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결혼하지 말라니.
설마 나보고 평생 혼자 살라는 의미는 아닐 테고, 페르데스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이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던 터라 조금 놀라며 알도르 경을 쳐다봤다.
그 역시 놀란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스스스-
노을이 물든 바람이 무성한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정적이 내려앉은 정원에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알도르 경은 마침내 굳은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전…… 아가씨께서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까부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의 연속이었다.
“그 말은 제가 페르데스 님과 결혼하면 불행해진다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무슨 의미인가요?”
알도르 경은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듯 잠시 침묵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는…… 좋은 사람이랑 결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소 고리타분하게 들리긴 했지만, 정석이었다.
나 역시 한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부모님처럼 알콩달콩 사는 게 꿈이기도 했고.
그래서 첫 번째 생에서 체르노서를 선택한 거였고.
그렇다고 체르노서를 사랑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당시 내겐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는데, 체르노서가 날 사랑한다며 적극적으로 구애하니 받아 준 것뿐이었다.
황제의 철저한 계획에서 나온 가식이라는 걸 꿈에도 모른 채.
그 결과는 몸소 경험했던 것처럼 끔찍한 지옥이었지.
새삼 바보 같았던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라 작게 조소했다.
그러자 알도르 경이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페르데스 님과 결혼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요. 지금 당장은 할 생각이 없어요.”
“그럼 나중에는 하실 마음이 있다는 거군요.”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건가.
“꼭 그렇다는 건 아니에요. 그저 아이를 가지기 위해선 언젠가 결혼하게 될 텐데, 그 상대가 페르데스 님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뿐이죠.”
그래. 페르데스보다 더 완벽한 조건을 가진 남자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그를 선택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물론 페르데스의 마음이 그때까지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성립되는 이야기였다.
나와 결혼하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 둘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한순간 알도르 경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며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페르데스 님은 아가씨께서 그토록 싫어하는 황제의 아들인데, 그분과 결혼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참.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상기한 나는 발끝으로 땅을 툭툭, 걷어찼다.
예전에는 페르데스의 금색 눈동자만 봐도 황제가 떠올랐는데, 언제부터인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내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황제의 아들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결혼하는 걸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한데 그 사실을 새삼 자각하니 그와 결혼하는 게 조금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물론 페르데스가 잘못한 게 없을뿐더러, 되레 황제에게 복수하는 걸 도와줬으니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멀리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역시 황제의 아들이라는 건 마음에 걸리는데…….
“끄응, 어렵네.”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볼을 긁적였다.
고민을 해결하려고 알도르 경에게 털어놓은 건데, 되레 고민이 더 쌓이는 기분이었다.
“고민되시는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그렇죠. 페르데스 님 말고 남편감으로 달리 좋은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렇습니까.”
알도르 경의 목소리가 밟으면 바스러지는 낙엽처럼 부서졌다.
그의 안색도 어두워진 것 같았고.
보아하니 내 걱정을 하는 것 같은데. 하여간 걱정이 많아서 탈이었다.
그만큼 날 생각해 준다는 거니 기분이 좋기도 했고.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해 봤자 그만둘 리가 없으니, 차라리 화제를 전환하기로 했다.
“그런데 알도르 경이 결혼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사랑이라니. 조금 의외네요.”
약간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도 띄우고자 평소보다 밝게 말했다.
“그래서 여태 결혼을 안 한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
그런데 오히려 역효과였는지, 알도르 경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어두워졌다.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을 건드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사과를 해야겠지?
“아델.”
그러려는데,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막 훈련장에 들어서는 페르데스가 보였다.
알도르 경도 그를 발견하고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나 페르데스는 알도르 경 쪽으론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오로지 나만 바라보며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아비게일 부인이 그대를 찾고 있어.”
“부인이 저를요? 무슨 일이죠?”
“글쎄. 자세한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얼핏 듣기로 드레스 치수 때문이라고 하던데.”
치수라면 오전에 전부 다 쟀는데,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바쁜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가 보는 게 어때? 그 여자가 그대를 찾는답시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거든.”
“그럴게요.”
나 역시 아비게일 부인이 내 저택을 기웃거리는 게 싫을뿐더러, 이것 때문에 레오폴드 공작령에 며칠 더 머문다고 하면 골치가 아프니 얼른 해치우는 게 맞았다.
