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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화 (160/262)

166화

아델이 그노시스와 함께 문제의 그림을 보고 있던 시각.

“체크.”

페르데스는 응접실에서 루센 공작과 체스를 두고 있었다.

게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페르데스는 벌써 세 번째 체크를 당했다.

그만큼 방어를 하지 못했다는 의미였고, 게임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전부 아델 때문이었다.

그녀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원하는 그림은 찾았는지, 정말로 그노시스가 본 사람이 선대 레오폴드 공작이 맞는지 등등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돌아다녀서 페르데스는 게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계속 집중 못 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루센 공작이 이상하게 생각할 터.

그러니 어떻게든 게임에 집중하려고 노력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체크메이트.”

결국 제대로 된 공격 한 번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체크메이트까지 당한 페르데스가 한쪽 손을 어깨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졌습니다.”

“오늘따라 좀처럼 게임에 집중하지 못하시는군요.”

역시 알아채고 말았네. 페르데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긴 이리도 무기력하게 게임 하는데 못 알아채는 게 더 이상했다.

“안색도 전보다 나빠지신 것 같은데. 혹시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전하?”

“실은……. 조금 걱정되는 게 있긴 합니다.”

걱정 따위 없다고 무작정 시치미를 잡아떼는 것보다, 아무 걱정이나 털어놓는 게 의심을 덜 받았다.

페르데스를 바라보는 루센 공작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이 상황이 퍽이나 흥미롭다는 눈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걱정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걱정이 있다는데, 저런 눈으로 바라보다니.

페르데스는 소문대로 루센 공작의 성격이 정말 삐뚤어졌다고 생각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걱정인지라 털어놓기가 조금 민망합니다.”

“옛말에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이나 걱정은 나누면 배로 줄어든다고 했습니다. 제가 작은 힘이 될 수도 있으니, 편히 털어놓으십시오, 전하.”

나한테 힘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놀리고 싶은 거겠지.

페르데스는 속으로 실소하며, 그와 이야기하면서 생각해 두었던 가짜 걱정을 털어놓았다.

“이제 곧 레오폴드 공작과 결혼할 텐데, 그전에 제대로 된 프러포즈를 하고 싶어서요. 어떤 프러포즈를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던 겁니다.”

“아아.”

짧게 탄성을 뱉는 루센 공작의 눈동자에 서린 흥미가 빠르게 식어 가는 게 보였다.

반응을 보아하니 그가 예상했던 분류의 고민은 아닌 것 같았다.

무슨 고민을 예상했길래 저러는 걸까. 궁금했다. 

어떻게 하면 루센 공작의 속마음을 떠볼 수 있을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생각하는데, 뜻밖에도 그가 먼저 운을 띄웠다.

“혹시 레오폴드 공작이 프로페테스 4세와 상당한 친분이 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네. 아카데미에서 친분을 쌓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공작이 말하길 좋은 친구 사이라고 하더군요.”

“좋은 친구 사이라.”

픽 웃으며 뱉는 말이나 약간 기울어진 채 올라가는 입꼬리가 의미심장했다.

안 그래도 아델이 그가 뭔가 눈치챈 것 같다고 말해서 조금 불안했는데, 저런 반응을 보이니 더 불안해졌다.

페르데스가 말없이 쳐다보자 루센 공작이 그쪽으로 상체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정말로 두 사람이 단순한 친구 사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루센 공작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단순히 친구 사이라면, 생일 때 황금으로 만든 동상을 선물로 보낼 리가 없지요.”

루센 공작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게다가 요즘 연인들 사이에서나 유행하는 마법 오르골도 레오폴드 공작의 생일 선물로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

“무엇보다 프로페테스 4세는 아직 미혼입니다. 황태자로 낙점됐을 때부터, 수많은 가문에서 러브콜을 보냈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며 전부 거절했다지요.”

혹 황제에게 복수하려는 아델의 계획을 눈치챈 건 아닌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페르데스는 걱정했던 것과 다른 분류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썹을 찡그렸다.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루센 공작.”

대충 짐작 가긴 하지만, 확실하게 알고 싶어 페르데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루센 공작은 입술 끝을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대답했다.

“프로페테스 4세는 레오폴드 공작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

“정치적이나 그런 이유가 아닌, 한 남자로서 말이죠. 제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그녀를 왕비로 맞이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하더군요.”

“지금…… 왕비라고 했습니까?”

페르데스가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묻자, 루센 공작이 몹시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모르셨군요. 하긴 저도 입수한 지 얼마 안 된 정보이니, 전하께서 아실 리가 없지요.”

