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그노시스의 말을 끝으로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수 초가 지난 후에야 제 귀로 들은 말을 해석한 페르데스가 느리게 되물었다.
“그 말은…… 그자가 다른 종족이었을 수도 있다는 건가?”
“글쎄요. 거기까진 제가 감히 언급할 수가 없군요.”
이미 거의 다 언급해 놓고, 이제 와서 발을 빼긴.
페르데스는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찼다.
하여간 그자가 사람이 아닌 다른 종족이었다면, 무려 세 개의 분야에서 경지에 오른 게 이해가 됐다.
‘무슨 종족일까.’
사람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하니 엘프일 것 같긴 하나, 단정 지을 수 없는 건 엘프는 인간의 욕심 때문에 거의 멸종한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생존한 극소수의 엘프들은 깊은 산속에 틀어박혀 절대 인간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었다.
엘프가 아니라면 어떤 종족인 거지?
“그자가 어떻게 생겼지?”
생김새를 들으면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아 물어봤는데, 그노시스가 조금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그래?”
“실은…… 그분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하긴 시간이 오래됐으니, 잊을 만도 하지.”
무려 20여 년 전의 일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지 그노시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그분과 헤어지고 난 뒤부터 기억이 잘 나지 않았습니다. 마치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말이죠.”
“……뭐?”
그냥 스쳐 지나간 인연도 아니고, 이것저것 많은 걸 가르쳐 준 은인인데 헤어진 직후부터 상대의 생김새를 기억을 못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것도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려졌다고 하니, 뭔가 있다고 판단한 페르데스가 다시 물어보려는데 그노시스가 먼저 말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지?”
“머리 색이요.”
기억을 더듬는 듯 허공을 응시하던 그노시스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분의 타오를 듯한 붉은 머리 색만큼은 절대 잊지 않았습니다.”
타오를 듯한 붉은 머리.
페르데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자연스럽게 아델의 머리 색을 떠올렸다.
불꽃처럼 새빨간 머리칼과 싱그러운 초록색 눈동자가 대대로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에게 내려오는 특색이긴 하나, 그들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붉은 머리칼과 초록색 눈동자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타오를 듯한 붉은 머리를 가진 사람은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밖에 없었다.
페르데스도 아델처럼 붉은 머리칼을 가진 사람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한데 그노시스가 타오를 듯한 붉은 머리라고 묘사하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혹시 그노시스가 만났던 남자가 선대 레오폴드 공작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노시스의 묘사가 이해됐으나, 다른 게 이해되지 않았다.
우선 아델이 말하길 선대 레오폴드 공작은 마법 쪽에는 지식이 없는, 검밖에 모르는 기사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노시스는 그 남자가 마법뿐만 아니라 마조사 쪽도 경지에 오른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했으니, 같은 사람일 리가 없었다.
레오폴드 공작가의 후계자가 에튀모스 유적지 같은 위험한 곳에 탐사하러 가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고.
그 외에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으니, 두 사람은 확실히 동일 인물이 아닐 테지만, 타오를 듯한 붉은 머리라는 묘사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혹시 레오폴드 공작을 본 적 있어?”
그노시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한 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선대 레오폴드 공작은?”
“그분 역시 뵌 적이 없습니다. 귀족이 아닌 저 같은 마조사가 함부로 뵐 수 있는 분이 아니니까요.”
“그래?”
그럼 확인해 보면 되겠지.
페르데스가 일어서며 말했다.
“레오폴드 공작을 소개해 줄 테니, 따라와.”
* * *
약 100년 전인 424년에 일했던 관리들은 없지만, 그들의 후손들 중 대다수가 공작가와 공작령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그들이라면 뭔가 들은 게 있을지도 모르니, 나는 관리들을 찾아가 이것저것 물어봤으나 헛수고였다.
그들은 나보다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하네스에게만 물어보고 그만둬야지.
그는 조부 때부터 공작가에서 일했으니,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
“사라에게도 물어볼까.”
사라는 아버지 때부터 일해서 하네스보다 비교적 아는 게 없을 테니, 일단 그에게 먼저 물어보고 생각해 봐야겠어.
나는 곧바로 하네스를 찾아가 이것저것 물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러나 하네스 역시 아는 게 딱히 없었다.
하긴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알겠어.
“후우.”
머리는 이해했지만, 마음은 이해하지 못해 깊은 한숨이 나왔다.
하네스도 모른다면 사라나 다른 사람들에겐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
하나의 해프닝으로 여기며, 이쯤에서 접어야 하나 고민하는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혹시 아버지의 유년기 시절에 대해 알고 있나?”