“그럼 가자.”
페르데스가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이끌었다.
나는 곧바로 페르데스를 따라가려다 알도르 경을 돌아봤다.
보통 때라면 바로 뒤따라왔을 텐데, 어째서인지 그는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왜 그래요, 알도르 경?”
의아해서 물어보자 그는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전 이곳의 뒷정리를 하고 가겠습니다.”
“음, 그래요.”
굳이 뒷정리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왠지 혼자 있고 싶다는 말처럼 들려서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 * *
아델과 페르데스가 함께 떠난 뒤.
혼자 남은 알도르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꾹 깨물며 바닥을 내려다봤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건 다정하게 떠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계속 보고 있다간 차오르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속에 담아 두고 있던 것들을 전부 쏟아 낼까 봐 두려워서 그런 것도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먹먹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나니, 그 자리를 시기와 질투, 그리고 부러운 감정이 가득 채웠다.
전부 페르데스를 향한 감정이었다.
아델을 향한 마음을 조금도 표현하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는 자신과 달리 거침없이 제 마음을 표현하는 페르데스가 부럽고 질투가 나면서 원망스러웠다.
페르데스가 없었다면 아델은 자신을 선택했을 테니까.
……그때처럼.
“바보 같은 생각을.”
그때처럼 된다는 건 같이 죽자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그걸 잘 알면서도 이런 생각을 한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알도르는 작게 조소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금처럼만 하면 돼.”
지금처럼 괜한 욕심을 내지 않고, 아델의 뒤에 묵묵히 서 있는 것만이 그녀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건 잘 알고 있지만, 슬슬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페르데스가 아델에게 거침없이 제 마음을 표현하는 걸 볼 때마다 누군가 날카로운 검으로 가슴을 난도질하는 것처럼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근래 사방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결혼 축하 인사는 이미 갈기갈기 찢긴 그의 가슴을 다시 난도질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지내는 기분이랄까.
이 시한폭탄이 터졌을 때, 자신이 다치는 건 상관이 없었다.
문제는 아델이었다. 그녀가 다칠까 봐 무서웠다.
겉보기엔 강해 보여도 속은 그 누구보다 여린 사람이었으니까.
동정심 때문에 자신을 보듬어 주려다 그때처럼 또 잘못될까 봐 너무 두려웠다.
* * *
온갖 같잖은 이유를 대며 공작저에 더 눌러앉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아비게일 부인과 일행은 약속한 날 바로 떠났다.
정말로 옷 때문에 온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의심스러웠지만 증거가 없으니, 그냥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기사단장 취임식 날, 아침이 밝았다.
이른 아침부터 창밖에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건, 기사단장 취임식을 구경하러 온 귀족들 때문이었다.
대부분 레오폴드 공작가와 깊은 인연이 있는 북쪽령의 귀족들로, 취임식을 핑계로 내게 얼굴도장을 한 번 더 찍으려고 하는 거였다.
“이건 어디 둘까요, 집사님?”
“책이구나. 일단 창고에 넣어 두고 나중에 분류해서…….”
“이건 목걸이인데 보석함 넣어 둘까요?”
“어머나, 검도 있네요.”
그만큼 들어오는 선물도 많아서, 본관 홀은 귀족들이 가지고 온 선물을 분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중앙 계단의 난간 앞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침실로 돌아갔다.
침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메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와 내 옷맵시를 다듬었다.
“어라. 아직 검을 차지 않으셨네요, 아가씨.”
“오늘은 아가씨가 아니라 공작 각하.”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라는 호칭이 입에 붙어서 그만…….”
“괜찮아. 사람들 앞에서만 조심하면 돼.”
나는 아가씨라고 불러도 상관없지만, 꼬장꼬장한 귀족들은 입을 댈 테니 조심해야 했다.
나는 미리 챙겨 둔 검을 허리춤에 차려다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칼날이 무딘 장식용 검들이 걸려 있었는데, 그중 단 하나. 진짜 검이 있었다.
바로 지하실에서 가지고 온 검이었다.
만약 저 검이 레오폴드 공작들만 쓰는 특별한 검이라면, 취임식 때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게 맞지 않을까.
오늘 참가한 귀족들 중에는 아버지의 취임식을 본 귀족도 있을 테니 그게 맞는 것 같아, 나는 그 검을 허리춤에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