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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화 (157/262)

163화

그노시스의 대답을 들은 페르데스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정말로 그노시스가 만났던 그 남자의 머리 색이 아델과 같다면, 그 남자는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육이 확실했다.

타오를 듯한 붉은 머리칼은 레드 드래곤의 축복을 받은 레오폴드 공작가의 특징이었으니까.

거기다 시기나 나이 등 이것저것 따져 봤을 때, 그 남자는 아델의 부친인 선대 레오폴드 공작일 가능성이 컸다. 

정황들이 딱딱 들어맞는데도 확신을 내릴 수가 없는 건 아델이 부친은 마법이나 그런 쪽에 무지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노시스는 그 남자가 마법은 물론 마법진 쪽에도 해박했다고 했는데…….

“도대체 뭐지?”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아델의 표정은 페르데스보다 더 심각했다.

“저와 똑같은 머리 색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게 무슨 말이죠? 그 사람을 언제 어디서 봤다는 건가요? 그리고 갑자기 그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뭐죠?”

“일단 진정해.”

아델이 흥분해서 속사포로 말을 쏟아 내자, 페르데스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잡고 진정시켰다.

그제야 자신이 흥분했다는 걸, 그리고 보는 눈이 많다는 걸 자각한 아델이 크게 심호흡했다.

“……제 집무실로 가서 이야기해요.”

“그러지.”

“그노시스라고 했던가? 그대도 날 따라오도록.”

아델은 페르데스와 그노시스를 데리고 집무실로 향했다.

알도르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집무실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알도르 경은 밖에서 엿듣는 귀가 없는지 감시해 주세요.”

감시를 핑계로 자신을 내쫓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알도르의 표정이 흐려졌다.

“왜 그래요, 알도르 경?”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가씨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누가 봐도 알도르의 상태는 이상해 보였으나, 아델은 머릿속이 다른 일로 가득 찬 탓에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다소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이제 말씀해 주세요.”

아델이 소파에 앉기도 전에 닦달하자, 페르데스가 작게 웃었다.

“그렇게 재촉하지 않아도 다 말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우선 앉을까?”

아델은 페르데스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소파에 앉았다.

그 옆에 페르데스가 앉았고, 그노시스는 그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소파에 앉은 후에도 아델의 시선은 페르데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얼굴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뜨거운 시선에 페르데스가 어깨높이까지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알았어. 다 말해 줄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걸까. 막상 이야기하려니 막막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아델을 더 기다리게 했다간 폭발할 것 같아 일단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이 이야기가 나오게 된 계기가 뭐냐면…….”

말을 하다 보니 조금씩 가닥이 잡혔다. 그노시스가 한마디씩 거들어 준 덕분이기도 했다.

원래 해 줄 이야기가 많은데, 제 생각까지 덧붙이니 예상했던 것보다 더 길어졌다.

“……그렇게 된 거야.”

긴 이야기가 끝나고, 집무실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

아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꽉 마주 쥔 제 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뜬금없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많이 당황스럽겠지.

페르데스는 아델이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마침내 정리가 끝났는지, 아델이 무거운 입을 뗐다.

“그러니까…… 페르데스 님의 말을 요약하자면. 약 20여 년 전, 유적지에서 그노시스가 만난 사람이 제 아버지라는 거죠?”

“레오폴드 공작가에 그대의 부친과 비슷한 연령대의 다른 혈육이 없다면, 아마도.”

“제가 알기론 없어요.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리고 그 선조들도 전부 외동이었어요.”

그렇다 보니 그 흔한 사촌조차 없었다.

아델은 다시 깍지 낀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그노시스에게 물었다.

“자네가 유적지에서 본 사람이 확실하게 나와 같은 붉은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나?”

“네.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색이니까요.”

“그건 그렇지.”

레오폴드 공작가 혈육의 특색이기도 했고.

그렇다면 그노시스가 만난 사람은 정말로 내 아버지란 말인가.

아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평소였다면 그노시스가 뭔가 착각한 거라고 단순히 생각하며 넘겼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부친이 약 100년 전, 작성한 걸로 추정되는 영지 계획서를 발견한 터라 그럴 수가 없었다.

거기다 하네스가 부친과 조부가 같이 있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해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보고 들은 정황들이 뒤엉키면서 도출해 낸 결론이 당황스럽기도 했고.

정말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동일 인물인 걸까?

“초상화를 확인해 보면 어떨까?”

페르데스가 툭, 말을 던졌다.

