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과연 벽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설렘과 기대, 그리고 걱정과 두려움이 끊임없이 교차했다.
나는 널뛰기를 하는 것처럼 쿵덕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갈라진 책장 사이로 들어갔다.
그러자 지하실 통로처럼 벽에 있던 촛대가 자동으로 켜졌다.
오로지 레오폴드 공작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니, 금은보화까진 아니더라도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게…… 뭐야.”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특별한 건 보이지 않았다.
이전 방의 절반 정도 되는 듯한 방에는 온통 책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지하실이 아니라 지하 서재라고 해도 되겠네.
아, 다른 게 하나 있긴 하네.
바로 양쪽 벽을 채운 책장들이 마주한 벽면에 걸려 있는 검이었다.
이것 말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게 있나 다시 방 안을 크게 훑어봤지만, 그게 전부였다.
나는 벽에 걸려 있는 검의 앞으로 다가갔다.
멀리서 볼 때는 단순히 장식용 검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아니었다.
“이건…… 아버지가 쓰시던 검이잖아.”
검 손잡이의 모양이 특이하기도 하고, 아버지가 이 검을 휘두르는 걸 자주 봤던 터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몬스터 토벌 같은 피 튀기는 전쟁터에 나갈 때마다 항상 이 검을 가져갔었다.
그건 마지막 몬스터 토벌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아버지와 같은 곳에 있었던 기사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황태자를 구하기 위해 몬스터와 치열하게 싸웠지만, 검이 두 동강 나는 바람에 참변을 당했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 검이 멀쩡한 모습으로 눈앞에 있으니 당황스러웠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해 봤지만, 확실히 아버지가 쓰시던 검이 맞았다.
혹시 아버지가 쓰시던 검은 이 검을 모방해서 만든 건가?
“하지만 저렇게 큰 퓨라는 구하기 힘든데…….”
검 손잡이에는 큼지막한 퓨라가 박혀 있었는데, 저렇게 큰 퓨라는 몇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내가 태어난 뒤로는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가짜 퓨라를 박은 검을 썼을 리도 없는데.
“어떻게 된 거지?”
온통 물음표뿐이니, 머리가 아팠다. 검 손잡이에 박힌 퓨라를 확인하면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아 검 손잡이를 잡으려는 그 순간.
파지직-
붉은 스파크가 튀면서 손바닥 전체에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윽!”
나는 손을 감싸 쥐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벌겋게 익은 손바닥 안쪽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소매로 대충 피를 닦아 낸 뒤, 다시 검을 쳐다봤다.
“방금 그건 뭐지?”
마법 결계인가?
아니면 다른 장치가 되어 있는 걸까?
검의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던 나는 검을 고정하고 있는 장식 아래에 작게 그려진 마법진을 발견했다.
눈에 익은 마법진.
예전에 아버지의 서랍에서 발견했던 마법진과 비슷하게 생겼다.
아무래도 이 마법진이 검을 보호하며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 주는 것 같았다.
그럼 이것도 고대 마법진인가?
페르데스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이곳까지 들어올 수가 없었다.
“내가 직접 그려서 보여 주면 되겠다.”
펜은 바로 찾았지만, 빈 종이는 보이지 않아 손에 잡히는 책의 여백에 마법진을 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마법진이 정교하고 어려워서, 그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펜을 내려놓았을 땐, 이미 모래시계가 한 바퀴 돈 후였다.
계획대로라면 지금 나가는 게 맞았으나, 아무런 궁금증도 해결하지 못하고 이대로 나가는 건 너무 아쉬웠다.
오히려 의문이 더욱 생긴 터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라도 좋으니 건질 게 없는지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검 말고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저 검이라도 가지고 가고 싶은데.”
어쩌면 황제가 노리는 물건이 저 검일 수도 있으니까.
나는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잡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마법진을 해제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이번에도 거부 반응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잡았……어?”
어떻게 잡을 수 있는 거지?
내가 하고도 얼떨떨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잡았다는 것에 의의를 두며 검을 꺼내 드는 순간.
[존재를 증명하라.]
“……!”
어둑한 방 안에 누가의 목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네 존재를 증명하라.]
나 말고 다른 존재가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당황스럽고 소름이 끼쳤다.
아무리 둘러봐도 그 존재가 보이지 않아 더욱 섬뜩했다. 발끝부터 송연한 기운이 올라왔다.
“누구냐!”
[존재를 증명하라]
괜히 큰소리를 쳤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오히려 소리는 점점 커졌고, 이제는 머리가 울릴 지경이었다.
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미간을 짚었다.
도대체 무슨 존재를 증명하라는 거지?
설마 내가 누군지 증명하라는 건가?
“내 이름은…… 아델 레오폴드.”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뭐든 해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다.
“레드 드래곤의 축복을 받은 레오폴드 공작가의 17번째 주인이자, 아그노스 레오폴드의 딸이다.”
이게 정답이었는지, 머리를 아프게 만들던 의문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후우.”
나는 크게 심호흡하며 손에 쥔 검을 내려다봤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퓨라가 아까보다 더 반짝이는 것 같았다.
