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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화 (154/262)

160화

푹 자고 일어나서, 온통 물음표뿐인 의문들을 하나씩 고민해 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이제 두 시간 정도 잤으려나.

좀 더 자도 될 것 같아 베개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눈꺼풀과 몸은 무거운데, 정신은 멀쩡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냥 일어나야겠다.”

낮잠 잤다고 생각하며 활동한 뒤, 밤에 푹 자야지.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몸을 깨우기 위해 차가운 물로 깨끗하게 샤워하고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내 머리를 말려 주러 온 하녀가 물었다.

“아가씨께서 주무시는 사이 페르데스 님이 다녀가셨어요.”

“그래?”

“네. 아가씨가 깨시면 알려 달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내가 직접 페르데스 님을 찾아뵐 테니, 그러지 않아도 된다.”

안 그래도 페르데스에게 지하실에서 본 마법진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좋은 타이밍이었다.

“페르데스 님이 어디 있는지만 알아봐 주렴.”

“네, 아가씨.”

하녀가 나가고, 나는 마법진을 그렸던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이거, 무슨 책이지?

시간에 쫓겨 아무거나 막 집은 터라, 무슨 책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혹시 가문의 역사나 일대기 등 중요한 기록이 담긴 책이면 어떡하지.

덜컥 걱정돼서 황급히 책장을 펼쳐 확인했다.

다행히 가문의 중요한 기록이 담긴 책은 아니었다.

[제국 520년 06월 09일]

[올벤 경이 아델을 제국 기사 아카데미에 보내는 게 어떻겠냐며 넌지시 제안했다.]

……나한테는 중요한 기록이었지만.

아무 생각 없이 막 집은 책이 아버지의 일기장이었다니.

그것도 내가 계속 궁금했던 그 다음 내용이 적혀 있는 일기장이라니.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우연이었다.

줄곧 그 다음 내용이 궁금했던 만큼 바로 읽고 싶으면서도 무서웠다.

아버지가 내 능력을 부정하는 내용이 적혀 있을까 봐.

겉으로는 날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셨지만, 사실은 날 싫어한 거면 어쩌나 두려웠다.

그래서 선뜻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페르데스의 행방을 알아보러 나갔던 하녀가 돌아왔다.

“지금 페르데스 님께선 스승님을 만나고 계신다고 합니다.”

“스승님?”

“네. 마조사 스승님이세요.”

아아, 그 스승님을 말하는구나.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페르데스의 마조사 선생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선생이 레오폴드 공작저에 기거하며 페르데스를 한창 가르쳐 줄 때, 나는 연합 왕실 아카데미에 있었고.

내가 졸업하고 돌아왔을 때, 선생은 이미 공작저를 떠난 후였다.

그래도 가끔 들러서 페르데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고 들었는데, 오늘이 그 날인 모양이다.

“지금 가시겠어요?”

으음, 어쩐다.

다른 때라면 그 선생과 인사도 할 겸 가 봤겠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아버지의 일기를 읽고 싶었다.

괜히 가서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아니야. 나중에 찾아뵙지, 뭐. 그 선생이 돌아가면 알려 줘.”

“알겠습니다, 아가씨.”

하녀가 다시 나가고, 나는 무의미하게 책장만 만지작거리던 손을 천천히 밀었다.

책장이 깃털처럼 가볍게 넘어갔다. 

약간 누렇게 변한 종이에 깨알 같이 적힌 검은 글씨들이 눈에 박혔다.

[내가 안 된다고, 아델을 기사 아카데미에 보내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올벤 경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델의 능력을 이대로 썩히기는 아깝다고, 어쩌면 여성 최초의 제국 기사단의 총사령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계속 날 설득했다.]

[제발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봐 달라고 매일 같이 찾아와 말하니 곤란할 지경이다.]

“아가씨, 제국 기사 아카데미에 가고 싶지 않으세요?”

아버지의 일기를 읽고 있으니 오래전, 올벤 경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사 아카데미에 가시면 저한테 배우는 것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검술 수업을 받으실 수 있어요.”

“그러니까 공작 각하께 기사 아카데미에 가고 싶다고, 본격적으로 검술 수업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려 보세요.”

그 말에 혹했던 나는 쪼르르 아버지에게 달려가 기사 아카데미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며 절대 안 된다고, 한 번 더 그딴 소리를 하면 두 번 다시 검을 잡지 못하게 금지령을 내리겠다고 말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화를 내는 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처음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한테 화를 내는 게 아닌지라 딱히 무섭거나 하진 않았다.

한데 나한테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화를 내니, 너무 무서워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올벤 경에게 달려가 그를 원망하며 눈물을 펑펑 흘렸었지.

아롱아롱 떠오른 과거의 추억이 아련하면서도 슬펐다.

아버지가 내 검술 실력을 줄곧 부정했다는 사실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혀 아프기도 했고.

