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끔찍한 화산 폭발이 일어난 지 나흘째 되는 이른 아침.
늘 그랬듯이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새벽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알도르는 제 방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멈칫했다.
“훈련하고 오는 건가?”
그 사람은 바로 페르데스였다.
“구호 활동 때문에 당분간 훈련 일정을 전부 취소한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하고 오다니. 역시 성실하군.”
“…….”
페르데스가 살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알도르는 되레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른 아침부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페르데스가 다소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어쩐 일이긴. 자네를 만나러 왔지.”
그러니까 왜.
페르데스가 말한 대로 구호 활동 때문에 약 일주일간 모든 훈련이 취소됐다.
페르데스가 검술 수업이 끝난 뒤에도 체력 증진을 위해 꾸준히 받던 아침 훈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한데 무슨 연유로 이렇게 이른 아침에 기사단 숙소까지 직접 찾아온 걸까.
공적인 문제라면 아델을 통해 전달했을 테고.
사적인 문제는…… 일어날 리가 없다.
그와 자신은 사적인 대화를 나눌 만큼 친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도대체 왜 온 거지?’
페르데스의 의중이 도무지 가늠되지 않아 알도르의 머리 위로 무수한 물음표가 떠돌아다녔다.
그 물음표를 두 눈으로 직접 보기라도 한 듯 페르데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 바쁜가?”
“네. 바쁩니다.”
빈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관리 기사,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에게 맡기고 지휘만 하면 좋을 텐데, 구태여 직접 나서는 아델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물론 그런 아델을 원망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오히려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저런.”
페르데스가 몹시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자네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바쁘다니. 큰일이군.”
“호위할 기사가 필요하신 거라면, 따로 붙여 드리겠습니다.”
“그건 안 돼. 단순한 호위가 아니라 좀 더 험한 일이거든.”
호위가 아니라 험한 일이라고?
의미심장한 말에 알도르는 페르데스를 빤히 쳐다봤다.
페르데스의 말이 이어졌다.
“게다가 아주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하는 일인지라, 입이 무겁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그 말씀은 저를 믿으신다는 겁니까?”
“아니.”
제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해 놓고, 믿지 않는다니.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말에 알도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페르데스는 입술 끝을 매끄럽게 끌어 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자네 자체는 믿지 않지만, 아델과 관련된 자네는 믿어.”
“…….”
“자네는 아델에게 절대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니까.”
아델. 아델. 아델.
알도르는 자신은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고귀한 이름을 거침없이 말하는 페르데스가 부러우면서도 질투가 났다.
……듣고 싶지 않기도 했고.
마음 같아선 귀를 틀어막고 돌아서고 싶었으나, 그 이름과 함께 뱉은 말이 상당히 의미심장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알도르는 턱에 힘을 바짝 주며 되물었다.
“그 말씀은…… 제게 하려는 부탁이 아가씨와 관련이 있다는 겁니까?”
“그래. 아주 깊은 연관이 있지.”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아가씨와 연관이 있다는 겁니까?”
페르데스가 얇게 펴진 입술 위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건 비밀.”
“…….”
알도르는 순간 욱해서 지금 장난하는 거냐고 물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억누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아주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하는 일인지라 아직은 말해 줄 수 없어.”
“…….”
“자네가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그때 말해 주지.”
칼만 안 들었지, 거의 날강도나 다름없는 조건에 알도르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데도 무시하지 못하는 건 ‘아델’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정말로 아가씨와 관련된 일이 맞습니까?”
알도르가 미심쩍다는 듯 묻자, 이번엔 페르데스가 낮게 조소하며 팔짱을 꼈다.
“재미있는 걸 묻네.”
웃음기를 띤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델의 이름을 걸고, 거짓말을 할 것처럼 보여?”
그렇다고 강하게 주장한 것도, 뚜렷한 증거를 보여 준 것도 아닌데 그 무엇보다 신뢰가 가는 건 페르데스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아델을 보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그래서 알도르는 그의 말에 쉽게 수긍하면서도, 이런 상황이 싫어서 조가비처럼 입술을 꾹 다물었다.
페르데스는 마치 알도르의 대답을 들은 양 다시 물었다.
“날 도와줄 건가?”
확신이 담긴 질문이었다.
알도르는 그런 페르데스가 재수가 없어서 보란 듯이 거절하고 싶었지만.
“……물론입니다.”
아델, 그 이름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른 아침.
“알도르 경이 페르데스 님과 함께 외출했다고?”
외출 준비를 하던 와중 뜻밖의 소식을 듣고 되묻자, 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오늘은 다른 기사님이 아가씨를 호위하게 됐다며, 아가씨께 부디 양해를 구한다고 페르데스 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어요.”
“그래?”
