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다그닥.
마차가 멈춰 서자, 페르데스는 커튼을 걷고 창밖을 확인했다.
커다란 체스 판을 연상시키는 루센 공작저의 외관은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제 고작 두 번째였지만.
“약속을 잡고…….”
“4황자 전하께서…….”
페르데스는 루센 공작가의 경비와 그의 호위로 따라온 알도르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커튼을 다시 쳤다.
그리고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으며 이곳에 오기 전, 아델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루센 공작가에 몰래 잠입하겠다고?”
페르데스가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묻자,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몰래 잠입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체스 대회 결승전 그림을, 아버지의 모습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그 그림을 확인해 보려고요.”
“굳이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할 필요가 있어? 고작 그림일 뿐이니, 그냥 보여 달라고 하면 보여 줄 것 같은데.”
“상대가 루센 공작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렇겠죠.”
영문을 알 수 없는 의미심장한 대답에 페르데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루센 공작은 여러모로 눈치가 빠른 사람이에요. 그런데 제가 갑자기 그 그림을 보여 달라고 하면, 뭔가 있다고 의심하며 파헤치려고 할 거예요.”
“그건 곤란하지. 그러면 그대가 세우고 있는 계획들도 들통날 수도 있으니까.”
“그렇죠. 뭐, 이미 조금 들통난 것 같지만요.”
“그게 무슨……!”
“쉿.”
페르데스가 놀라며 되물으려고 하자, 아델이 그녀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웃었다.
그 미소가 어찌나 매력적인지, 페르데스는 또 한 번 그녀에게 반했다.
심장이 쿵쿵 뛰면서 코와 입으로 들이마시는 공기마저 달콤하게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의심하는 정도니, 몸을 사리면 괜찮을 거예요.”
아델은 멍하니 있는 페르데스의 손을 잡으며 재차 말했다.
“정말이에요. 저 믿으시죠, 페르데스 님?”
“……응.”
그제야 정신을 차린 페르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아델에게 홀린 상태인지라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아델도 그렇게 생각했겠지.
“진짜 창피하네.”
남자다운 면모를 보여 줘도 모자랄 판국에, 자꾸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 주는 자신이 한심해서 깊은 한숨을 내쉬는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만 내리셔도 됩니다, 페르데스 님.”
알도르였다.
아델이 많고 많은 기사들 중 굳이 알도르에게 페르데스의 호위를 맡긴 건, 이번 계획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알도르가 아델이 루센 공작저에 몰래 잠입한다는 걸 알면 목숨을 걸고 막으려고 할 테니까.
즉, 그는 이번 계획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의미.
이번 계획뿐일까, 아델이 누구에게 복수하려고 하는 건지, 그걸 위해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등 알도르가 아는 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나도 아는 건 많이 없지만……. 그래도 저 남자보단 많이 알고 있어.’
새삼 그 사실이 뿌듯한 페르데스가 웃자 알도르의 눈꼬리가 살짝 구겨졌다.
“갑자기 왜 웃으시는 겁니까.”
“내가 웃는 것도 일일이 설명해야 하나?”
페르데스는 언제 웃었냐는 듯 퉁명스럽게 대답한 뒤, 마차에서 내렸다.
페르데스의 임무는 아델이 그 그림을 찾아 확인할 때까지 루센 공작의 시선을 잡아 두는 거였다.
‘체스를 두면서 시간을 끌어 봐야겠네.’
대화의 주제는 어떤 걸로 하면 좋으려나.
페르데스는 이미 생각해 둔 것들 중 뭐가 좋을지 생각하며 루센 공작저 안으로 들어갔다.
아델과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루센 공작은 응접실에서 그들을 맞이했었다.
“루센 공작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황자 전하.”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본관 홀로 들어서자마자 루센 공작의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된 페르데스는 입술을 약간 비틀었다.
예의범절이라곤 전혀 배우지 않은 사람처럼 오만방자했던 루센 공작이 갑자기 정신을 차린 건 아닐 테고.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뭘까. 페르데스는 주의 깊게 루센 공작을 바라봤으나, 웃는 얼굴에선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왜 그리 열렬한 눈으로 절 보시는 겁니까, 전하.”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페르데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전에는 응접실에서 기다리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홀까지 마중 나온 걸까, 궁금해서 본 겁니다.”
페르데스가 대놓고 찌르자, 주변 사람들은 흠칫 놀라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지만, 정작 당사자인 루센 공작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당연히 황자 전하께서 친히 제 저택에 오셨는데 홀까지 마중을 나와야지요.”
“전에 온 저는 황자가 아니었나 봅니다.”
“그때는 황자 전하께서 레오폴드 공작과 같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해서 그랬던 거니,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제 무례를 눈감아 주십시오.”
거짓말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하네.
페르데스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그 부분을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언급해 봤자 싸우자는 것밖에 안 될뿐더러, 홀에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면 아델이 공작저에 몰래 들어오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계속 서 있으니 다리가 조금 아프군요.”
