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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화 (171/262)

177화

화산 폭발을 일으킨 범인이 따로 있다니.

페르데스의 갑작스러운 폭탄선언에 싸늘한 침묵만 감돌았던 대피소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그 말은 레드 드래곤이 분노해서 화산이 폭발한 게 아니었단 말이야?”

“그, 글쎄?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화산을 폭발시킬 수 있는 거야? 마법사인가?”

“마법사라도 그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

범인을 잡아서 직접 보여줬음에도 여전히 의심과 불신의 목소리가 컸다.

“이 남자는 나흘 전 기사단장 취임식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광장에 모여 있는 틈을 타서 화산으로 향했다.”

페르데스의 말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그를 쳐다봤다.

페르데스는 담담하지만, 대피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화산 분출구에 대량의 퓨라를 쏟아부었다. 그 바람에 마그마가 퓨라에 응축된 마나와 부딪쳐 화산 폭발이 일어났던 거다.”

사람이 어떻게 화산을 폭발시킬 수 있냐는 의문을 해결해 주는 대답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남자에게 향했다.

남자는 기절한 건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남자가 화산에 집어넣은 퓨라의 양만 생각하면 거대한 용암 해일이 밀려 나와 레오폴드 영지를 한입에 집어삼켜도 이상할 게 없었다.”

용암 해일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에 사람들은 질색하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고작 이 정도에서 끝날 수 있었던 건, 레드 드래곤이 그녀를 어여삐 여겨 더 큰 피해가 생기지 않게 막아준 거라고 생각하는데…….”

페르데스는 입술 끝을 매끄럽게 말아 올리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고갯짓에 따라 흑발이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자네들의 생각은 어떻지?”

그의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사람들은 조가비처럼 입을 꾹 다물고 서로의 눈치만 살펴봤다.

페르데스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작게 조소했다.

그들이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예상했었다.

그의 생각이 맞다는 걸 인정하면, 뭣도 모르고 아델에 대해 함부로 떠들어댔던 것 역시 인정해야 하니 쉬이 인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한 명쯤은 사과할 줄 알았는데,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사과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니.

평소 레오폴드 공작령의 사람들을 좋게 생각했던 터라 더욱 실망스러웠다.

페르데스는 속으로 혀를 차며 아델을 돌아봤다.

그녀 역시 약간 물기 젖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의 심장을 사정없이 때렸다.

좀 더 일찍 범인을 잡지 못했다는, 그래서 그녀가 상처를 받게 게다는 죄책감이 몸집을 키우며 가슴을 묵직하게 눌러 왔다.

“미안.”

아델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어째서…… 페르데스 님이 사과하시는 거예요?”

흔들리던 눈동자가 어느덧 단호하게 굳어 바닥에 쓰러진 남자에게 향했다.

“사과는 이 남자가 해야죠.”

아까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안면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아델은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딱히 짚이는 사람은 없었다.

아델이 뭘 고민하는지 눈치챈 페르데스가 그녀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예전에 3황자가 데리고 있던 시종이다.”

“아.”

그 말에 아델은 종종 3황자, 이안의 선물을 전해 주러 왔던 시종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런데 이 남자가 범인이라는 건, 이번 일에 이안이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의미였다.

더 나아가 황제가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고.

‘아니, 황제는 분명히 연관되어 있을 거야.’

황제가 명령한 게 아니고서야 혼자서 이런 정신 나간 짓을 할 리가 없으니까.

그러니 아델은 이번 일에 황제가 연관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어쩐지 황제답지 않게 잠잠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계획이 다 있었다.

사람들을 선동해서 아델이 스스로 공작위를 내려놓고 물러나게 하는 것이 황제의 계획일 터.

강제로 화산 폭발까지 일으킨 걸 보면, 그녀를 죽이는 게 목표일 수도 있었다.

더 나아가 페르데스의 목숨까지 노린 것일 수도 있었고.

아니, 어쩌면 레오폴드 영지 자체를 지도에서 없애려고 한 건지도 모른다.

가질 수 없다면 철저하게 부수는 게 황제의 철칙이었으니까.

“윽…….”

정신이 든 건지 피떡이 된 남자가 신음하며 몸을 뒤척였다.

남자가 고개를 들려고 하자, 페르데스가 그의 머리를 세게 밟아 다시 바닥에 처박았다.

외마디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파묻힌 남자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페르데스는 개의치 않고 아델에게 물었다.

“그대에게 해 줄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는데, 계속 여기 있을 건가?”

그녀 역시 페르데스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기에 아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만 공작저로 돌아가죠.”

“마음이 통해서 좋네.”

그제야 페르데스는 남자의 머리에서 발을 뗐다.

