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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화 (167/262)

173화

레오폴드 공작령은 다른 영지들과 달리 영지민들이 즐길 만한 축제가 없었다.

내세울 만한 특산물이라곤 퓨라밖에 없는데 그걸 가지고 축제를 할 수 없을뿐더러.

축제를 연다고 해도 제국의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이곳까지 올 사람은 없었다.

하여 선대 레오폴드 공작들은 축제를 여는 대신 취임식같이 큰 행사가 있으면, 영지민들도 같이 즐기기 위해 넓은 광장에서 행사를 진행했다.

오늘이 바로 그날로, 평소에도 북적거리던 광장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빼곡했다.

“그쪽으로 가면 안 됩니다!”

“모두 조용히 해 주세요!”

그런 사람들을 통솔해야 하는 관리와 기사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간만의 행사로 들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진정시키고 있는데,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양쪽으로 갈라섰다.

기사들은 자신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이자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찼다.

그것도 잠시. 

갈기가 풍성한 백마를 타고 광장으로 들어오는 아델을 보고 사람들의 반응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아델은 위엄이 넘치고 위풍당당했다. 

감히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걸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동시에 화사하게 피어난 장미처럼 아름다워서, 기사들은 물론이고 기사단 취임식을 구경 온 사람들도 하나같이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봤다.

* * *

예상했던 것보다 사람들이 많이 왔네.

약간 과장을 보태서 레오폴드 공작령에 사는 모든 주민들이 온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앞에 나서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도, 마치 처음인 것처럼 긴장되고 떨렸다.

작위 승계식을 할 때도 이렇게 떨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곳에서 실수하면 사람들에게 평생 못난 공작으로 각인될 테니 긴장됐다.

부디 실수하지 말아야 할 텐데.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하는데, 누군가 내 손을 슬며시 감싸 쥐었다.

“괜찮아.”

페르데스였다.

슬쩍 내 등 뒤에 붙은 페르데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라면 잘할 수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다정한 말투와 내 허물을 모두 감싸 줄 것 같은 커다랗고 따뜻한 손 덕분에 마냥 불안했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덕분에 나는 크게 떨지 않고, 일정을 진행할 수 있었다.

날씨도 나를 도와주려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햇살도 적당하게 따사로웠다.

알도르 경과의 검술 대련까지 무사히 끝마친 나는 임시로 만든 휴식처에서 땀을 닦아 내며 호흡을 골랐다.

“마셔.”

어느덧 다가온 페르데스가 물병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안 그래도 목이 마르던 차라 바로 물을 마셨다. 시원한 물을 마시니 갈증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제 사람들 앞에서 앞으로의 포부를 밝히고, 기사단장이 됐다고 선언만 하면 끝나는 건가?”

“네.”

만약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대신 선언을 해 줬겠지만, 돌아가셨으니 내가 직접 선언해야 했다.

……아니,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애초에 난 이 자리에 서지 못했겠지.

아버지에게 특별한 사정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씁쓸했다.

쓴웃음을 물병 뒤에 감추며, 마른 목을 축이는데 마티나 백작과 귀족들이 날 찾아왔다.

페르데스는 눈치껏 자리를 비켜 주었다.

“정말 멋진 대련이었습니다, 공작 각하.”

마티나 백작이 웃으며 말했다.

“각하의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맞습니다. 제 딸이 각하께서 검을 휘두르시는 모습을 보고, 저 역시 검을 휘두르고 싶다며 호들갑을 떠는 걸 말리느라 어찌나 진땀을 뺐는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하, 이것 참. 당분간 제국에 여기사 열풍이 불겠군요.”

그를 따라온 귀족들도 맞장구를 치며 앞다투어 내 칭찬을 늘어놓았다.

전부 내게 잘 보이기 위한 입바른 소리라는 걸 알기에 이렇다 할 감흥은 없었다.

“좋게 봐줘서 고맙습니다.”

그나마 마티나 백작은 날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몇 안 되는 귀족이니 그의 칭찬은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러고 보니 마티나 백작은 아버지와 어렸을 때부터 친분이 있었지.

그럼 아버지와 조부가 같이 있는 모습을 단 한 번이라도 보지 않았을까?

만약 마티나 백작이 그 모습을 봤다면, 조부와 아버지는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가 되니 물어봤다.

“마티나 백작. 혹 내 아버지와 조부께서 같이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네. 본 적이 있습니다.”

본 적이 있다고?

