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0화 (164/262)

170화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소년이 준 꽃다발이 부케처럼 보였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결혼 이야기를 했다.

내가 곧 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것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 중 하나였다.

결혼 이야기가 나오는 것만으로도 곤란한데, 나를 더 곤란하게 만드는 건 페르데스와 잘 어울린다며 추켜세우는 거였다.

그것도 페르데스가 옆에 있을 때 그러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의 눈치가 보이기도 했고.

그렇다고 페르데스가 무슨 말을 한 건 아니었다.

그는 농담 섞인 사람들의 말에도 웃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더 불안해서 계속 그의 눈치를 살피게 됐다.

혹 이상한 오해를 하는 건 아닌지.

아니면 기분이 나쁜 건 아닌지 등등, 페르데스의 반응 하나하나가 너무 신경이 쓰였다.

우여곡절 끝에 영지 시찰은 끝났지만, 내 볼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지 시찰을 하면서 보고 들은 문제점들에 대해 관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토론했다.

다행히도 문제점이 그리 많지 않아 회의가 빨리 끝났다.

마지막으로 회의 기록을 보고 있는데, 관리들이 다 떠난 뒤에도 곁에 남아 있던 알도르 경이 물었다.

“기사단장 취임식은 언제 하시겠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그것도 해야 하네요.”

레오폴드 공작은 공작가의 가주인 것과 동시에 레오폴드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었다.

지금까지는 기사단장 대리였지만, 정식으로 공작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기사단장이 됐으니 취임식을 해야 했다.

물론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게 아닌 일종의 관례였지만, 웬만하면 하는 편이 기사단장의 체면이 살았다.

“3월이 지나기 전에 하는 게 좋겠죠?”

말을 한 뒤에야 3월이 고작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아차 싶어 정정했다.

“3월 안에 하는 건 무리인 것 같으니, 4월 첫 번째 주 금요일에 하는 걸로 하죠. 그래야 기사들도 마음 편히 즐길 테니까요.”

“네. 말씀하신 대로 일정을 잡아 두겠습니다.”

“그래요.”

“그때 검술 대련도 하실 겁니까?”

“아마 해야겠죠.”

기사단장 취임식의 오랜 전통이었으니까.

검술 대련의 상대는 대체로 당시 기사단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기사였다.

그리고 지금 레오폴드 기사단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기사는 바로…….

“검술 대련을 한다면 알도르 경이 제 대련 상대가 되겠네요.”

“그렇게 되겠군요.”

“잘 부탁해요.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해 두는데, 봐줄 생각은 하지 마세요.”

만약 그런 낌새가 보이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고 엄포를 놓자, 알도르 경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아무리 주군이라도 대련만큼은 진심으로 상대할 겁니다.”

“좋은 마음가짐이네요.”

검술 이야기를 하니 몸이 근질근질했다.

지하실에 들어갔다가 손을 다치는 바람에 며칠 동은 검을 잡지 못해서 더욱 하고 싶었다.

“알도르 경, 바쁘지 않다면 오랜만에 검술 대련이나 할까요?”

슬쩍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 오른손에 닿았다.

“이제 다 나았어요. 주치의도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뭐든 해도 된다고 했고요.”

“그럼 검술 훈련은 무리가 되겠군요.”

어라.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건가?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 다 나았어요. 봐요. 아무렇지 않잖아요.”

나는 오른손을 흔들며 괜찮다는 걸 최대한 어필했지만, 알도르 경은 요지부동이었다.

정말이지, 누굴 닮아서 저렇게 고집이 센 건지 모르겠다.

“잘 생각해 봐요, 알도르 경. 다음 주, 기사단장 취임식 때 검술 대련을 할 건데 미리 몸을 풀어 놓지 않으면 기사들에게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 주지 못할 거예요. 그럼 전 놀림거리가 되겠죠.”

놀림거리가 될 거라는 걸 강조했더니 알도르 경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조금만 더하면 넘어오겠네.

나는 속으로는 웃었지만, 겉으로는 무척 우울한 척 연기했다.

“겨우 공작이 됐는데, 기사들에게 놀림거리가 된다면 너무 슬퍼서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것 같아요.”

“……감히 각하를 비웃는 사람들이 있다면 제가 그놈들을 전부 처리하겠습니다.”

어라. 이야기가 이상한 쪽으로 튀는 것 같은데.

알도르 경의 표정이 흉흉하게 구겨지자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 그렇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준비를 철저하게 하면 되죠.”

“……결론은 지금 검술 대련을 하고 싶으시다는 거군요.”

“맞아요. 바로 그거에요!”

손뼉을 치며 격하게 긍정을 표하자, 알도르 경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공작 각하의 연습 상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 * *

그노시스와 고대 마법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페르데스는 아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그녀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업무를 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그녀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페르데스는 메이에게 아델이 알도르만 데리고 개인 정원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 사람이 훈련장에서 검술 대련을 하고 있을 거라는 걸 바로 직감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제삼자가 듣기엔 의미심장했다.

해가 저물어 가는 늦은 오후.

