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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163/262)

169화

아버지는 아무리 바빠도 3개월에 한 번씩, 영지 시찰을 하며 영지 내 문제점이나 영지민들의 불편 사항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단순히 책상 앞에 앉아 관리들이 주는 서류만 보면 시야가 좁아질뿐더러, 왜곡이나 부정부패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게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나 역시 아버지의 의견에 동의했고, 그 뜻을 이어받아 영지 시찰을 직접 나갔다.

내가 영지를 비웠을 땐, 페르데스에게 대신해 달라고 부탁했었고.

오늘이 바로 영지 시찰을 나가는 날이었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시찰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정식으로 공작이 되고 나서 영지 시찰을 하는 건 처음인지라 조금 설렜다.

과연 영지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면서 걱정되기도 했고.

다들 내가 공작이 되는 걸 바랐다고 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하며 약간 울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아가씨.”

하네스였다.

그는 가지고 온 편지들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뒤, 내게 말했다.

“마차와 호위 기사들은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호위 기사들이라니? 나는 분명 알도르 경만 데리고 간다고 했을 텐데.”

“저도 알도르 경에게 그리 전했습니다만, 공작의 신분으로 처음 영지 시찰을 나가시는 특별한 날인데 제대로 된 호위가 없으면 우스워 보일 수도 있다며 알도르 경이 기사들을 열 명 정도 준비시켰습니다.”

허어. 두세 명도 아니고 열 명씩이나.

휘황찬란한 제복을 입은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다닐 걸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뭇 영애나 귀부인들은 멋진 제복을 입은 기사들에게 둘러싸이는 게 로망이라고 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오히려 부끄럽고 창피했으며 귀찮았다.

내가 조금만 위험한 짓을 하려고 하면, 그러면 안 된다고 참새처럼 짹짹거렸으니까.

한 명이 그래도 정신이 없는데, 여러 명이 그런다고 생각하니 진절머리가 났다.

실제로 그런 경험이 있기도 했고.

“알도르 경은 홀에 있겠지?”

“네.”

“가자.”

준비가 다 끝나기도 했고, 직접 말해 줘야 내 말을 들을 것 같으니 홀로 향했다.

홀에서 기다리고 있던 알도르 경은 내가 내려오자 다가와 정중히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각하.”

……호칭도 정중하게 바뀌었네.

그만큼 알도르 경이 날 생각해 준다는 거니 마음은 고마웠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였다.

“듣자 하니 호위 기사를 10명이나 준비했다고 하던데, 맞나요?”

“맞습니다.”

“전 분명 알도르 경만 데리고 간다고 했을 텐데요.”

“하지만 오늘은 공작 각하께서 정식으로 영지 시찰을 나가시는 첫날이니…….”

“기각. 어떤 이유도 들어주지 않을 테니, 전부 물리세요. 다시 말하지만 전 알도르 경만 호위 기사로 데리고 갈 겁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알도르 경은 눈에 띄게 시무룩하면서도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페르데스 님의 호위도 한 명만 붙이면 되겠습니까?”

“그러…… 잠깐만, 잠깐만요.”

여기서 페르데스의 이름이 왜 나오는 거지?

설마…….

“페르데스 님도 같이 영지 시찰을 가시는 건가요?”

“……함께 가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나도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나한테 다시 물어보면 어쩌자는 건지.

나는 물론이고 알도르 경도 어리둥절하며 서 있자, 내 뒤에 서 있던 하네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가씨께서 항상 페르데스 님과 함께 영지 시찰을 가셔서 이번에도 당연히 그러시는 줄 알았는데, 착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게.”

“그럼 밖에 계신 페르데스 님께 말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잠깐!”

하네스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됐어. 어차피 준비 다 하셨는데…… 그냥 같이 가지 뭐.”

그의 말대로 페르데스가 레오폴드 공작저에 온 뒤로 항상 영지 시찰을 같이 다녔는데, 갑자기 따로 다니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황제가 호시탐탐 주시하고 있는데, 이 타이밍에 불화설 같은 게 돌기라도 하면 골치 아프니 그냥 같이 가는 게 맞았다.

단지 마음에 걸리는 건 페르데스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받은 뒤로 그와 무언가를 같이 해 본 적이 없다는 거였다.

지난 일주일간 서로의 일로 너무 바빠서 마주 앉아 저녁 식사조차 한 적이 없는데, 예상치 못하게 이런 상황을 직면하니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건 페르데스 역시 마찬가지일 터.

그가 어떤 표정과 생각을 하며 날 기다리고 있을지 감히 상상되지 않았다.

아마 만나면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긴커녕 서로의 얼굴도 똑바로 보지 못하겠지.

“드디어 나왔네.”

그럴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페르데스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날 맞이했다.

그 모습을 보니 바짝 긴장했던 내가 바보 같이 느껴졌다.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의 힘도 살짝 풀려 비틀거리자 양쪽에서 손이 뻗어져 나왔다.

“괜찮아?”

“괜찮으십니까?”