계속 알도르 경에게 호위를 받다 보니 그가 편하긴 하지만, 다른 호위가 붙어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약간 의아한 건, 페르데스가 무슨 연유로 알도르 경을 데리고 갔는가, 였다.
단순히 호위를 맡기려는 건 아닌 것 같고.
개인적인 부탁인가?
페르데스가 알도르 경에게?
“그럴 리가.”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쁘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페르데스가 알도르 경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럼 뭐지?”
혹시 그동안 계속 자리를 비웠던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화산 폭발이 일어난 뒤, 지난 사흘 동안 페르데스는 몸이 안 좋다며 계속 침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처음에는 정말 몸이 안 좋은 줄 알고 걱정했는데, 알고 봤더니 아니었다.
그는 몰래 저택을 빠져나가기 위해 아픈 척 연기를 했던 거였다.
생각해 보면 화산 폭발이 일어난 날, 몇 시간 동안 사라졌던 것에 대해 묻자, 그는 일이 있었다며 대충 얼버무렸었다.
그러니 내게 이렇다 할 설명도 하지 않고 느닷없이 알도르 경을 데리고 간 것도 그것과 관련된 게 분명했다.
“돌아오면 물어봐야겠네.”
지금까지는 다른 일로 바쁜 데다가 그를 믿었기에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페르데스를 믿지 않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그를 믿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궁금해서 물어봐야겠다.
“하네스, 페르데스 님이 돌아오시는 대로 내게 알려 줘.”
“네, 아가씨. 다녀오십시오.”
“다녀오십시오, 아가씨.”
사용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나선 나는 마차에 올라타기 전 공작저를 돌아봤다.
몇백 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어 전반적으로 오래되긴 했지만, 부서지거나 벽에 금이 간 곳은 없었다.
그래. 단 한 곳도 부서지지 않았지.
영지민들의 터전은 화산 폭발 때문에 일어난 지진으로 엉망진창이 됐는데.
광산을 제외하고 화산에서 가장 가까운 레오폴드 공작저는 이리도 멀쩡하다니.
“……역시 나만 거부하는 건가.”
“네? 방금 무슨 말씀하셨습니까, 각하?”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언뜻 들은 건지 마차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던 호위 기사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뒤, 마차에 올라탔다.
* * *
화산 폭발이 일어난 지 어언 나흘째.
영지 상황은 처음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황폐했다.
“전부 재건하는 데, 얼마나 걸리지?”
“아무리 빨라도 1년은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뼈대까지 무너진 곳은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있고요.”
“최대한 서둘러라. 그리고 그동안 영지민들이 살 집도 따로 마련해야 할 텐데.”
지금은 잠깐 대피소에서 지내고 있지만, 말 그대로 임시방편인지라 1년 내내 그곳에서 지낼 수는 없었다.
“그 부분이라면 외성에 있는 빈집을 이용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건 곤란해.”
외성은 내성보다 치안이 나쁜 데다가, 내성에 살던 영지민들에게 잠깐이라고 해도 외성에서 살라고 하면 필시 반발이 일어날 터.
“내성에는 영지민들이 지낼 만한 거처가 없나?”
내 질문에 관리가 몹시 곤란하다는 듯 대답했다.
“지금 알아보고 있습니다만, 그 많은 사람들을 전부 살 만한 곳은 구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면 어떡한다.”
“각하. 제가 다른 방안을 생각해 봤는데…….”
관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현장을 돌아보고 있는데, 문득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공작인 내가 하루도 빠짐없이 현장을 돌아보고 있으니, 사람들은 신기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존경이나 감격의 눈빛을 보내는 사람도 굉장히 많았고.
그러니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건 익숙했지만, 오늘따라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건 그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기 때문이다.
원망과 불신이 담긴 시선이 날카롭게 등에 꽂혔다.
혹 내가 잘못 느낀 건가 싶어 시선이 느껴지는 쪽을 쳐다봤다.
“……!”
“쉬잇.”
그러자 사람들은 무언가를 훔치다가 들킨 사람처럼 흠칫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불과 어제만 해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이던 그들이었는데, 지금은 하나같이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슬그머니 뒤꽁무니를 빼며 도망치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뭐지?
불과 하루 만에 손바닥 뒤집듯이 달라진 사람들의 태도가 당황스러웠다.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
그게 아니고서야 사람들이 이러는 까닭이 이해가 되지 않아 묻자, 관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난감하다는 듯 시선만 주고받았다.
역시 뭔가 있구나.
“무슨 일이지?”
“…….”
“왜 말이 없지? 다들 귀라도 먹은 건가?”
어서 말하라며 다그치자, 총대를 멘 관리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것이…… 영지민들 사이에서 화산이 폭발한 이유가 선대 공작 각하께서 정식으로 인정한 후계자가 아닌 각하께서 공작위를 승계해 레드 드래곤이 분노한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