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관리의 이야기는 놀라웠지만, 예상했던 일이긴 했다.
화산에 얽힌 레드 드래곤의 이야기는 레오폴드 영지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설화이니, 이런 말이 돌 거라곤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상황을 마주하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끔찍해서 양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
내가 손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자, 관리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계속 말해.”
“각하…….”
“나는 계속 말하라고 했다.”
관리가 난감해하며 다른 관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 누구도 관리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에븐 자작. 같은 말을 몇 번 하게 할 생각이지?”
내가 호명까지 하며 어서 말하라고 재촉하자 관리, 에븐 자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표정을 흐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 그것이…… 앞으로 레드 드래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선 각하께서 공작위를…… 내려놓는 게 맞다는 의견이 암암리 나오고 있습니다.”
쿵-
가슴 속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가 새카매지기를 반복했다.
“무, 물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화산이 폭발한 건 자연재해일 뿐, 각하께서 공작위를 승계받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요.”
“맞습니다. 레드 드래곤 이야기는 단순한 설화일 뿐이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떠드는 이야기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각하.”
다른 관리들까지 나서서 나를 위로해 줬지만, 전혀 위로되지 않았다.
레드 드래곤 이야기가 단순한 설화가 아니라는 건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걸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려서, 인상을 쓰며 미간을 짚었다.
눈치 빠른 관리들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흘끗, 나를 흘겨보는 사람들의 불쾌한 시선은 여전했다.
그 시선 하나, 하나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등과 가슴에 꽂혔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나를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있다니 뻔뻔하다고.
당장 내려오라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듯한 착각이 들어 무척 괴로웠다.
한 관리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시고 공작저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초콜릿보다 더 달콤한 제안이었다.
나 역시 공작저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공작저에선 이렇게 따가운 눈총을 받을 일이 없을 테니까.
……정말 받지 않을까?
공작저의 사용인들도 화산 폭발이 단순한 자연재해라고 생각해 줄까.
문득 든 의문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생의 나였다면 그럴 거라고 확신했겠지만, 세 번째 생에서 믿었던 하녀에게 배신을 당한 지금의 나는 아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마구 샘솟는 의심 때문에 공작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잔뜩 남아 있어 돌아갈 수 없기도 하고.
지금 돌아간다면 사람들은 필시 내가 찔리는 게 있어서 도망친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차를 부르겠습니다, 각하.”
“……아니.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서자, 아델 레오폴드.
사람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서 좋을 건 없잖아.
어차피 사람들은 내 앞에선 아무 말도 하지 못할 테니,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크게 심호흡하며 울렁이는 속을 다스린 뒤,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는 관리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이만 다음 장소로 가지.”
* * *
“화산 폭발이 또 일어날까 봐, 무서워서 잠을 못 자겠어.”
“맞아. 각하께서 레오폴드 공작의 자리에 앉아 있는 한, 레드 드래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을 테니까…….”
내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지만, 뒤에서는 얼마든지 떠들 수 있다는 걸.
지나가다가 우연히 그 이야기들을 엿들을 수 있다는 걸, 과거의 나는 왜 몰랐던 걸까.
“언제까지 불안에 떨고 싶진 않아. 얼른 작위를 내려놓고 내려오셨으면 좋겠어.”
“각하도 눈치가 있다면 곧 내려오시겠지.”
“글쎄. 과연 그럴까. 공작이 되고 싶어서, 연합국에 있는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하신 분이잖아. 쉽게 안 내려올 것 같은데.”
“그건 그렇네. 게다가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육은 각하 말고 없으니까…….”
살짝 열린 대피소 문틈을 통해 흘러나온 말들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혔다.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알도르 경을 대신해서 나를 호위하던 기사가 정색하며 나서려고 하자, 나는 손을 들어 그를 제재했다.
“잠깐 기다리도록.”
“하지만 각하…….”
“괜찮아.”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사실 조금도 괜찮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이번 일에 대해 뭐라고 떠드는지 내 두 귀로 직접 듣고 싶은 아집 때문에 버텼다.
화산이 폭발한 이유가 정말로 레드 드래곤이 분노했기 때문인가.
