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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화 (158/262)

164화

많고 많은 귀족들 중에서 하필 루센 공작이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그림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니.

“산 넘어 산이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휘두르던 목검을 아래로 내렸다.

검을 휘두르면서 잠깐이나마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려고 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검을 휘두를수록 더욱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오른손을 다치는 바람에 왼손으로 검을 잡아서 자세가 계속 흐트러지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뭐 하나 쉬운 게 없네.”

공작위를 손에 넣었으니, 다음 계획을 실행할 때까지는 황제의 동태만 살피면서 잠깐 쉬려고 했다.

그랬는데 이곳저곳에서 문제점과 의문점들이 등장하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루센 공작한테 그림을 보여 달라고 해야 하나.”

그럼 루센 공작이 뭐 때문에 그러냐고 물어볼 텐데, 마땅한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단순히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워서 그렇다는 말은 안 통할 것 같은데.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고요한 밤의 장막이 내린 늦은 시간.

누군가 찾아올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개인 훈련장에 있는 건 알도르 경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에게는 생각할 게 많으니 절대 방해하지 말라고 엄포를 내려놨으니, 알도르 경이 온 건 아닐 테고.

누가 온 건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초대한 사람은 아니니 따끔하게 한마디 하려고 했으나, 기척의 주인을 확인하고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역시 여기 있었네.”

바로 페르데스였으니까.

혹시 몰래 온 밤손님이면 흠씬 두들겨 패 줄 생각으로 꽉 쥐고 있던 목검을 옆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주무시지 않고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대야말로 늦은 시간인데 안 자고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런지 잠이 안 와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어요.”

“그 손으로?”

페르데스가 눈썹을 찡그리며 붕대 감은 내 오른손을 바라봤다.

하필 목검을 오른손에 쥐고 있어서 이 손으로 검을 휘두른 것처럼 보였다.

“검은 왼손으로 휘둘렀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손이 다 나을 때까진 웬만하면 검을 잡지 마.”

“노력해 볼게요.”

“말은 잘하지.”

내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거라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듯 페르데스가 어깨를 으쓱이곤 바닥에 앉았다.

“그노시스가 한 이야기 때문에 그러는 거지?”

나는 그 옆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은 그게 가장 마음에 걸리네요.”

“그 말은 이전까지는 다른 게 마음에 걸렸다는 거네.”

나는 긍정의 의미로 웃었다.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걸 봐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도 알려 줄 생각이 전혀 없고.”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또 그놈의 나중에.”

페르데스가 못마땅해하며 입을 삐죽였다.

“화나셨어요?”

“아니. 화는 안 났지만, 조금 섭섭하긴 해. 나는 그대한테 뭐든지 다 이야기하는데, 그대는 매번 비밀만 만드니까.”

“제 상황 아시잖아요.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거니 이해해 주세요.”

“이해하지. 이해는 하는데…….”

페르데스는 에잇, 하고 혀 차는 소리를 내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괜히 분위기만 우울해지니까,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자.”

“그래요.”

무슨 이야기를 해도 지금 상황에선 우울해질 것 같았지만, 페르데스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그가 대화의 주제를 어디로 돌릴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대의 부친은 어떤 사람이었지?”

“……!”

그노시스와 나눈 대화라든가, 아니면 루센 공작이 가지고 있는 그림을 어떻게 볼 건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 밖의 질문이 나왔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냥. 그대의 부친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그대의 입으론 들어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 궁금해서.”

“…….”

“혹시 내가 아픈 곳을 찌른 거라면 사과할게. 무리해서 말하지 않아도 돼.”

“아니에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슴 깊숙한 곳에 생긴 상처는 이미 새살이 돋아서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저 한 번씩 그 일을 생각하면 슬플 뿐. 

그조차도 이젠 무덤덤했다. 

“아버지의 어떤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예요?”

“아무거나. 평범한 일상 이야기라면 뭐든 좋아.”

아버지의 평범한 일상이라.

줄곧 그의 이상한 부분만 파고들었던 터라, 갑자기 평범한 일상 이야기를 하려니 뭔가 어색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자, 답답했는지 페르데스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지?”

“네. 부모님은 절 무척 아끼고 사랑해 주셨어요. 제가 하고 싶다는 것도 다 하게 해 주셨죠.”

딱 하나. 검술을 제외하고.