만약 내가 남자로 태어났었다면, 아버지는 숨기거나 부정하지 않았겠지.

기꺼이 기사 아카데미에 보내 주고, 우리 아들이 이렇게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며 자랑하고 다니셨겠지.

[올벤 경이 아델이 딸이라서 그러는 거냐고 물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곡을 찔러서가 아닌,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고?

[만약 그 아이가 아들이었다고 해도 나는 자식에게 검을 가르쳐 주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약간 젖은 눈시울을 훔쳐 내며 빠르게 다음 문장을 읽었다.

[성별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곳이 레오폴드 공작가이며, 그 아이가 그 피를 진하게 이어받았다는 거였다. 축복이자 저주받은 피를.]

잉크가 약간 번지도록 꾹꾹 눌러쓴 글자에는 아버지의 진심이 보였다.

[만약 이곳이 레오폴드 공작가가 아닌 평범한 가문이었다면, 내가 보통 부모였다면 있는 힘을 다해서 그녀를 응원해 줬을 것이다.]

[기사 아카데미도 보내 주고, 좀 더 좋은 스승을 붙여 검술을 가르쳐 줬겠지. 내가 직접 가르쳐 줬을 테고.]

아버지가 이런 생각을 하고 계셨을 줄이야.

수년간 몰랐던 아버지의 진심이 절절하면서도 당황스러웠다.

무엇이 아버지를 이토록 고민하도록 만들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래서 숨 쉬는 것도 잊을 정도로 집중해서 일기장을 읽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 정확하게 언급된 건 없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아이만큼은 나처럼 되기를 바라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의 진심들만 더 알게 됐다.

[그러니 그 아이가 성년이 되고, 결혼 적령기가 되면 머나먼 타국으로 시집을 보낼 생각이다.]

날 머나먼 타국으로 보내겠다는 건, 내게 공작위를 줄 생각이 없으셨다는 의미였다.

데릴사위를 들일 마음도 없고.

[……그리고 두 번 다시 연락하지 말아야지. 설령 내가 죽더라도, 그 아이가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게 해야 한다. 영원히.]

게다가 두 번 다시 연락하지 않는 데다가, 영원히 레오폴드 공작가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겠다니.

의절 선언이나 다름없는 말에 나는 종잇장이 구겨지는 것도 모르고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도대체 왜, 왜, 왜, 왜 이런 생각을 한 거죠, 아버지?

땅 깊은 곳에 파묻힌 아버지의 시신을 끌어안고 묻고 싶을 정도로 답답했다.

[이 힘은 축복이자 저주다. 결국은 그 아이를 갉아먹어 지옥으로 떨어뜨릴 거다.]

아버지의 일기장에 적힌 내용들은 대부분 이해가 안 됐지만,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이 부분이었다.

여기 적힌 축복은 레드 드래곤의 축복이 틀림없었다.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육들은 레드 드래곤의 축복을 받은 덕분에 보통 사람보다 우월한 신체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가끔 그 능력 때문에 불편한 상황이 생기긴 하지만, 대체로 편리했다.

저주라고 지칭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버지는 어째서 이 힘이 축복이자 저주라고 언급하신 걸까?

지하실에 저주에 관련된 책이 잔뜩 있었던 걸 보면, 단순히 그렇게 여기는 수준에서 끝내는 게 아니라 해결하려고 노력하신 것 같은데.

“하아, 어렵다, 어려워.”

물음표를 마침표로 바꾸기 위해 일기장을 펼쳤는데, 오히려 물음표가 더 늘어났으니 한숨이 나왔다.

너무 머리가 아프기도 했고.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소파 등받이에 늘어지게 기댔다.

“어떻게 하면 답을 찾을 수 있으려나.”

아버지와 같이 일했던 관리들에게 물어볼까?

아니야. 그들이 뭔가 알고 있었다면, 진작 내게 말했겠지.

게다가 아버지께서 올벤 경에게도 진심을 터놓지 않은 걸 보면, 다른 가신들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혹시 역대 레오폴드 공작들이 쓴 기록을 보면 뭔가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별관의 기록 보관실로 향했다.

기록 보관실에는 역대 레오폴드 공작들의 기록과 공작가의 역사서 등, 가문의 중요한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뭐부터 보지?”

공작가의 역사서는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고.

역대 레오폴드 공작들이 이룬 업적도 지금은 필요 없는 내용이었다.

가지런하게 정렬된 자료들을 쭉 훑어보던 나는 제목이나 꼬리표도 없이 꽂혀 있는 파일철을 꺼내 펼쳤다.

“연간 영지 운영 계획서네.”

글씨체를 보아하니 아버지가 직접 작성하신 것 같았다.

이 역시 지금은 딱히 필요 없는 내용이었지만, 모처럼 꺼냈으니 쭉 훑어보고 있는데.

“제국 424년 12월 17일……?”

계획서 가장 아래 적힌 날짜가 눈에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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