에 있는 신문을 집어 들었다.
[속보] 페르데스 드 빈센트 아타나시우스 황자와 아델 레오폴드 공작의 결혼식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그녀와 페르데스의 결혼식 기사였다.
다가오는 5월 초에 두 사람은 결혼할 것으로 예상되며…….
“나를 선택해, 아델.”
기사 내용을 읽고 있으니 페르데스의 목소리가 아지랑이처럼 귓가에 울려 퍼졌다.
아델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다 가볍게 내려앉았다.
“그대가 나와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까진 욕심내지는 않을게.”
“그저 지금처럼 묵묵히 그대의 곁에서 힘이 되어줄 테니까, 날 선택해 줘.”
“차라리 내가 하면 했지, 좋아하는 사람이 위험한 행동을 하는 걸 바라지 않거든.”
그 모든 말들이 진심이라는 걸 알기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졌다.
한순간이나마 모든 근심을 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아델은 그를 계속 곁에 두는 것이 몹시 미안했다.
자신의 곁에 있으면 지금처럼 계속 위험한 일이 생길 테니까.
그때, 페르데스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던 이유였다.
그러니…….
“보내드려야지.”
좋은 사람일수록 제 이기심에 희생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쉽더라도 보내드리는 게 맞아.
……아쉽기만 한 건가?
“하아.”
다시금 혼란스러워진 감정에 아델은 깊은 한숨과 함께 신문을 꾸깃꾸깃하게 접어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