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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화 (161/262)

167화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되니, 이 저택에서 가장 은밀하고 사적인 공간인 내 침실로 페르데스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소파에 앉자마자 무거운 입을 뗐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네, 맞아요. 20년 전, 그노시스가 본 사람은 제 아버지예요.”

과정이야 이미 다 알고 있을 테니, 가타부타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깔끔하게 결론부터 말했다.

이미 예상했던 사실이라 그런지, 페르데스는 놀라거나 하진 않았다.

대신 조금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그 그림에 확실히 선대 레오폴드 공작이 그려져 있었어?”

“네. 분명 제 아버지였어요.”

“그노시스가 본 사람이 그대의 부친과 닮은 사람이었을 가능성은?”

“그럴 가능성은 없죠. 이 붉은 머리는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에게만 내려오는 특색이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그대의 부친은 마법 쪽에는 무지하다고 했잖아. 검술밖에 모른다고.”

“제가 알기로는 그렇지만, 아버지께는 제가 모르는 비밀이 더 많으셨던 것 같으니 이 역시 숨기셨을 수도 있어요.”

나뿐만 아니라 어머니, 그리고 가문 전체에 숨긴 거였다.

아니, 어머니는 알고 계셨으려나.

“그 사람이 선대 레오폴드 공작이 맞다면 그노시스를 만났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20대 초반이야.”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선 페르데스가 팔짱을 꼈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그 나이에 검술뿐만 아니라 마법과 마법진에도 능통한 건 말이 안 돼. 인간이라면 불가능하다고.”

“그렇죠. 평범한 인간이라면 절대 불가능하죠.”

내가 무덤덤하게 대꾸하자 페르데스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반응을 보아하니 부친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모양이네.”

“뭔가 알고 있다기보다 이상한 부분을 발견해서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 봤고, 이번 일이 그 가설 중 하나와 들어맞아서 그런 거예요.”

“이상한 부분? 그게 뭔데?”

음, 어쩌지. 사실대로 말할까 말까.

“말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돼.”

“아니에요, 말할게요. 사실은 전에…….”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로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 말하는 편이 단서를 얻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봤던 내용부터 시작해서 아버지가 100년 전 작성한 걸로 추정되는 영지 계획서를 본 것, 그리고 하네스가 조부와 아버지가 같이 있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까지 전부.

“이상하긴 하네.”

모든 이야기를 들은 페르데스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다 내게 물었다.

“그 영지 계획서를 볼 수 있을까?”

“네. 바로 보여드릴게요.”

공문서는 기록 보관실에 보관하는 게 원칙이었지만, 공작의 권한으로 따로 가지고 있었다.

나는 화장대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 둔 영지 계획서를 꺼내 페르데스에게 보여주었다.

페르데스는 계획서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어떤 이유로 다시 작성된 문서는 아닌 것 같네.”

“만약 그렇다면 다시 작성했다고 첨부를 했을 거예요.”

“그렇지. 그리고 여기 적힌 필체가 정말 선대 레오폴드 공작의 필체라면…….”

“아버지가 약 100년 전에 살아 계셨다는 의미가 되죠. 제가 알고 있는 아버지의 연세는 47세지만요.”

지금까지 살아계셨다면 좀 더 나이를 드셨겠지만, 3년 전 세상을 떠나셔서 아버지의 나이는 영원히 47세였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나이는 말이지.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 전 아버지와 조부가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이 말도 안 되는 현상들이 조금씩 이해가 됐다.

물론 내가 세운 가설 자체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4번의 회귀라는 더 말도 안 되는 일을 몸소 겪었던 터라, 이 말도 안 되는 가설 역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페르데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말은…… 그대도 선대 레오폴드 공작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건가?”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황당해하며 되묻자 페르데스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황급히 말했다.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미안. 그냥 개소리라고 치부하며 넘겨. 아니, 개소리가 맞아. 그러니까 잊어.”

잊기엔 너무 이상한 말을 들었는데.

그리고 페르데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아, 옅게 웃으며 말했다.

“레오폴드 공작가가 레드 드래곤의 축복을 받았다는 거 알고 계시죠?”

페르데스가 입술을 일자로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축복을 받은 덕분에 공작가의 혈족들은 대대로 인간보다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검술 같은 부분에 뛰어난 두각을 보이는 것도 그 덕분이죠.”

“처음 듣는데.”

“그렇겠죠. 사람들에게 이 사실까지 알리진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나한테 말해도 돼?”

“괜찮아요. 대대적으로 공표하지만 않았을 뿐, 비밀인 건 아니거든요.”

