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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화 (165/262)

171화

달갑지 않은 손님들이 레오폴드 공작저를 방문한 건 4월의 첫 번째 해가 떴을 때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 각하.”

50대 중반의 여자가 허리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했다.

“카리나 아비게일라고 합니다. 편하게 아비게일 부인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카리나 아비게일.

황족들의 의복을 전담하는 디자이너인 그녀가 직접 레오폴드 공작령까지 온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나와 4황자 전하의 결혼 예복을 맞추라고 명령을 하신 건가?”

“그렇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하긴 전에 타협했던 결혼 날짜가 5월이었으니, 슬슬 준비하는 게 맞긴 했다.

“그런 거라면 번거롭게 부인을 레오폴드 공작령으로 보낼 것이 아니라 나와 황자 전하를 황궁으로 불러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전혀 번거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 분의 결혼식을 담당하게 되어 영광스러운 마음뿐입니다.”

아비게일 부인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선 이제 막 작위를 승계받아 바쁘실 공작 각하를 배려하셔서 저를 보내신 거랍니다.”

배려는 무슨.

혹 내가 온갖 핑계를 대며 결혼식 준비를 늦출까 봐 걱정돼서 먼저 선수를 친 거겠지.

그 외에도 황제가 굳이 그녀를 레오폴드 공작령까지 보낸 이유는 몇 가지 더 있을 것이다.

가령 나와 페르데스를 감시하기 위해서라든가.

……아니면 지하실을 염탐하기 위해서라든가.

황제가 제 아들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얻고 싶어 했던 ‘무언가’를 얻기 위해 아비게일 부인을 보냈을 가능성이 컸다.

어느 쪽이든 간에 내 입장에선 거북했다.

그러니 내쫓고 싶었으나, 황제의 명령을 받고 온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마구잡이로 내쫓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괜히 내쫓았다가 황제가 역시 뭔가 있다고 생각해서 내 주변을 파헤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차라리 붙잡고 있는 게 나았다.

혹 정말로 지하실을 염탐하기 위해서 온 거라면, 아비게일 부인이나 그녀가 데리고 온 궁인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 테니 잘하면 ‘무언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몰라.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나는 웃으며 아비게일 부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나와 황자 전하를 위해 이 먼 곳까지 왔으니 부디 편하게 지내다 가게.”

* * *

“도청 마법진을 만들어 줄 수 있냐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데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괜히 주변을 쓱 훑어보고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비게일 부인을 감시하려고 그러는 거야?”

“그렇긴 한데, 제가 궁극적으로 감시하려는 건 공작저의 지하실에 몰래 들어온 사람이에요.”

“요컨대 체르노서처럼 말이지?”

역시 하나를 말하면 둘을 깨우친다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데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전에 그대가 준 마법 펜이 있어서 만들어 줄 수 있긴 한데, 그걸 어디에다가 그리려고? 설마 지하실의 문에 그릴 생각은 아니지?”

“안 되나요?”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것만으론 누가 안에 들어가는지 알아내기 힘들 것 같은데. 지나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

“지하실 통로에 그리는 건 어때? 전에 보니까 긴 복도 같은 게 있던데 그곳에 그리면 체르노서처럼 몰래 침입한 사람만 잡아낼 수 있을 거야.”

그건 그렇지만, 문제는 그러려면 페르데스가 지하실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거였다.

레오폴드 공작저의 지하실은 혈족과 공작의 허락을 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신성한 장소.

정식으로 공작이 됐으니 내가 허락한다면 페르데스도 지하실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내키지 않았다.

혹 위험한 일이라도 생긴다면, 체르노서처럼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면 어떡하지?

걱정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면서 불안한 마음이 샘솟았다.

“그냥 지하실 문을 활짝 열고 안쪽에 그려 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렇게 하면 페르데스가 걱정하는 부분과 내가 걱정하는 부분이 동시에 해결됐다.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 만족하는 나와 달리 페르데스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 * *

지하실 문 안쪽에 도청 마법진을 그려 두고, 그 마법진과 연결된 반지를 항상 손가락에 끼고 다녔다.

목욕할 때도, 심지어 검술 훈련을 할 때도 빼지 않았으나 그런 내 노력이 무색하게 아비게일 부인은 지하실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수상쩍은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묵묵히 제 할 일만 했고, 그건 그녀가 데리고 온 다른 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황제가 보냈다는 것만 제외하면 눈에 거슬리는 게 없을 정도로 조용히 지냈지만, 그래도 문제는 발생했다.

“곧 4황자 전하와 결혼하시는군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공작 각하.”

