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424년. 믿을 수 없는 연도에 입이 떡 벌어졌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해 봤지만, 서류에 적힌 숫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책상에서 발견한 서류였다면, 연도를 잘못 쓰신 거라고 생각하며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온 서류들은 아니었다.
여기 있는 서류들은 전부 검증된 서류들이니, 잘못된 연도가 적힌 서류가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계획서 아래에는 레오폴드 공작의 인장이 떡하니 찍혀 있었다.
즉, 이건 공문서라는 의미.
“그런데 어째서 아버지의 필체로 쓰여 있는 거지……?”
약 100년 전에 작성된 서류가 어째서!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낀 나는 연간 영지 보고서들을 모아 둔 파일철을 꺼냈다.
그중 424년도에 작성된 영지 보고서와 아버지가 작성한 계획서를 비교해 봤다.
“……비슷해.”
그 말인즉, 이때, 영지 계획서에 적힌 대로 영지를 운영했다는 의미였다.
혹시 매년 영지 계획서가 비슷한가 싶어, 이때를 기준으로 5년 전후의 계획서와 보고서를 전부 확인해 봤으나 그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424년에 작성된 영지 계획서만 아버지의 필체로 작성되어 있었다.
다른 계획서들은 좀 더 정갈하고, 수려한 글씨체였다.
내가 기억하는 족보가 맞다면, 그땐 아버지의 조부이자 내게 고조부가 되시는 데미안 레오폴드가 가주로 있던 시기였다.
그러니 이 필체는 고조부의 필체겠지.
아니면 그 당시 관리였던 자들의 필체거나.
하여간 이때 아버지의 필체로 작성된 계획서가 있다는 게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일은 아닌데…….”
가령 어떤 이유로 이때 작성된 계획서가 손실돼서 아버지가 새로 작성했다거나.
우연하게도 고조부의 보좌관 중 누군가 아버지와 상당히 유사한 필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등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중 내가 생각하고도 말도 안 되는 가능성도 있었는데, 바로 아버지가 이 당시에 살아 계셨다는 거였다.
다른 때라면 말도 안 되는 망상이라고 치부하고 넘겼을 텐데.
내가 회귀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여러 번 겪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하실의 시간이 현실의 시간보다 현저하게 느리게 흘러간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의 일기에 적힌 내용 역시.
뒤죽박죽 뒤엉킨 머릿속을 애써 정리하며, 이 모든 것을 조합해 봤을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어쩌면 레드 드래곤의 축복이 우월한 신체 능력뿐만이 아닐 수도 있다.
* * *
아델이 별관의 기록 보관실에서 자료들을 찾고 있는 같은 시각.
페르데스는 마조사 스승인 그노시스를 만나 마법진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의 대부분은 페르데스가 질문하고, 그노시스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그노시스는 경력이 오래된 마조사답게 많은 걸 알고 있었으나, 고대 마법진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페르데스는 그노시스가 아델이 조사해 달라고 부탁한 마법진이 고대 마법진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으니 어느 정도는 알 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생각하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글쎄요. 왜 그럴까요.”
그런데 생각보다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에 당황하며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그 마법진이 고대 마법진인 걸 바로 알아본 거지?”
“으음.”
그러자 그노시스가 조금 당황스럽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뭔가 숨기고 있구나.
“말해 봐, 그노시스. 어떻게 안 거야?”
그리 확신한 페르데스가 재차 묻자, 그노시스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눈을 뜨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이 정도면 충분히 비밀 유지를 한 데다가, 저 말고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한 명쯤은 더 있어야 대를 유지할 수 있을 테니, 알려 드리지요.”
페르데스는 그노시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알려 준다고 하니 일단 잠자코 기다렸다.
“우선 페르데스 님의 질문에 대답부터 하자면, 전 그 마법진을 실제로 본 적이 있습니다.”
“500년 전에 이미 사라진 마법진이라며? 그런데 어떻게 봤다는 거야?”
“혹시 에튀모스의 유적지를 아십니까?”
“당연히 알지. 수많은 마법 유물들이 묻혀 있는 유적지로, 마법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잖아.”
“페르데스 님도 가고 싶으십니까?”
돌아온 질문에 페르데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아니야.”
“호오? 페르데스 님도 마법 분야에 관심이 상당히 많으신 걸로 아는데, 의외군요.”
“관심이 많은 건 맞지만, 내 목숨을 내놓고 싶진 않아서 말이지.”
에튀모스 유적지가 발견된 지 약 백여 년이 지났지만, 여태 제대로 된 발굴이 이뤄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유적지가 하필 연합국이나 제국에도 속하지 않은 제3국의 영역에 속해 있는 데다가.
