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갑작스러운 이변에 당황한 기사들은 뭘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사람들과 함께 도망치는 기사들도 몇몇 있었다.
“지금 당장 사람들을 대피소로 안내해라! 공작 각하의 명령이다!”
알도르가 그런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데 집중했다.
아델도 단순히 명령을 내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사들과 같이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데 집중했다.
매캐한 연기와 시커먼 화산재가 하늘을 뒤덮고, 땅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지진을 견디지 못한 건물이 무너져 내리면서 도망치다가 돌무더기에 깔리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도와주세요! 제발, 제발 누가 도와주세요!”
돌무더기에 아이가 깔린 엄마가 눈물 젖은 얼굴로 애타게 소리쳤지만, 다들 도망치는데 급급하다 보니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깊은 절망에 빠진 여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있었으니.
“가, 각하!”
바로 아델이었다.
아델이 장정 서너 명은 붙어야 겨우 들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돌을 가뿐하게 들어 옮기자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델은 그런 여자의 품에 정신을 잃은 아이를 안겨 주고, 그녀의 도움이 필요한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났다.
* * *
“노약자와 어린아이를 우선 대피시키도록!”
페르데스 역시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다치는 등 몸이 불편한 사람을 발견하면 직접 업고 달렸다.
“몸이 멀쩡한 사람들은 부상자들을 운반하는 걸 도와줘!”
페르데스가 입으로만 명령을 내리는 게 아니라 솔선수범해서 보여 주니, 그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차와 수레를 동원하면 부상자를 쉽게 옮길 수 있겠지만, 땅이 흔들리는 바람에 사용할 수가 없었다.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튼튼한 사람의 두 다리뿐.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마그마가 터져 나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간간이 작은 불덩이가 튀긴 했지만, 용암이 지면으로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그 사실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페르데스는 아니었다.
‘이상해,’
그의 상식대로라면 이미 용암 폭발이 일어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한데 폭발이 일어나긴커녕 연기만 나오는 데다가, 자세히 보면 지진도 화산에서 멀리 떨어진 광장 부근에서만 일어났다.
저 화산이 폭발한 이유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닌, 레드 드래곤의 분노 때문이라서 그런 건가?
“그럼 더 말이 안 되지.”
만약 레드 드래곤이 어떤 이유에서 분노한 거라면 더욱 인정사정없이 용암을 분출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 페르데스는 화산 쪽을 쳐다봤다.
그런 그의 시야에 낯익은 일굴이 들어왔다.
“저 남자는…… 3황자의 시종이잖아.”
한 번 본 얼굴은 절대 잊지 않는 뛰어난 기억력 덕분에 페르데스는 상대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봤다.
물론 3황자, 이안이 후작가의 영애와 결혼해 황궁을 나가면서 저 남자 역시 시종직을 내려놓았기에 더 이상 시종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 남자가 이안과 밀접한 친분이 있다는 건 변함없었다.
레오폴드 공작저를 방문한 귀족들의 명단에 저 남자의 이름이 있었던가?
‘없었어.’
그런데 저 남자가 이곳에 있다는 것도 수상쩍었지만, 더 의심스러운 건 남자가 다급하게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거였다.
화산이 폭발했으니 도망치는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 방향은 화산 쪽인데.”
정신이 나간 게 아니고서야 화산이 폭발했는데 화산 쪽으로 달려갈 리가 없었다.
‘뭔가 있다.’
어쩌면 화산이 갑자기 폭발한 이유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페르데스는 조용히 남자의 뒤를 쫓아갔다.
* * *
“지금…… 뭐라고 했지?”
정신없이 사람들을 구하던 와중, 들려온 소식에 나는 기함하며 되물었다.
“페르데스 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내게 소식을 알려 준 기사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온 기사들도 침울한 얼굴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저희와 함께 계셨는데,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너희들 중 페르데스 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가?”
“죄송합니다. 다들 정신이 없었던 터라…….”
허, 이 많은 기사들 중에서 페르데스가 사라지는 것을 본 사람이 한 명도 없다니.
황당했지만, 그만큼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으니 이해는 됐다.
그래. 머리는 이해가 됐지만, 마음은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 페르데스가 잘못됐으면 어쩌나 걱정되기도 했고.
알도르 경도 뒤늦게 사태 파악을 하고 재빨리 말했다.
“지금 당장 기사들을 풀어 페르데스 님을 찾아보겠습니다.”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마음 같아선 그러라고 하고 싶었으나, 페르데스를 찾는 데 기사들을 투입한다면 사람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킬 인력이 부족해졌다.
“일단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움직이되, 부가적으로 페르데스 님을 찾는 쪽으로 하죠.”