레드 드래곤이 분노한 이유는 아델 레오폴드가 공작의 자리에 마음대로 앉았기 때문인 건가.
아델 레오폴드가 공작위를 내려놓고 물러나면 레드 드래곤의 분노가 풀릴 것인가.
레드 드래곤은 아델 레오폴드의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가.
아무리 아델 레오폴드가 선대 공작이 정한 정식 후계자가 아니라고 해도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육은 맞는데.
정말로 혈육이 맞는 걸까?
혹시 다른 비밀이 숨어 있는 건 아닌 건가?
등등 내가 엿듣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온갖 추측을 하며 자유롭게 떠들었다.
그들이 뱉은 말은 촘촘한 올가미가 되어 내 숨통을 서서히 조여 왔다.
기사한테 먼저 들어가 보라고 할 걸, 괜히 듣고 있었어.
때늦은 후회가 거친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람들이 떠드는 걸 같이 들은 호위 기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각하.”
“…….”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담담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직접 내 험담을 하는 걸 들어서일까.
아까처럼 낙엽처럼 바스러지는 마음을 추스르는 게 쉽지 않았다.
흔들리는 눈으로 하염없이 바닥만 바라보고 있는데, 기사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은 이만 공작저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각하.”
“……아니. 이곳이 마지막이니, 여기만 살펴보고 가지.”
여기까지 어떻게 버텼는데 도망치고 싶지 않아,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대피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
“…….”
조금 전만 해도 시끌벅적했던 대피소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대다수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웃자.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웃는 거야.
“…….”
웃어야 하는데…… 웃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가시가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따가워 약간 인상을 쓰자, 사람들은 몹시 불안해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평민이 귀족인, 그것도 공작이자 영주인 내 험담을 하는 건 큰 죄였다.
내가 벌을 내린다고 해도 그들은 할 말이 없었다.
……벌을 내릴 생각은 없지만.
“각하.”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자 기사가 걱정스럽게 불렀다.
이에 티끌만큼 남은 이성을 끌어안으며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그때, 대피소의 문이 열렸다.
“이런. 내가 늦은 건가?”
이 목소리는…… 페르데스?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눈이 마주친 페르데스가 눈매를 사르르 접으며 웃었다.
“그대의 표정을 보아하니 다행히 늦은 건 아닌 모양이네.”
페르데스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참으로 웃긴 일이지.”
그리고 대피소에 있는 사람들을 쭉 훑어보며 말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그녀가 공작위를 승계받아서, 영주가 돼서 다행이라고 말했던 사람들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며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하다니…… 웃기다 못해 화가 나려는군.”
“하지 마세요.”
그제야 페르데스가 뭘 하려는 건지 눈치채고 팔을 잡으며 만류했지만, 되레 그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괜찮아.”
“…….”
“내가 해결해 줄게.”
도대체 뭘 어떻게 해결해 준다는 걸까.
내 눈에 보이는 페르데스의 행동은 잔뜩 성이 난 벌집을 들쑤시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재차 만류하려고 했지만, 페르데스의 행동이 더욱 빨랐다.
“자네들이 걱정하는 게 뭔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걱정에는 아주 큰 오류가 있어.”
오류가…… 있다고?
“그건 바로 이번 화산 폭발이 레드 드래곤이 분노한 것도, 단순한 자연재해도 아니라는 거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황당하고 의아한 이야기에 나뿐만 아니라 대피소에 있는 사람들도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오히려 즐기는 듯 페르데스는 씩,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들어와.”
페르데스가 신호를 보내자, 열린 문을 통해 누군가 들어왔다.
바로 알도르 경이었다.
그런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알도르 경은 얼굴이 피떡이 된 남자의 멱살을 잡은 채 뚜벅뚜벅 들어오더니 그 남자를 내 앞에 던졌다.
“…….”
느닷없는 알도르 경의 행동에 나는 속으로 흠칫 놀라며 그를 봤다가,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이 모든 게 페르데스의 계획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예상이 맞는지, 페르데스가 웃으며 말했다.
“이 남자가 바로 이번 화산 폭발을 일으킨 범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