그러자 그들의 뒤에 고목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알도르가 다가와 남자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알도르는 그대로 기절한 남자를 들쳐메고 먼저 대피소를 나갔다.

페르데스가 아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만 돌아갈까요, 레오폴드 공작.”

페르데스는 일부러 공작, 이라는 부분에 강한 악센트를 넣어,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말했다.

그가 왜 그런 건지 바로 눈치챈 아델이 옅게 웃으며 페르데스의 손 위에 제 손을 살포시 얹었다.

그대로 돌아서서 대피소를 나가려는 그때.

“죄, 죄송합니다. 영주님!”

누군가 대피소가 떠나갈 정도로 우렁차게 소리쳤다.

이에 놀란 아델이 뒤를 돌아보자, 처음 이야기를 꺼냈던 남자를 비롯한 대피소의 모든 사람들이 아델을 향해 무릎을 꿇고 넙죽 엎드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공작 각하!”

“누가 뭐라고 해도 저희만큼은 영주님을 믿었어야 했는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이번 일에 대해 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언제 입을 다물고 머뭇거렸냐는 듯 사람들은 일제히 입을 모아 잘못했다며 빌었다.

때늦은 사과였다.

이제 와서 잘못했다고 빌어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는데.

콧방귀를 끼던 페르데스는 곧 생각을 정정했다.

사람들을 바라보는 아델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서.

보조개가 보일 정도로 그녀가 웃고 있어서.

이제라도 사람들이 사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을 고쳤다.

* * *

이안의 시종이었던 그 남자는 지하 감옥에 가두고, 알도르 경에게 철저하게 감시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침실 소파에 앉아 맞은 편에 앉은 페르데스에게 물었다.

“처음부터 그 남자가 이번 사건의 범인이라는 걸 알고 계셨어요?”

“아니. 처음에는 의심만 했고, 확실하게 범인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사흘 전이야.”

사흘 전이라면, 화산 폭발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이었다.

“내가 그 남자를 처음 발견한 건, 나흘 전이야. 갑작스럽게 화산 폭발이 일어나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걸 발견했지.”

“보자마자 바로 의심하신 거예요? 왜요?”

“그 남자는 초대받지 못했을뿐더러, 방명록에도 이름이 없었으니까.”

그날, 방명록에 이름이 적힌 사람은 어림잡아도 이백여 명이었다.

주최자인 나조차도 직접 인사를 나눈 귀족들 말고 누가 온 건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페르데스가 어떻게 그 남자의 이름이 방명록에 없다는 걸 바로 알아챈 건지 의아했다.

“게다가 그 남자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화산 쪽으로 가고 있었어.”

“그건 확실히 수상하네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몰래 그 남자의 뒤를 밟았던 거야.”

아, 그래서 그때 페르데스가 말도 없이 사라졌던 거구나.

“그 남자는 으슥한 곳으로 들어가더니 무너진 건물의 돌무더기 사이에 보자기로 꽁꽁 싸맨 무언가를 집어넣더군.”

“그게 뭔지 확인해보셨어요?”

“응. 옷이더라. 옷자락이 약간 그을리고, 땀과 화산재 같은 게 범벅되어 있는 아주 더러운 옷이었어.”

그 옷을 입고 화산을 올라간 걸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 모습을 직접 본 게 아니니 확신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옷에는 마나 흔적이 잔뜩 묻어 있었어.”

“마나 흔적이요?”

“응. 마법이나 마법 도구를 쓰면 손이나 옷에 마나 흔적이 남아. 강력한 마법을 쓸수록 흔적이 더 많이 남지.”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아, 알고 있구나.”

페르데스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여간 그 옷에 마나 흔적이 잔뜩 남아 있는 걸 봐서, 마법을 쓴 게 분명하니 어떤 마법일지 곰곰이 생각해봤지.”

페르데스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긴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은 화산 폭발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였어. 그래서 다음날, 화산에 올라가 봤지.”

지금 뭐라고…….

“지금 화산을 올라가셨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것도 전날 폭발했던 화산을 아무 보호 장비 없이,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올라가셨다고요?”

내가 다그치듯이 묻자 페르데스가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하게 왜 그러셨어요!”

만약 화산이 또 폭발하기라도 했다면 페르데스는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그가 죽는다니.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어쩌자고 그런 위험한 행동을 하신 거예요. 적어도 저한테 말씀이라도 해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말하면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말릴 거잖아.”

“그야 당연히……!”

“그리고 그대가 직접 증거를 찾으러 화산에 올라갔겠지.”

“…….”

정곡을 찌르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페르데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말하지 못했던 거야.”

“…….”

“차라리 내가 하면 했지, 좋아하는 사람이 위험한 행동을 하는 걸 바라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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