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그가 잡은 손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서 움찔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친 페르데스의 눈매가 예쁘게 휘었다.
“순서가 바뀌었네. 내가 먼저 그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했어야 했는데.”
안 돼. 막아야 해.
“난 그대를 단순한 동료로 생각하지 않아.”
막아야 하는데…….
“그대를 한 여자로서 사랑하고 있어.”
“…….”
“그대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결국 막지 못한 말이 커다란 돌멩이가 되어 잔잔한 호수에 깊은 파동을 만들어 냈다.
* * *
말했다.
드디어 말했어.
이미 몇 번이고 흘려 냈던 마음이지만, 제 의지로 말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지라 조금은 감격스러웠다.
감동도 잠시, 아델이 몹시 당황하며 고개를 푹 숙이자 페르데스는 쓰게 웃었다.
그 행동이 완곡한 거절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쓰라렸다.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동안 마음을 상자에 넣어 꼭꼭 숨겨 두었다.
어느새 커져 버린 마음이 한 번씩 흘러 나와도 모르는 척, 실수한 척하며 최선을 다해서 외면했었다.
그랬는데, 얼굴도 모르는 남자가 아델을 왕비로 맞이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던 이성이 뚝, 끊겼다.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빼앗긴다니.’
그녀가 제 것이었던 적이 없는데 빼앗긴다는 표현을 쓰는 스스로가 웃겨서 페르데스는 속으로 실소했다.
너무 성급하게 군 걸 후회하기도 했고.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자신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 밀고 나가자.
이것 때문에 그녀가 자신을 내친다고 하더라도 솔직하게 제 마음을 전부 보여 주자고 다짐한 페르데스가 무거운 입을 뗐다.
“이 상황이, 내 고백이 부담스러운 거 알아. 당황한 것도 충분히 이해하고.”
쓱,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 올리자 아델의 귓불이 확 붉어졌다.
작은 몸이 움찔거리며 소파 등받이에 딱 달라붙었다.
“그래도 너무 밀어내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 줬으면 해. 나와 남은 일생을 함께하는 걸 말이지.”
“……!”
소파 등받이가 쥐구멍이라도 되는 양, 계속 몸을 파묻던 아델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비슷한 듯 서로 다른 감정을 품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교차했다.
“지금 뭐라고…….”
“나와 남은 일생을 함께하는 걸 진지하게 고민해 달라고 말했어.”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단순히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보다 더 곤란한 말에 아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남은 일생을 함께하자는 건, 결혼하자는 의미와 다름없었다.
결혼이라니.
내가 페르데스와 결혼을 한다니.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에 싱그러운 초록색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반면 바로 안 된다고 거절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고 고민하는 모습에서 희망을 품은 페르데스의 표정은 약간 밝아졌다.
페르데스는 아델 쪽으로 살짝 상체를 기울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싫어?”
확 가까워진 거리에서 속삭이듯이 말하니 귀가 간질간질했다.
아델은 자라처럼 목을 쑥 집어넣고 머뭇거리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랑 결혼하는 게 싫은 거야?”
“그건…….”
아델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부담스러운 페르데스의 시선을 피해 아래로 내려간 눈동자가 테이블보의 화려한 문양을 더듬었다.
단호하게 거절해야 했다.
이렇게 머뭇거리는 건 그에게 쓸데없는 희망만 줄 뿐이니, 확실하게 선을 긋는 게 맞았다.
“…….”
그게 맞는데 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거지.
체르노서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결혼하자는 뉘앙스를 풍겼을 땐,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단호하게 잘라 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럴 수가 없는 걸까.
페르데스에게 도움을 받은 게 많아서, 그래서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그런 걸까?
‘모르겠어.’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 때문에 머릿속이 완전히 뒤죽박죽 뒤엉켜 버렸다.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됐을 때도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왜 이런 건지도 모르겠고.
“어차피 결혼은 할 생각이었잖아.”
페르데스는 거센 물보라가 일어나는 마음의 호수에 또 돌을 던졌다.
다시 고개를 든 아델이 쳐다보자 그가 재차 물었다.
“언젠가 결혼은 할 거였지?”
아델은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며 대답했다.
“아마도…… 해야겠죠.”
지난 생의 결혼 생활이 전부 불행했던 만큼 웬만하면 하고 싶지 않았지만, 가문을 이을 자식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다.