미혼의 공작이 똑같이 미혼의 호위 기사와 단둘이서만 개인 정원에 갔다는 건…….

“밀회인가.”

앞서 걸어가던 페르데스는 그노시스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걸 듣고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격하게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방금 뭐라고 했지, 그노시스?”

보통 이러면 실언했다거나, 농담이라고 얼버무리기 마련인데 그노시스는 아니었다.

그는 페르데스를 똑바로 보며 제 주장을 말했다.

“제가 이상한 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 상황을 들은 사람이라면 열에 아홉은, 저와 같은 의심을 할걸요.”

“그런 거 아니니까 이상한 오해하지 마.”

“그럼 페르데스 님은 공작 각하께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굳이 호위 기사만 데리고 개인 정원에 가신 이유를 아십니까?”

그곳에 아델의 검술 훈련장이 있다는 건 대외적으로 비밀인지라 페르데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노시스가 허허, 웃었다.

“역시 페르데스 님도 의심하고 계셨군요.”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그리고 그자는 공작의 호위 기사다. 단순히 그녀의 호위 목적으로 따라갔을 수도 있으니 이상하게 볼 필요는 없지.”

“그럼 아까 그 하녀가 호위 기사님만 데리고 개인 정원으로 갔다고 말하지 않았겠죠.”

“…….”

정곡을 찌르는 지적에 페르데스가 다시 입을 다물자 그노시스가 끌끌 혀를 찼다.

“혹시 그 호위 기사가 공작 각하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시는 겁니까?”

“……모를 리가 없잖아.”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문제였다. 페르데스의 한숨 섞인 대답을 들은 그노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어찌 이리 태연하실 수 있으신 겁니까? 저 같으면 그자를 당장 공작 각하의 곁에서 떼어 놓을 텐데요.”

“그건 내가 손댈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그리고…….”

알도르, 그 남자는 절대 아델에게 고백하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 페르데스는 알도르가 저와 같은 마음으로 아델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도 참고 넘길 수가 있었다.

* * *

오랜만에 실컷 검을 휘둘렀더니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단번에 날아갔다.

대신 몸은 피로가 쌓여 천근만근 무거웠으나,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니 노곤하게 풀렸다.

목욕을 끝내고 침실로 돌아오자,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편지들이 보였다.

목욕하는 사이 하네스가 가져다 둔 모양이네.

나는 화장대에 걸터앉아 편지들을 쭉 확인했다.

대부분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가문에서 보낸 편지였다.

이런 건 읽는 시간이 아까우니 바로 버려야지.

고위 귀족들이 보낸 건 따로 분류해 뒀다가 나중에 천천히 읽어 보고…….

[플랭키 로이드]

버릴 편지와 보관할 편지를 분류하던 와중 눈에 박히는 이름이 있었다.

드디어 왔네. 

기다렸던 만큼 웃음이 나왔다.

나는 곧바로 편지 봉투를 열어 안에 든 편지를 꺼냈다.

[친애하는 아델 레오폴드 공작에게.]

정갈하고 각이 잡힌 필체.

편지지 마지막에 찍힌 날개와 뿔이 달린 쌍둥이 말 문양.

바로 프로페테스 4세가 보낸 편지였다.

예전에는 로고스 경의 이름을 빌려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루센 공작이 뭔가 눈치챈 것 같은 낌새를 받은 후로 그와 아예 상관없는 귀족의 이름을 빌렸다.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저는 나름 잘 지냈습니다. 아직 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금 정신없긴 하지만 이조차도 행복하니 전 역시 왕이 될 체질이었던 모양입니다.]

왕이 될 체질 같은 것도 있는 건가. 

처음 알았네.

[그대가 정식으로 공작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굉장히 기뻤습니다. 당장 레오폴드 영지로 달려가 있는 힘껏 축하해 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게 몹시 안타깝더군요. 게다가 눈치가 보여서 축하 선물도 보내지 못하니…….]

쓸데없는 서론이 너무 길었다.

요점이 궁금해서 앞부분은 대충 넘기고 본론부터 집중해서 읽었다.

[……7개 왕국 중 4개 왕국이 우리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계획은 바로 전쟁이었다.

황제가 다스리는 이 빌어먹을 제국을 대륙의 지도에서 영원히 지워 버리기 위한 전쟁.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한 연합국이 제국을 이기기 위해선 연합국에 속한 7개의 왕국들이 모두 동참하는 편이 좋았다.

그런데 고작 4개의 왕국만 동참하기로 했다고 하니 조금 곤란했다.

[3개의 왕국은 전쟁이 돌아가는 상황을 봐서 가담할지 말지 결정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살살 눈치를 보다가 이길 만한 쪽에 붙겠다는 거네.

쥐새끼 같은 전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전쟁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국가의 존폐가 걸려 있는 만큼 당연히 이기는 쪽에 붙고 싶겠지.

그 마음은 충분히 알겠지만, 문제는 내가 그걸 봐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

3개의 왕국에 도움을 받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꼭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조금만 돌아가면 되는 거니까.

나는 프로페테스 4세에게 그 방법을 어떻게 설명해 주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펜을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