“아버지는 수도에 다녀오실 때마다 제 선물을 사 오셨어요. 어찌나 많이 사 오는지, 어머니가 그만 좀 하라고 말리셨을 정도죠.”

시작은 어려웠지만,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니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오랜만에 떠올린 따스한 추억의 잔상 덕분에 복잡하고 우울했던 마음이 안정되면서 웃음이 나왔다.

“정말 좋은 부모님이셨네.”

“그런가요.”

“응. 두 분 다 진심으로 그대를 사랑하고 아껴 줬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져.”

나는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한 뒤, 반쯤 기울인 상체를 팔에 기대며 새카만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부모님이 날 아끼고 사랑해 줬다는 생각은 변함없었지만, 의문이 생겼다.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렇게 날 아끼고 사랑해 주던 아버지였는데, 어째서 검술을 하는 걸 반대하신 걸까.

날 머나먼 타국으로 보내고, 다시는 레오폴드 공작가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이유는 뭐지?

아버지의 일기를 보면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그 이유가 뭐길래…….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내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나온 말에 그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페르데스가 입술 끝을 매끄럽게 끌어 올리며 웃었다.

“그대의 부친이 꼭꼭 숨기고 있는 비밀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대에게 해를 끼치려고 그런 건 절대 아닐 거야.”

그의 커다란 손이 바닥에 대고 있는 내 손을 살포시 덮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 비밀이 그대에게 해가 되기에 어쩔 수 없이 숨겼던 것뿐이야.”

“…….” 

“그러니 그를 의심하거나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선대 레오폴드 공작은 자신의 딸을 무척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었으니까.”

페르데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머릿속에 낀 뿌연 안개가 사라지면서 아버지의 일기장에 적혀 있던 내용들이 아롱아롱 떠올랐다.

지금까지는 아버지가 무언가를 숨겼다는 것에만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아버지가 어째서 숨길 수밖에 없었는가에 초점을 두고 떠오른 내용을 곱씹어 되짚었다.

그러자 페르데스의 말처럼 아버지가 진심으로 날 생각해서 그런 거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제 깨달은 척했지만, 사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버지의 비밀을 파헤치는 데 급급해서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을 뿐.

그런데 페르데스 덕분에 잊고 있었던 사실들을 상기하니 마냥 불안하고 초조했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맞아.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버지의 비밀을 파헤치는 게 아니라 황제에게 복수하는 거야.

방향을 잃었던 이정표가 다시 올바른 곳을 가리키며 뿌옇게 흐렸던 머릿속이 맑아졌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페르데스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댔다. 

그러자 긴장한 듯 페르데스의 어깨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고마워요, 페르데스 님.”

“…….”

“정말로 고마워요.”

그것도 잠시, 페르데스는 내가 편하게 기댈 수 있게 자세를 고쳐 잡더니, 맞은편 내 어깨에 손을 가볍게 올렸다.

“천만에.”

* * *

아버지의 비밀을 알아내는 건 황제에게 복수하고 난 뒤에 하기로 마음을 굳히긴 했으나, 그래도 루센 공작이 가지고 있는 그림은 보고 싶었다.

루센 공작에게 그 그림을 보여 달라고 하면 그는 기꺼이 보여 줄 것이다.

문제는 그걸 대가로 뭘 요구할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작위 승계식 때, 루센 공작이 했던 말 때문에 그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 루센 공작가에 몰래 들어가서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이런 쪽에는 레오가 전문일 테니, 그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구하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그는 니콜 테시스와 함께 글로아 섬에 있는 소년을 데리고 오기 위해 떠나고 없었다.

니콜 테시스만 보내기엔 조금 불안해서 레오도 같이 보냈다.

레오를 생각하니 그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만약 그 소년이 정말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육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레오는 이전에 내게 그 소년을 찾으면 죽일 거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고, 나는 그 질문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었다.

그 뒤로 레오는 그 일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또 물으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직 그 소년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결정을 내리지 못해서 난감하기도 했고.

“어떻게 하실 건가요, 공작 각하?”

레오는 이번에는 반드시 내 대답을 듣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날 재촉했다. 

나 역시 이제는 마음을 정해야 할 것 같아, 어찌하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가 대답했다.

만약 그 소년이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육이 맞다면…….

“없앨 거야. 후환이 될지도 모르는 싹은 미리 밟아 없애는 게 맞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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