그녀에게 선택지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아델은 레오가 데리러 간 소년이 정말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육이라면, 그 소년을 양자로 들여 가문을 물려줄까 고민했었다.
그러면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어질 테니까.
체르노서 때처럼 그 남자가 제 자리를 빼앗을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됐고.
한데 그러지 않기로 결정을 내린 건, 그 소년이 자신의 자리를 욕심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 아이가 훌륭하게 성장해서 공작가를 이끄는 걸 보고 싶기도 했고.
단순히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이 아닌 자신의 피를 이은 아이가.
아이.
불현듯 첫 번째 생에서 낳은 아이가 생각난 아델은 입 안의 연한 살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었다.
체르노서에겐 진작 정이 떨어졌지만, 배 속에 있는 아이까지 미워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더 애틋한 마음이 생긴 건, 제게 남은 가족은 이 아이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태어나면 잘해 줄 거야.
엄마로서 최선을 다할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는데, 결국 품에 한 번 안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었다.
‘차라리 잘된 건가.’
만약 그 아이를 품에 안았다면, 아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체르노서와 또 결혼하는 정신 나간 짓을 했을 수도 있으니까.
아델은 입술에 번지는 쓴웃음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페르데스가 본 후였다.
그는 아델만큼이나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결혼하기 싫은 모양이네.”
그런 의미로 웃은 게 아니었지만, 원래 의미를 설명하기 힘들기도 했고 저 말 역시 맞았기에 아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건 아니에요. 제게 결혼은 자식을 낳기 위한 의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거든요.”
그러니 당신의 마음을 받아 주기 힘들다는 걸 완곡하게 표현한 건데,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건지 페르데스가 눈매를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그래? 그럼 내가 같이 의무를 이행해 주면 되겠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할 말을 잃은 아델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페르데스가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마주 댔다.
“나를 선택해, 아델.”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잔잔하게 울리며 그녀의 심장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지금 깨달은 건데 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페르데스가 유일했다.
“그대가 나와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까진 욕심내지는 않을게.”
“…….”
“그저 지금처럼 묵묵히 그대의 곁에서 힘이 되어 줄 테니까, 날 선택해 줘.”
솔직하게 부딪쳐 오는 마음이 조금 버거워 아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오히려 귀가 솔깃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원하는 남편감은 자신의 자리를 욕심내지 않고, 가문에 폐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페르데스는 이 모든 조건을 만족했다.
거기다 제 마음을 욕심내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보다 완벽한 남편감은 찾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그의 고백을 쉬이 거절하지 못하고 고민했던 거구나.’
뒤죽박죽 뒤엉켜 있던 고민의 근원지를 찾았는데, 여전히 찝찝했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델은 그게 뭔지 생각해 봤지만, 온갖 고민들로 터져 나갈 것 같은 머리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딱히 중요한 건 아니겠지.
그렇게 여긴 아델은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금까지 나온 결론들에 의존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볼게요.”
“그래.”
페르데스는 기껏 용기 내서 고백했는데 완벽한 대답을 얻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나름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으니 만족하기로 했다.
여기서 더 재촉하는 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것 같기도 했고.
페르데스는 턱을 치켜들며 힘차게 말했다.
“앞으로 그대가 날 선택할 수 있게 노력해야겠군.”
“지금도 충분히 잘해 주고 계세요.”
“좀 더 잘하겠다는 의미야. 그대가 나 말고 다른 남편감은 생각도 할 수 없게 말이지.”
이미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대요.
아델은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입 안에서 굴리다가 다시 삼키며 힘없이 웃었다.
그 모습마저 예뻐 보이니,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구나.
새삼 자신이 얼마나 아델을 좋아하는지 깨달은 페르데스는 옅게 웃으며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부끄러운지 그녀의 손가락이 안쪽으로 말려드는 게 느껴졌다.
아델에게는 그녀의 마음을 줄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놀랐는데, 마음까지 달라고 요구하면 그녀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칠 것 같았으니까.
일단 그녀에게 제 마음을 어필하는 데는 성공했으니, 지금부터는 천천히 다가가야지.
가랑비에 옷깃이 젖어 드는 걸 모르듯이 서서히 스며들어서, 그녀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제게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게 그의 최종 목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