루센 공작이 저리 당당하게 말하는 걸 보면 전부 사실이라는 의미.

‘왕비라니.’

약혼자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숨 쉬고 있는데, 그녀를 왕비로 맞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니.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녀에게 마음이 없었다면,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그게 아닌지라 몹시 신경이 쓰였다.

몹시 괘씸하기도 했고.

안 그래도 아카데미에 있는 아델과 편지를 주고받을 때, 종종 그 남자의 이름이 거론돼서 몹시 불쾌했었다.

하지만 아델의 복수에 그 남자가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고 하니 참았다.

그가 보낸 생일 선물이 다소 의미심장하고 불쾌해도, 전부 복수를 위해서라고 여기며 넘겼다.

그런데 다른 꿍꿍이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페르데스는 멍하니 체스판을 바라봤다.

아델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을까?

혹시……. 프로페테스 4세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그와 결혼을 약속한 건 아니겠지?

“…….”

불현듯 떠오른 가설에 페르데스의 표정이 점점 더 딱딱하게 경직됐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인지라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당장이라도 아델에게 달려가서 자신이 듣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사실인지 묻고 싶으면서도, 그러기가 무서웠다.

만약 그녀가 전부 사실이라고 대답한다면 나는, 나는…….

똑똑-

노크 소리가 끊임없이 뻗어 나가는 망상의 가지를 잘라 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페르데스는 초점이 반쯤 풀린 눈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이를 쳐다봤다.

알도르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송구하오나, 황자 전하께선 다음 일정 때문에 이만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아델이 무사히 볼일을 끝내고 마차로 돌아왔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그럼 속히 떠나는 게 맞지만, 그럴 수가 없는 건 지금은 아델을 만나기가 조금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녀를 만나서 이것저것 묻고 싶은 마음이 샘솟으니 미칠 것 같았다.

“이만 가셔야 합니다, 황자 전하.”

페르데스가 넋을 놓은 듯 가만히 앉아 있자, 알도르가 재촉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페르데스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리고 덩달아 일어선 루센 공작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다음에도 또 체스를 두도록 하죠.”

“물론입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황자 전하.”

페르데스는 루센 공작과 공작가 사용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를 호위하던 알도르의 시선이 흘끗, 마차 짐칸에 닿았다.

이제 저곳에 아델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

“조심해.”

아직 루센 공작저이니, 페르데스는 알도르에게 진심 어린 경고를 하고 마차 문을 닫았다.

그의 경고가 의미하는 바를 알아들은 건지, 알도르는 공작저를 나설 때까지 짐칸 쪽으론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무사히 루센 공작저를 빠져나온 마차는 레오폴드 공작저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잠시 후, 마차가 레오폴드 공작저에 도착하자 알도르는 가장 먼저 짐칸 문을 열었다.

“아가씨.”

짐칸에 불편하게 몸을 구기고 타고 있던 아델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었다.

“어서 내리십시오.”

“고마워요, 알도르 경.”

아델이 마차에서 내리자, 알도르는 그녀의 몸을 이곳저곳 확인했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네. 멀쩡해요.”

단순히 그림만 보고 돌아왔으니, 다쳤을 리가 없었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알도르는 안심하면서도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째서 이런 일을…….”

“이건 다 깊은 사정이 있으니, 아무것도 묻지 말아 줘요, 알도르 경.”

“……네, 아가씨.”

알도르는 아델에게 궁금한 부분이 몹시 많았으나, 충직한 기사답게 그녀의 말을 따랐다.

뒤따라 내린 그노시스가 뻐근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귀족 가문의 마차라고 해도 짐칸은 많이 불편하군요.”

“사람이 탈 용도로 만든 공간이 아니니까. 수고했네, 그노시스. 가서 푹 쉬도록.”

“네, 공작 각하.”

그노시스가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가고, 그 자리를 페르데스가 채웠다.

“…….”

페르데스 역시 할 말이 많은 눈으로 아델을 바라봤다.

당연히 그림에 관한 거라고 생각한 아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찾았어요.”

“……!”

그러자 페르데스가 무척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얼추 예상하고 있었으면서 뭘 저리 놀란담.

페르데스와 루센 공작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모르는 아델은 의아해하며 그의 팔을 잡았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들어가서 전부 이야기해 드릴게요.”

페르데스는 말없이 아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알도르는 그런 두 사람을 따라가려다 발을 다시 땅에 붙였다.

따라가도 어차피 난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하겠지.

살짝 고개를 숙인 알도르의 얼굴에 쓴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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