“그노시스가 본 남자가 그대의 부친이 맞는지, 초상화를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노시스가 말했다.

“송구하오나 저는 그분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예 기억나지 않는 건 아니니까, 초상화를 보면 뭔가 떠오를 것 같은데. 그 남자가 정말 선대 레오폴드 공작이라면 말이지.”

“으음,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한번 해 보겠습니다.”

“저 역시 좋은 의견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좋은 분위기를 깨는 말에 페르데스는 물론 그노시스도 아델을 쳐다봤다.

“그건 안 될 것 같다니. 무슨 이유가 있는 건가?”

“아버지의 초상화가 없거든요.”

유년기나 젊었을 때 모습을 평생 남기고 싶어서 등, 귀족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초상화를 많이 그리는 편이었다.

특히 한 가문의 가주 정도 되면 후손에게 이런 사람이 가주였다는 걸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무조건 초상화를 그렸다.

“그게 말이 돼?”

그런데 선대 레오폴드 공작의 초상화가 없다고 하니, 페르데스는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저도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에요. 아버지의 초상화는 없어요.”

“이유가 있는 건가?”

“아버지는 활동적인 분이셔서, 몇 시간 동안 한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는 걸 견디지 못하셨대요. 그래서 초상화를 그리는 걸 굉장히 싫어하셨죠.”

“그래서 초상화가 한 점도 없다는 거야?”

아델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데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미간을 짚었다.

이해가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더 많았다.

특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주가 몇 시간 동안 앉아 있는 게 싫어서 초상화를 그리지 않겠다는데, 주변에서 가만히 있었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는데…….

“하지만 조부의 초상화는 있을 거예요.”

불쑥 나온 말에 페르데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갑자기 조부의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야?”

그노시스가 본 사람과 아델의 조부가 닮았다면, 그 남자가 선대 레오폴드 공작일 가능성이 더 커지니 확인해 달라는 건가?

“그건 나중에 설명해 드릴 테니, 일단 조부의 초상화를 확인해 주세요.”

“그노시스, 해 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페르데스는 의아했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노시스도 해 준다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림 보관실로 가요.”

초상화같이 중요한 물건은 함부로 옮기면 안 되니, 아델은 두 사람을 데리고 별관의 그림 보관실로 향했다.

그곳엔 역대 레오폴드 공작과 공작 부인의 초상화들이 벽면을 따라 걸려 있었다.

분명 걸려 있어야 하는데…….

“없……어?”

부친과 조부의 초상화가 걸려 있어야 할 자리만,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부친이야 그렇다 쳐도, 조부의 초상화도 없다니.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아델은 곧바로 하네스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것이…… 제가 공작가에 들어온 지 4년 정도 됐을 때, 별관에 원인 불명의 화재가 난 적이 있습니다.”

“화재?”

“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만, 그때 데미안 님의 초상화를 비롯한 중요한 기록들이 불에 타 소실됐습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으나, 수많은 초상화 중 하필 조부의 초상화만 불에 탔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럼 어째서 다시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지?”

“그것이 데미안 님께서 지병이 다시 도지는 바람에 안색이 상당히 나빠져 초상화를 그리는 걸 거부하셨습니다.”

“……그래?”

자신의 모습을 남기지 않으려고, 이유를 끼워 맞춘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일까.

“그때 소실된 중요한 기록은 어떤 게 있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페르데스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네스는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송구합니다. 당시 전 막 수습 자격을 땐 터라 자세히 들은 바가 없습니다.”

“정말 들은 게 없는 거 맞겠지?”

“예에. 정말입니다.”

페르데스가 따지듯이 묻자, 하네스는 약간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단 말이지.’

의문점을 파고들면 들수록 해결되긴커녕 오히려 의문만 늘어나니 황당하면서도 오기가 생겼다.

반드시 밝혀내고 싶다는 오기.

“아버지의 초상화도 없겠지?”

“네. 제가 알기로 없습니다.”

“그래……?”

아델은 눈에 띄게 실망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보고 싶으신 거구나.

아델은 안타까운 눈으로 보던 하네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루센 공작가에는 있을지도 모릅니다.”

“루센 공작가?”

“네. 예전에 체스 대회가 열렸을 때, 현 루센 공작 각하께서 화가들을 불러 결승전의 모습을 그림에 담으셨다고 합니다.”

당시 체스 대회의 결승전까지 올라간 사람은 현 루센 공작과 아델의 부친인 선대 레오폴드 공작, 두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 그림에 선대 공작 각하의 모습이 담겨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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