하네스와 다른 대답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당장 기억나는 건 선대 공작 각하께서 기사 아카데미에 들어가시기 전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본 적이 없습니까?”

“글쎄요…….”

마티나 백작은 기억을 되짚는 듯 턱을 쓰다듬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이후에는 두 분이 같이 계시는 모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역시 아버지와 조부가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건 내 억측이었던 걸까?

성인이 된 아버지와 조부께서 같이 계신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봤다고 하니 의심이 조금은 풀렸다.

마티나 백작은 주변을 쓱 훑어보더니 나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3황자 전하께서 공작령에 오지 않으셨습니까?”

“네. 안 오셨는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죠?”

“그것이 사흘 전에, 마티나 기차역에 3황자 전하가 계신 걸 제 보좌관이 봤다고 해서요.”

3황자가…… 마티나 기차역에?

“당연히 공작 각하의 기사단장 취임식에 참석하는 줄 알았는데, 제가 착각한 모양입니다. 하하.”

마티나 백작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넘겼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안이 마티나 기차역에 있었다는 것도 의심스러웠지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사흘 전이라면, 아비게일 부인이 레오폴드 공작령을 떠나 마티나 영지에 도착했을 시간이라는 거였다.

역시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각하. 이만 나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알았다.”

고민도 잠시, 관리의 보고에 나는 흐트러진 옷맵시를 다듬은 뒤, 광장의 중앙에 있는 드래곤 동상 앞에 섰다.

이 땅을 수호하는 레드 드래곤을 본떠서 만든 동상으로,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검을 빼 들었다.

두근두근-

그러자 마치 심장을 움켜쥐기라도 한 듯 검이 손안에서 요동쳤다.

이건 뭐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 기묘하면서도 꺼림칙했다.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고나 할까.

“왜 그러십니까, 공작 각하.”

내가 검을 움켜쥔 채, 가만히 서 있자 바로 뒤에 서 있던 알도르 경이 물었다.

“알도르 경, 검이…….”

검이 이상하다고 말하려는 그때.

콰쾅-

벼락이라도 내려친 것처럼 커다란 굉음이 광장을 가득 채웠다.

나는 깜짝 놀라며 굉음이 들리는 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맑았던 하늘을 뒤덮은 새카만 연기가 보였다.

연기의 근원지는 바로 레오폴드 공작저의 뒤에 있는 화산이었다.

“화, 화산이 폭발한다!”

누군가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거세게 소리쳤다. 

반쯤 넋을 놓고 연기를 내뿜는 화산 쪽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 얼른 도망쳐!”

“으아악! 사람 살려!”

귀족들 역시 체면 따위는 바닥에 던져 버리고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서로를 밀치며 달려 나가는 모습이 흡사 아수라장 같았다.

콰쾅, 쾅!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화산 주변으로 새빨간 불꽃이 튀자 사람들의 비명이 더욱 커졌다.

몇 발자국 떨어져 있던 알도르 경이 황급히 다가와 내 팔을 잡았다.

“당장 도망가셔야 합니다, 각하!”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알도르 경을 돌아봤다가 다시 화산을 쳐다봤다.

레오폴드 공작가의 역사서에 따르면 저 화산에는 레드 드래곤이 잠들어 있다고 했다.

레드 드래곤은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이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한 계속 잠들어 있을 것이며, 화산이 폭발할 일도 없을 거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화산이 지금 폭발했다는 건…… 내가 레드 드래곤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건가?

혹시 레드 드래곤은 내가 기사단장이 되는 게, 레오폴드 공작이 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걸까?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쾅!

또 한 번 귀를 강타하는 강한 굉음의 충격으로 흐려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 살려 주세요!”

“비켜, 비키라고!”

“엄마, 엄마! 어디 있어!”

사방에서 들리는 비명과 절규가 남은 이성까지 전부 깨웠다.

정말로 내가 레드 드래곤의 심기를 건드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알도르 경. 기사들에게 영지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라고 전해 주세요.”

화산 폭발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

“각하부터 대피하셔야……!”

“아니요. 나보단 영지민들을 대피시키는 게 우선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레오폴드 공작이었고, 레오폴드 공작령의 영주였다.

영지민들을 보호하고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영주.

그들보다 먼저 도망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지의 남쪽으로 가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만들어 둔 대피소가 있어요. 그곳으로 가면 안전할 겁니다.”

“하지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영지민들의 안전부터 챙겨 주세요.”

내가 고집스럽게 말하자, 알도르 경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신 알도르, 주군의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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