만약, 아주 만약에 레드 드래곤의 축복이 시간과 관련된 거라서 아버지가 100년 전에도 계셨다면 하네스나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의 유년기 시절을 보지 못했을 터.
“죄송하지만 선대 공작 각하의 유년기 시절에 대해서도 자세히 아는 바가 없습니다, 아가씨.”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건데, 돌아온 대답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어쩌면 내가 생각한 가설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손이 벌벌 떨렸지만, 애써 침착한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어째서 모르는 거지? 하네스는 그때도 공작가에 있었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당시 선대 공작 각하께선 기사 아카데미 기숙사에 계셔서 공작저에 거의 오지 않으셨습니다.”
“거의 오지 않았다는 건 오긴 왔다는 거네요.”
“네. 1년에 한 번 정도 돌아오셨지만, 잠깐 머물다 가셨고, 그 당시 저는 수습 집사인지라 선대 공작 각하를 뵐 기회가 없었습니다.”
수습 집사들은 정식 교육이 끝날 때까지 본관에 오지 않으니, 하네스가 아버지를 볼 기회가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의심이 거대한 산을 집어삼킨 불길처럼 번져서 그런지, 일부러 하네스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아카데미를 졸업하신 후에는요? 그때는 수습 집사 교육이 끝났을 테니 아버지를 뵐 기회가 있었을 텐데요.”
“선대 공작 각하께선 아카데미를 졸업하신 후에는 수도에 머무시다가 공작가의 오랜 전통에 따라 용병단에 들어가셔서 대륙을 떠돌아다니셨습니다.”
아, 맞아.
실전 경험을 키우고, 대륙의 사정을 눈으로 보고 직접 경험하라는 의미에서 후계자는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몇 년 동안 용병단 생활을 하는 게 관례였지.
……나는 아버지가 인정한 정식 후계자가 아니라서 하지 않았지만.
새삼 떠오른 사실이 가슴에 사무쳤다.
아버지가 내가 싫어서나 그런 이유가 아닌, 피치 못할 이유로 반대했다는 건 알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내겐 큰 상처였다.
“그럼 하네스가 아버지를 본 건 한참 뒤겠네.”
“네. 제가 레오폴드 공작가에 들어오고 약 7년 뒤에 처음 각하를 뵀습니다.”
하네스는 기억 깊숙한 곳에 박아 두었던 오래된 기억을 상기하는 듯 천천히 말했다.
“선대 공작 각하께선 좀 더 대륙을 여행하고 싶어 하셨지만, 부친이신 데미안 님께서 갑작스럽게 지병이 발병하면서 수도의 병원에 치료 겸 요양으로 입원하시는 바람에 돌아오시게 됐지요.”
그 이야기라면 나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게 4년 동안 치료와 요양에 힘을 썼으나, 결국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공작위를 승계받았다는 이야기까지 전부.
그렇다는 건…….
“하네스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함께 계신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거네.”
“아니요. 그럴 리…… 음?”
하네스는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깜빡였다.
“아가씨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네요. 모친이신 엘리아 님과 같이 계신 건 종종 봤었지만, 데미안 님과 함께 계신 건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
하네스의 이야기를 들으니 의심이 점점 더 몸집을 키우며 커졌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어보고 싶었으나 조부가 계실 당시 공작가에 있었던 사람은 하네스뿐인지라 달리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공작가에는 그렇지.’
마티나 백작을 비롯한 몇몇 귀족들은 조부와 아버지, 모두를 봤을 테니, 이 부분은 그들에게 물어보면 될 터.
가까이 있는 마티나 백작부터 만나 봐야겠다고 결심하며 중앙 계단을 올라가는데, 페르데스가 백발이 무성한 남자와 함께 내려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남자였지만, 바로 페르데스의 마조사 스승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침 딱 만났네.”
날 발견한 페르데스가 성큼 내려오더니, 내게 그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이쪽은 내 스승인 그노시스야.”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 각하. 그노시스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
성이 없는 걸 보니 평민이구나.
마조사나 마법사는 실력만 있다면 평민도 될 수 있지만, 귀족의 스승이 되진 못했다.
거기다 페르데스는 황족.
더더욱 평민이 스승이 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페르데스가 나름 만족하기도 했고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의미이니 그 부분을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다른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서 그것까지 걸고넘어질 여력이 없기도 했고.
그럼 이만 가 보겠다고, 나중에 계속 이야기하자고 말하려는데, 페르데스가 눈짓으로 내 머리를 가리키며 그노시스에게 물었다.
“이것과 같은 색이었나?”
뭐가 같은 색이라는 거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그노시스는 알아들었는지 심각하게 내 머리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분도 공작 각하처럼 타오를 듯한 붉은 머리칼을 가지고 계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