“일단 나가야지.”
아직 아쉬움이 남았지만, 더 시간을 지체하는 건 정말 위험했다.
나는 마법진을 그린 책과 검을 챙겨 들고 지하실을 나왔다.
“돌아오셨군요, 아가씨.”
“알도르 경?”
그가 왜 지하실 문 앞에 있는 거지?
“혹시 제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린 거예요?”
“아닙니다. 한 시간 전쯤, 왔습니다. 그전에는 페르데스 님이 계셨고요.”
그러니까 페르데스와 교대로 이곳을 지키며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는 거네.
그 모습이 주인을 기다리는 커다란 대형견처럼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그들의 행동이 조금 미련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죠?”
“정확히 하루 하고 13시간이 흘렀습니다.”
생각보다 많이 흘렀네.
하긴 계획했던 것보다 오래 있었으니, 당연한 건가.
“제가 들어 드리겠습니다.”
“이것만 들어 주면 돼요.”
안 그래도 손바닥에 화상을 입어 물건을 잡는 게 불편했는데, 냉큼 검을 넘겨주었다.
검을 넘겨받은 알도르 경의 눈이 한순간 커졌다.
“이건 선대 공작 각하의…….”
“역시 바로 알아보네요.”
하긴 알도르 경은 진심으로 아버지를 존경했으니, 못 알아보는 게 이상했다.
멀리서 아버지가 검을 쓰시는 걸 지켜보기만 했던 나보다는 알도르 경이 검에 대해 더 잘 알 터.
“그 검, 아버지가 쓰시던 검이 맞나요?”
“…….”
알도르 경은 진지하면서도 신중하게 검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확실해요?”
“제 가문을 걸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 알도르 경?”
과연 이 이야기를 듣고도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버지가 자주 쓰시던 검, 황태자를 구하려고 애쓰시다 두 동강이 났대요.”
“……!”
전혀 몰랐던 사실인지 알도르 경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런데 어떻게 아버지가 쓰시던 검이 공작저의 지하실에 있는 걸까요? 그것도 이리 멀쩡한 모습으로.”
“…….”
알도르 경은 말없이 다시 검을 내려다봤다.
이가 빠진 곳 없이 잘 벼려진 칼날까지 세심하게 만지며 검을 꼼꼼하게 살펴본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그게 뭐죠?”
“이 검은 확실히 선대 공작 각하께서 쓰시던 검입니다.”
검이 두 동강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저렇게 확신하는 걸 보면, 아버지가 쓰시던 검은 확실하다는 의미였다.
“알도르 경.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경위를 자세히 조사해 주겠어요?”
“네, 아가씨.”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게, 특히 황실 쪽에선 절대 알지 못하게 은밀하게 조사해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 검은 이리 주세요.”
내가 손을 내밀자 알도르 경은 검을 내게 주려다 멈칫했다.
떨리는 눈동자가 내 손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뭘 그리 보…… 아, 맞다. 나 화상 입었었지.
그 사실을 새카맣게 잊고 손을 내밀었던 바보 같은 내 행동을 탓하며 황급히 손을 거뒀으나, 알도르 경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는 내 손목을 낚아채듯이 잡고, 손바닥을 보며 물었다.
“다치셨습니까?”
“조금…….”
“당장 침실로 돌아가십시오. 주치의를 부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고 말리고 싶었으나, 그럴 틈도 없이 알도르 경은 빠르게 사라졌다.
이거야 원. 괜히 걱정만 끼쳤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침실로 돌아갔다.
잠시 후, 알도르 경과 함께 주치의가 찾아왔다.
“표면만 화상 입은 거라, 약만 잘 발라 주시면 흉터 없이 말끔하게 나으실 겁니다. 물론 그동안 이 손으로 어떤 것도 하시면 안 됩니다.”
“그 말은 검도 잡으면 안 된다는 건가?”
“물론입니다. 식기를 잡는 것도 안 되며, 물이 닿아서도 안 됩니다.”
식기도 잡지 말라니.
그건 좀 불편할 것 같은데.
주치의는 내 손에 붕대를 감은 뒤, 화상 연고를 가지고 오겠다며 침실을 나갔다.
붕대 감은 손이 어색해서 괜히 손을 쥐었다가 펴는데 알도르 경이 물었다.
“도대체 지하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별일은 없었어요.”
내 말이 믿기지 않는지, 알도르 경이 뚫어지도록 날 쳐다봤다.
“정말이에요. 이건 그 검을 얻으려다 얻은 영광의 상처라고요.”
“상처에 영광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여간 정말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만 나가 봐요. 좀 쉬고 싶거든요.”
“……알겠습니다.”
“참, 제가 준 검은 두고 가요. 그리고 그 검에 대해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요.”
알도르 경은 고개를 끄덕인 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알도르 경은 검을, 주치의는 화상 연고를 남기고 떠났다.
피곤하다는 건 빈말이 아니라 진짜였다.
다른 공간에 있다가 현실로 돌아오니, 이미 지나간 시간이 피로가 되어 누적된 듯 몸이 축축 늘어졌다.
머리도 아팠고.
한숨 자고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