유적지 주변에 몬스터들이 많고, 그 유적지에는 저명한 마법사나 마조사들도 풀지 못하는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는 터라 발굴하는 게 굉장히 어려웠다.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오래된 마법 유물이라는 것에 눈이 뒤집혀 직접 탐사하러 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하지만 그중 절반 이상은 돌아오지 못했고, 생존한 사람 중 절반은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남은 절반은 대부분 유적지에 발만 담그고 돌아온 사람들이니, 유적지의 악명은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졌다.
“그런데 그런 곳에 가라고? 절대 사양하지.”
페르데스가 질색하자, 그노시스가 웃었다.
“하긴 저도 처음에는 호기롭게 갔었지만, 유적지 입구부터 진하게 풍기는 피 냄새를 맡고 뒷걸음질 쳤었지요.”
“음? 그노시스, 자네는 그곳에 간 적이 있나?”
“네. 약 30년 전, 아주 혈기왕성했던 시절에 호기심을 못 이겨 탐사단에 들었던 적이 있었지요.”
그노시스의 눈동자가 과거를 회상하는 듯 허공을 되짚었다.
“뭐, 결국 입구에 발만 슬쩍 담그고 돌아왔지만요.”
“에튀모스의 유적지가 그렇게 끔찍한 곳이었나?”
“제가 느끼기엔 그렇습니다. 당시 유적지에 들어갔던 12개의 탐사단 중 한 탐사단만 무사히 돌아왔으니, 말 다한 셈이지요.”
“유적지에 들어갔다가 무사히 돌아온 탐사단이 있다고?”
페르데스가 놀라며 묻자, 그노시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5명 정도로 꾸려진 소규모 탐사단이었습니다. 물론 전부 대단한 실력자들이었지만요.”
“그러게. 정말 대단한 실력자들이었나 보네.”
무시무시한 유적지에 들어가서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그들의 실력이 검증됐다.
“그래서, 그 이야기와 자네가 이 고대 마법진을 한눈에 알아본 거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겁이 나서 유적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돌아오긴 했지만, 확실하게 봤으니까요.”
그노시스가 종이에 그려진 고대 마법진을 손으로 훑었다.
“입구의 천장에 이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걸 말이죠. 물론 오래돼서 그런지 작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만으로 이 마법진이 고대 마법진이라는 걸 알아보기 힘들었을 텐데.”
“제가 아까 말한 소규모 탐사단에는 기사이자 마조사이며 마법사인 분이 있었습니다. 전부 경지에 오른 대단한 실력자였지요.”
평생 한 분야만 파도 경지에 오르기가 힘든데, 세 개의 분야에서 경지에 오른 실력자였다니.
페르데스는 그게 가능한 일인지 궁금했으나, 잡다한 이야기로 쓸데없이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아 잠자코 들었다.
“제가 처음 보는 마법진에 흥분해서 파헤치고 있자, 그분이 알려 주신 겁니다. 이건 약 500년 전, 사라진 고대 마법진이라고 말이죠.”
“그자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지?”
“글쎄요.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마법진에 대해 꽤 해박한 지식을 가지신 분인 건 확실합니다. 당시 제가 모르던 것들을 전부 알고 계셨거든요.”
그 사람을 떠올리는 그노시스의 얼굴에는 짙은 존경심이 보였다.
그노시스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정말로 실력자인 것 같은데, 그래도 찝찝했다.
우선 마법사와 마조사들은 지식이 재산이자 그들의 모든 것이었기에 다른 사람과 함부로 공유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노시스에게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선뜻 알려 줬다는 것부터 의심스러웠다.
“저는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그분에게 많은 걸 배웠습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지만요.”
선뜻 알려 준 건 아닌가.
“그 사람에게 뭘 준 거지? 혹시 제자로 들어가기라도 한 거야?”
“하하,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제자로 받고 싶지 않다며 거절하시더군요.”
“잠깐만. 그 사람이 그노시스보다 나이가 적었다고?”
상대는 무려 세 개의 분야에서 경지에 오른 자니, 당연히 그노시스보다 나이가 한참 많을 줄 알았는데 어리다는 사실에 페르데스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네. 정확히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는 묻지 못했지만, 외견상으론 30대 초반인 저보다 한참 어려 보였습니다.”
“그럼 동안인 거 아닌가?”
“글쎄요. 거기까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온 사람들이 여기 생활보다 아카데미 생활이 편하지 않냐고,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걸 들어 봤을 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보통 성년식을 치르기 전에 아카데미를 졸업하니, 그노시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20대 중반 정도라는 의미였다.
“20대에 세 개의 분야에서 경지에 올랐다고……?”
그게 정말로 가능한 일인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실에 페르데스가 중얼거리자, 그노시스가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당시 제가 본 그분의 나이는 그랬다는 겁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페르데스가 쳐다보자 그노시스가 말을 덧붙였다.
“그때도, 지금도 하는 생각이지만 그분은 정말 사람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