황족이나 알레테이아에 속한 12명의 귀족 가문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부터 말하는 건, 비밀로 해 주셔야 해요.”

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페르데스 역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왼쪽 가슴 위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내가 가진 모든 걸 걸고,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을게.”

“좋은 마음가짐이네요.”

저렇게 말하지 않아도 믿고 말할 생각이었지만.

“이 역시 제가 세운 가설이지만, 레드 드래곤이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에게 내린 축복은 우월한 신체 능력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제야 내 맞은편에 앉은 페르데스가 물었다.

“그 말은 그대도 또 다른 축복이 어떤 건지 모른다는 거지?”

“네. 그래도 시간과 관련된 축복인 것 같긴 해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공작저의 지하실 시간이 현실 시간과 다르게 흐르는 것과 그대의 부친과 조부가 같은 인물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그렇죠.”

그보다는 내가 4번이나 시간을 거슬러 온 것 때문이지만……. 그건 말하지 말아야지.

“흐음, 어렵네.”

페르데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문제를 풀 실마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꼬이고 말았으니 어디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페르데스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이건 아무리 봐도 하루 이틀 만에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포기하려고요.”

“뭐?”

페르데스의 눈동자가 한순간 커졌다.

“진심이야? 정말로 포기하게?”

“네. 페르데스 님의 말대로 하루 이틀 만에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지금은 포기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래. 지금만 포기하는 거였다.

나중에 모든 게 끝나면, 그때 승리를 만끽하며 베일에 싸여 있는 아버지의 비밀을 하나씩 풀어볼 계획이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면…… 황제한테 복수하는 걸 말하는 거겠지?”

“그렇죠.”

“그리고 프로페테스 4세에게 복수를 도와달라고 도움을 요청했고 말이야.”

갑자기 프로페테스 4세가 왜 거론되는 거지?

아, 설마?

“루센 공작이 프로페테스 4세에 대해서 무슨 말을 했군요.”

“…….”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정곡인가 보네.

“루센 공작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려주세요.”

“…….”

“페르데스 님.”

내가 재촉하자 페르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무겁게 입을 떼었다.

“그대의 계획이 들통났거나 뭐 그런 건 아니야.”

“그럼요?” 

“그 남자가 그대를…… 왕비로 들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말하더군.”

“아, 그거였군요.”

루센 공작이 뭔가 알아낸 건가 싶어 조마조마했는데, 다행이었다. 

내가 가슴 깊이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자, 페르데스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입술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전혀 놀라지 않는 걸 봐서 정말인가 보군.”

“아, 그런 건 아니에요. 프로페테스 4세는 절 왕비로 맞이할 생각이 없을뿐더러, 저 역시 왕비가 될 생각은 없어요.”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레오폴드 공작령을 지켜야 하는데 왕비라니.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루센 공작은 확신하고 있던데. 그렇게까지 확신한다는 건 그만한 근거가 있다는 거 아닌가?”

“아마 프로페테스 4세가 왕세자였던 시절, 저한테 비가 되어 달라고 말한 것 때문에 그런 걸 거예요.”

“뭐?!”

페르데스는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그게 정말이야? 정말로, 그 자식이 너한테 비가 되어달라고 했어?”

프로페테스 4세에서 그 남자가 됐다가, 이젠 그 자식인가.

“네. 물론 거절했지만요. 아까 말했다시피 전 왕비가 될 생각은 전혀 없거든요.”

그리고 그 역시 내가 왕비감으로 괜찮다고 생각해서 제안했을 뿐, 사심이나 그런 게 있던 건 아니었다.

“1년 가까이 된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가 이제야 루센 공작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네요.”

프로페테스 4세가 그 이야기를 했을 때, 당시 그곳에는 나와 그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이야기가 샌 걸까.

그리고 이제 와서 루센 공작의 귀에 들어간 이유는 뭐지?

“정말로 그 자식과 결혼할 생각이 없는 거 맞지?”

“그렇다니까요. 전 프로페테스 4세를 절 단순히 도와주는 동료라고만 생각하고 있어요.”

절대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거듭 말하자 한순간 페르데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나는?”

“네?”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야 당연히…….”

좋은 동료라고 말하고 싶은데,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주 커다란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목구멍이 따끔거려서 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런 나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던 페르데스가 불쑥 내 옆자리로 옮겨와 앉았다.

그와 나란히 앉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오늘따라 부담스러웠다.

그건 페르데스의 눈빛 때문일까. 모르겠다.

아무튼 피해야 할 것 같아 엉덩이를 슬며시 뒤로 빼는데 페르데스가 내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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