앞에서 손을 뻗은 사람은 페르데스였고, 뒤에서 손을 뻗은 사람은 알도르 경이었다.

“…….”

“…….”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살벌하게 교차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싸움이 날 것 같아 나는 내 두 발로 일어서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괜찮아요. 그것보다 바쁘신 거 아니었어요?”

“괜찮아. 하루 정도는 시간을 뺄 수 있어.”

“그래요…….”

이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아니면 불행으로 여겨야 할지.

싱숭생숭한 마음을 품고 정면을 바라본 나는 곧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바로 페르데스와 단둘이서 마차에 타야 한다는 거였다.

이렇게 탁 트인 공간에서 그와 있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밀폐된 공간에 그와 둘이서 있을 걸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그러나 이제 와서 페르데스를 두고 갈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마차에 타려는데 그가 내 팔을 잡았다.

그가 내 팔을 잡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예전 일 때문인지 심장이 쿵, 떨어지며 온몸의 감각이 그가 잡은 팔에 집중됐다.

약간 놀라며 돌아보자 페르데스가 입술 끝을 살짝 끌어 올리며 말했다.

“오늘은 마차 말고 말을 탈까?”

“네?”

“날씨도 좋은데 마차보단 말을 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가 고개를 들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쳐다봤다.

“마차보단 말을 타는 게 영지 상황을 보기에도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때?”

“저도 그게 좋은 것 같아요.”

안 그래도 그와 같은 마차를 타는 게 신경 쓰이던 참이었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데스가 웃었다.

내 착각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웃음은 평소보다 씁쓸해 보였다.

* * *

한창 농사에 집중할 시기이니, 이번 영지 시찰은 농경지를 중심으로 돌기로 했다.

본디 레오폴드 공작령은 추운 북쪽 지방인데다가 근처에 화산까지 있어, 농사를 짓기엔 여러모로 부적절했다.

처음 이 땅에 뿌리를 내렸을 땐,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황무지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하지만 선대에서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아주 풍족하진 않아도 자급자족할 수 있을 정도는 됐다.

푸른 잎사귀가 무성한 밭을 두 눈으로 직접 보니 뿌듯했다.

이 아름다운 영지를 반드시 지켜야겠다는 사명감이 들기도 했고.

“농사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겠지?”

내 질문에 뒤따라오던 농경지를 담당하는 관리가 내 뒤로 바짝 붙으며 대답했다.

“네. 지난번처럼 여름에 심각한 가뭄만 들지 않는다면 올해는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올해는 가뭄 소식이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하, 저도 그러길 바라고 있겠습니다.”

그러길 바라는 게 아니라 정말 괜찮다는 의미였는데.

내가 아무리 확답해 봤자, 미래를 모르는 그들의 입장에선 단순한 추측으로 들릴 테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관리에게 계속 보고를 받으며 밭 둘레길을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한 소년이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달려오는 게 보였다.

부모님에게 주려는 걸까?

아니면 귀여운 여자 친구에게?

어느 쪽인지 모르겠지만, 그 모습은 상당히 귀여울 터.

흐뭇하게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데, 숨을 헐떡이며 뛰어오던 소년이 내 앞에서 멈춰 섰다.

한 발 뒤에서 따라오던 알도르 경이 날 보호하려는 듯 앞으로 나오려고 하자 나는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여기요!”

소년이 흙 묻은 얼굴에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그리며 꽃다발을 내게 내밀었다.

들과 산에서 피는 꽃을 막 엮어 만든 꽃다발이었지만, 내 눈에는 전문가가 만든 것보다 더 예뻐 보였다.

나름 꾸민다고 리본을 맨 것도 귀여웠고.

“나 주는 거니?”

“네! 항상 저희를 위해 애써 주셔서 감사해요, 공작 각하!”

가식이 전혀 묻지 않은 순수한 칭찬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꽃다발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소년의 흐트러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헤헤.”

“너, 너 거기서 뭐 하는 거니!”

소년의 모친으로 보이는 여자가 기함하며 달려오더니, 소년을 덥석 끌어안고 내게 허리를 깊이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각하! 아이가 뭘 몰라서 한 행동이니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세요!”

“괜찮아. 그리고 용서가 아니라 오히려 감사의 인사를 해야겠는걸. 최고의 선물을 받았으니까.”

웃으며 소년에게 받은 꽃다발을 보여 주자, 여자는 비로소 안심하더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소년과 함께 떠났다.

점점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관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꽃다발을 들고 계시니, 부케를 든 신부 같습니다.”

……신부?

불쑥 튀어나온 말에 시선이 저도 모르게 강가 쪽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페르데스에게 향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페르데스가 내 쪽을 돌아봤다.

그와 눈이 마주칠 새라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이번엔 관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내 아버지 연배쯤 되어 보이는 관리는 인자하게 웃었다.

“황자 전하께선 아주 좋은 분이십니다.”

“…….”

“장담컨대 그분을 선택하셔도 후회하실 일은 없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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