바로 이것이었다.

안 그래도 영지 시찰 때, 소년에게 꽃다발을 받아서 한차례 소동이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결혼 준비를 하니 사방에서 축하한다며 난리였다.

심지어 벌써 결혼 축하 선물을 보내는 귀족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더 곤란하게 만드는 건 축하 인사와 덧붙여 나온 말들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와 페르데스가 잘 어울린다는 말은 기본이었다.

그 외에 황자들 중에서 그를 고른 건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든가. 

페르데스는 좋은 남편이 될 테니 이제 마음을 푹 놓으라는 둥 온갖 칭찬들을 늘어놓았다.

다른 때라면 그러려니 하고 무시했을 텐데, 하필 페르데스에게 고백을 듣고 난 뒤인지라 그럴 수가 없었다.

결혼을 할 거라면 자신을 선택해 달라던 그 말.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는데, 주변에서 그와 결혼하는 게 좋다고 부추기니 절대 그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누군가와는 결혼할 텐데, 그냥 페르데스를 선택할까.

하지만 그건 그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는 건데…….

카캉-

“……!”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손목 전체에 시큰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제야 혼자만의 생각에서 깨어난 나는 알도르 경과 검술 대련 연습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썹을 찡그렸다.

아무리 연습 중이라지만 다른 생각을 하다니.

상대에 대한 매너가 아니었다.

“집중 못 해서 미안해요, 알도르 경.”

“아닙니다. 그보다 오늘 연습은 여기서 그만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가씨.”

“그렇게 해요.”

무리해서 더 해 봤자 집중하지 못할 것 같아 검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알도르 경이 건네준 수건에 땀을 닦아 내고 있는데,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황제가 보낸 사람들이 신경 쓰여서 그러시는 겁니까?”

조금 의미심장한 질문에 대답 대신 쳐다보자 알도르 경이 약간 당황한 듯 말을 덧붙였다.

“아가씨답지 않게 좀처럼 대련에 집중하지 못하시길래 물어본 겁니다.”

그냥 쳐다보기만 했을 뿐인데, 뭐 저리 허둥지둥거리는 건지.

“신경이 쓰이는 건 맞는데, 그들 때문에 집중하지 못한 건 아니에요.”

“그럼 다른 걱정이 있으신 겁니까?”

“걱정까진 아니고, 고민이 조금 있어요.”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고민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하기 조금 민망한데…….”

“괜찮습니다.”

알도르 경은 내 눈높이에 맞춰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전 어떤 이야기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 부디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내가 준비가 안 됐단 말이에요…….

게다가 알도르 경이 너무 진지하게 말하니 더욱 말하기가 부담스러웠다.

“제게 말해 줄 수 없는 고민입니까?”

“그건 아니에요.”

오히려 알도르 경이라서 전부 털어놓고 고민 상담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나와 페르데스의 진짜 관계를 알고 있으니까.

“말하기 전에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말씀하십시오.”

“알도르 경은 페르데스 님을 어떻게 생각해요?”

내 질문이 뜻밖이었는지, 알도르 경은 약간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무슨 의미로 물어보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특별한 의미 같은 건 없어요. 그냥 말 그대로 알도르 경이 평소 페르데스 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서 물어본 것뿐이에요.”

“좋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미리 생각해 둔 사람처럼 즉각 대답하는 게 웃겼다.

“뭐예요, 그게. 말에 영혼이 전혀 안 들어 있잖아요.”

평소 알도르 경과 페르데스의 관계를 생각해 봐도 믿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

“정말로 페르데스 님을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는 거 맞아요?”

“……네.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긴 합니다.”

그 말은 다른 쪽으로도 생각하고 있다는 거네.

아마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간 평가겠지.

어떤 평가인지 궁금했지만, 더 깊게 캐물으면 알도르 경이 곤란할 테니 넘어갔다.

중요한 건, 페르데스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알도르 경 역시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였으니까.

“그럼 내가 페르데스 님과 결혼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요?”

“……!”

깜짝 놀랐는지 순간적으로 알도르 경의 몸이 크게 흔들리더니, 그는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 역시 놀라며 알도르 경의 팔을 잡았다.

“괜찮아요, 알도르 경?”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표정이 안 좋은데요.”

흡사 내일 하늘이 무너진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연습도 끝났겠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알도르 경.”

탁-

그의 팔을 놓고 일어서려는데, 알도르 경이 다시 내 팔을 잡았다.

때문에 나는 엉거주춤 상체를 숙인 상태에서 알도르 경을 내려다봤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애절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결혼……하지 마세요,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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