페르데스가 이만 응접실로 가고 싶다는 걸 돌려 표현하자, 루센 공작이 웃으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이런. 제가 눈치가 없었습니다. 바로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황자 전하.”
* * *
슬슬 시작해도 되겠지.
회중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하던 나는 조심스럽게 마차 짐칸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계속 짐칸에 몸을 구기고 앉아 있었더니, 찌뿌둥했다.
마구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나와 같이 짐칸에 타고 있던 그노시스에게 내려도 괜찮다고 손짓했다.
괜찮다는데도 뭐가 그리 불안한지 그노시스는 계속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렸다.
계속 여기 있다간 누군가에게 들킬 수도 있으니, 일단 근처 수풀에 몸을 숨기고 루센 공작저의 도면을 펼쳤다.
정보 길드에 비싼 가격을 치르고 얻은 귀한 도면이었다.
길드원의 말에 따르면 루센 공작은 3층 동쪽 복도 끝에 있는 방에 수집한 그림들을 보관해 두고 있다고 했다.
페르데스가 루센 공작을 붙잡고 있는 응접실은 1층 서쪽 복도 끝에 있으니, 몰래 들어가 그림만 확인하고 나오기 딱 좋았다.
괜히 시간을 지체하면 페르데스만 힘들어질 테니, 얼른 가야지.
나는 도면을 작게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그노시스에게 말했다.
“그럼 갈까, 그노시스.”
“끄응.”
화장실이 급한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던 그노시스가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짚었다.
“꼭 저도 들어가야 하는 겁니까, 각하.”
“응.”
내가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답하자 그노시스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깊어졌다.
“하지만 전 나이도 많이 먹은 데다가 각하처럼 운동 신경이 뛰어나지도 않아, 공작저에 몰래 잠입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친히 텔레포트 스크롤까지 구해 줬잖아.”
텔레포트 스크롤은 한 장에 한 사람, 아주 짧은 거리만 이동할 수 있는데 가격은 더럽게도 비싼, 한마디로 효용 가치가 없는 마법 물품이었다.
그렇다 보니 거의 만들지 않아 구하기 힘들었지만, 운이 좋게도 프라시스 후작에게 대량으로 산 마법 물품에 텔레포트 스크롤이 두 장 있었다.
“내가 말한 지점에서 그림이 있는 방까지 텔레포트 스크롤로 이동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
“그 지점까지 가는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만.”
“그 역시 내가 알아서 할게.”
“……어떻게든 절 데려가겠다는 말씀이시군요.”
“같은 대답을 반복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은 그럴 시간조차 아까웠다. 괜히 시간을 지체했다가 루센 공작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낭패이니 그노시스를 재촉했다.
“어서 가자.”
“……네, 각하.”
그노시스는 불안한 티를 내며 조심스럽게 내 뒤를 따라왔다.
첫 번째 목적지는 그림이 보관된 방의 창문이 보이는 건물 외벽이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무사히 도착한 나는 그노시스에게 말했다.
“10분에 한 번씩 순찰하니까, 그 안에 끝내야 해.”
“저야 텔레포트를 이용해서 바로 보관실까지 간다지만……. 각하께선 어떻게 3층 보관실까지 가실 생각이십니까?”
“알아서 갈 테니, 먼저 가서 창문을 열어 줘.”
그노시스가 고개를 끄덕인 뒤,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었다.
찢어진 스크롤에서 환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노시스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나는 무사히 도착한 그노시스가 3층 보관실 창문을 여는 걸 확인한 뒤, 근처에 있는 커다란 상록수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상록수에서 보관실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아무리 멀리뛰기 실력이 뛰어난 사람도 저기까지 뛰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 보통 사람이라면 말이지.
“후우.”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단단한 가지를 밟으며 달려갔다.
마지막엔 가지를 구름판 삼아 몸을 날렸더니, 창문 앞에 있던 그노시스가 기함하며 입을 쩍 벌렸다.
“조심……!”
탁-
그노시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보관실 안에 무사히 착지하자, 아까와 다른 의미로 그노시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내가 뛰어온 거리를 확인하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시간 없으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그림부터 찾아.”
“……그 그림이라면 이미 찾은 것 같습니다.”
벌써 찾았다고?
조금 놀라며 쳐다보자 그노시스가 말없이 내 뒤쪽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정말로 체스 결승전 모습을 담은 그림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
설마설마했는데 그림에는 정말로 아버지 모습이 담겨 있었다.
비록 옆모습이었지만, 아버지의 초상화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는 옆모습이라도 감지덕지했다.
오랜만에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감정이 울컥 치솟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애써 억누르고 있는데, 내 뒤에 있던 그노시스가 불쑥 그림 쪽으로 다가갔다.
“그노시스?”
“……아아.”
그노시스는 환희에 찬 표정으로 그림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맞습니다. 맞아요.”
“……!”
“20년 전, 제가 만났던 분은 바로…… 이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