“네, 각하.”
저마다 역할을 맡은 기사들이 흩어지고, 나 역시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데 집중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혹시 페르데스가 근처에 있는 건 아닐까, 자꾸 주변으로 눈이 돌아갔다.
그와 체격이 비슷한 사람만 봐도 움찔하며, 그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페르데스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예요.
무사한 건 맞죠?
설마, 설마 잘못된 건 아니죠?
발끝부터 엄습한 불안감이 서서히 기어 올라와 목을 졸랐다.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입 안이 바짝 마르면서 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직은 너무 많으니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세상을 뒤흔들 것 같은 지진이 잦아들고, 굉음도 사라졌다.
분출구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던 새카만 연기도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용암까지 분출했다면 그야말로 지옥의 아수라장이 됐을 텐데, 다행이었다.
나는 안도하는 것과 동시에 잠시 내려놓았던 다른 걱정을 끌어안으며 근처에 있는 기사에게 황급히 물었다.
“페르데스 님을 찾은 건가?”
“네? 아, 아니요. 찾지 못했습니다만…… 페르데스 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신 겁니까?”
페르데스가 사라진 소식을 모르는 기사가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일일이 설명해 줄 시간도, 여력도 없는 터라 나는 기사를 지나쳐 내게 페르데스가 사라진 사실을 보고했던 기사를 찾았다.
“페르데스 님을 찾았나?”
막 부상자를 내려놓은 기사가 침울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각하.”
찾지 못했다는 거구나.
순간 딛고 있던 땅이 무너지는 듯한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목을 조이던 불길한 기운이 전신을 뒤덮으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찾아야 해.
그를 찾아야만 했다.
서둘러 대피소를 나가려는데, 알도르 경이 내 팔을 잡았다.
“각하! 아직 밖은 위험하니 나가시면 안 됩니다!”
“……놔.”
“각하!”
“페르데스 님이라면 저와 기사들이 나가서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니……!”
“놓으라고 했다!”
“안 됩니다.”
평소에는 이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말을 들어주던 그였는데 이번만큼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얼른 페르데스를 찾으러 가야 하는데, 고집을 피우는 그가 원망스럽고 답답했다.
놓으라고 실랑이를 하는 시간조차 아까워서 뿌리치고 가려는데, 누군가 마른기침을 하며 대피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콜록. 해가 없어서 그런지 조금 춥네. 콜록, 콜록.”
바로 페르데스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단걸음에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어, 어?”
그러자 당황한 듯 페르데스가 몸을 딱딱하게 굳히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벌어진 거리를 다시 좁히며 그의 품에 머리를 묻었다.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는 그가 무사하다는 걸 다시 일깨워 주었다.
“하아,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정말로, 정말로 다행이에요…….”
깊은 한숨에 안도감을 섞으며 중얼거리자 굳어 있던 몸이 풀렸다.
페르데스가 픽, 웃으며 흐트러진 내 머리를 쓸어내렸다.
“많이 걱정했나 보네.”
“…….”
“말도 없이 사라져서 미안.”
“……아시면 됐어요.”
볼멘소리로 대답하자 웃음소리가 좀 더 짙어졌다.
페르데스는 재차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나를 꼭 안아 주었다.
* * *
갑작스러운 재앙으로 취임식을 마무리하지 못한 건 물론 레오폴드 공작령도 큰 피해를 입었다.
생각보다 인명 피해가 크진 않았지만, 없는 것도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가족을, 친구를 잃고 슬픔에 잠겼다.
지진으로 집과 일자리를 잃은 사람도 속출했으며, 화산재로 인해 작물들도 엉망진창이 됐다.
집을 복구할 때까지 대피소에서 머물게 된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그날 겪은 일에 대해 떠들었다.
“정말이지 끔찍했어. 굉음과 함께 하늘이 새카매졌을 땐,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다니까.”
“맞아, 맞아. 용암까지 터졌으면 정말 죽었을 거야.”
“나도 같은 생각이야. 어휴,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끔찍해.”
“그런데 갑자기 왜 화산이 터진 거지?”
누군가 의문을 툭, 던졌다.
“여기 화산은 다른 화산들과 달리 레드 드래곤이 잠든 화산이잖아. 그러니 드래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이상 안전하다고 들었는데.”
“맞아. 나도 할아버지한테 그 이야기 들었어.”
“그 말은 누가 레드 드래곤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건가?”
도대체 누가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했단 말인가.
저마다 알고 있는 것들을 털어놓고 토론하다 보니 한 가지 결론이 나왔다.
레드 드래곤의 심기를 건드린 사람은 다름 아닌 아델 레오폴드라는 결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