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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152/262)

158화

니콜 테시스가 떠나고, 나는 집사를 불러 마티나 영지로 가는 기차표를 끊어 달라고 부탁했다.

레오폴드 공작령의 공작저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일등석 표는 두 장을 끊으면 될까요?”

페르데스도 같이 돌아가는 건지 돌려서 묻는 거였다.

음. 일단은 같이 돌아갈까.

내가 지하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 내 역할을 대신해 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그렇게 하도록 해.”

집사까지 나가고, 공작령으로 돌아가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고 있는데 페르데스가 돌아왔다.

창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지는 게 보이는 늦은 오후였다.

“테시스 백작의 말이 맞았어.”

페르데스가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그 팔찌는 스미든 백작이 대신 구해 준 거야.”

“스미든 백작은 그 팔찌를 어디서 샀죠?”

“에클레어에서 샀더군.”

에클레어는 맞춤형 마법 액세서리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가게로 예약제로만 운영됐다.

“더 재미있는 건 스미든 백작이 에클레어에 그 마법 팔찌를 예약 주문한 게 두 달 전이라는 거야.”

“그 말은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했다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그대의 생일 선물로 주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지.”

아, 두 달 전이면 내 생일과 맞물리니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러고 보니 스미든 백작이 나한테 생일 선물을 보냈던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선물을 받아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만약 보냈다면, 그 선물에도 도청 마법 같은 이상한 게 걸려 있을 수 있으니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

“어디 가려고?”

내가 일어서자 페르데스가 덩달아 일어서며 물었다.

“스미든 백작이 저한테 생일 선물을 보냈는지 선물 장부를 확인해 보려고요.”

“아, 그거라면 확인해 볼 필요 없어. 그 남자는 그대한테 생일 선물을 보내지 않았거든.”

“그걸 페르데스 님이 어떻게 아세요?”

생일 선물을 받은 당사자인 나도 기억 못 하는데 그가 알고 있다는 게 의아해서 묻자, 페르데스는 픽 웃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알긴. 예전에 선물 장부를 봤으니까 알지. 그때 그대도 같이 봤었잖아.”

나도 같이 봤다는 건, 들어온 생일 선물들을 장부에 기입했을 때를 말하는 건데.

한 달 전의 일을, 그것도 훑어보듯이 잠깐 봤던 걸 아직도 기억하는 게 놀라웠다.

“내가 예상하기엔 스미든 백작은 그 팔찌를 그대의 생일 선물로 보내려고 했는데, 어떤 이유에서 보내지 못해서 테시스 백작을 통해 주려고 한 것 같아.”

나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른 황제파 귀족들에게 들어온 선물들도 확인해 봐야겠어요. 스미든 백작처럼 이상한 술수를 부렸을 수도 있으니까요.”

페르데스도 다시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그건 내가 할게. 그대는 달리 할 일이 많잖아.”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의 말대로 달리 할 일이 많기도 하고.

마법에 무지한 내가 직접 확인하는 것보다 페르데스에게 맡기는 편이 확실했다.

“페르데스 님 덕분에 그 팔찌에 도청 마법이 걸려 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네요. 정말 감사해요.”

“아니야. 오히려 도움이 돼서 내가 더 기뻐.”

페르데스는 조금 쑥스러운지 볼을 긁적였다.

“그럼 내일 당장 레오폴드 공작령으로 돌아가요.”

페르데스를 수도에 두고 가려다가 같이 가는 걸로 마음을 바꾼 건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 공작령으로 돌아가기 전에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어디요?”

“대답하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물론이죠.”

“혹시 부친이신 선대 레오폴드 공작께서 마법에 능통하거나 해박하신 분이었나?”

갑자기 왜 이런 걸 묻는 거지?

조금 뜬금없었지만, 어려운 질문은 아니니 바로 대답했다.

“아버지가 마법에 해박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능통하진 않으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마법에 해박하지도 않았다.

마법과 연관된 일을 할 때마다 아무것도 몰라서 마법사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셨으니까.

내 대답을 들은 페르데스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그래? 그럼 도대체 뭐지.”

“무슨 문제가 있나요?”

“문제가 있다기보다 그 서랍에 걸려 있던 잠금 마법진 말이야. 지금은 사라진 고대 마법진이었어.”

“고대 마법진이요?”

페르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현재 널리 쓰이는 마법진들은 고대 마법진을 좀 더 쓰기 편하게 응용한 거야. 고대 마법진은 효능은 좋지만, 마나가 많이 드는 등 상용화하기엔 문제가 많았거든.”

“그런데 아버지의 서랍에 그 고대 마법진이 걸려 있다는 거군요.”

“맞아. 그 고대 마법진이 얼마나 오래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쓰지 않은 지는 500년도 더 됐어.”

500년. 듣기만 해도 까마득한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500년도 전에 사라진 마법진을 어떻게 아셨던 걸까.

아니. 그걸 안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서랍에 잠금 마법을 건 마법사겠지.

“고대 마법진은 걸기 어려운 만큼 해제하기도 어려워. 스승님이 말하길 당사자 말고는 불가능하다고 하더군.”

“아버지는 항상 마탑에 속한 마법사를 고용하셨으니, 그 부분은 마탑에 물어보면 될 거예요.”

마법이 이상한 곳에 쓰이는 걸 막기 위해 마탑의 마법사들은 언제 어디서 무슨 마법을 사용했는지 상세하게 기록해야 했다.

그러니 아버지의 서랍에 잠금 마법을 건 마법사의 기록도 남아 있을 터.

“이미 물어봤는데, 없었어.”

“네? 그럴 리가요.”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몇 번이나 물어봤는데, 없었어.”

페르데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마탑에서 기록을 빠뜨렸거나.

아니면 아버지가 마탑에 등록되지 않은 무허가 마법사를 고용했거나.

“그래서 물어본 거야.”

둘 중 어느 쪽인지 고민하고 있는데.

“혹시 선대 레오폴드 공작께서 직접 서랍에 마법진을 그린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서 말이지.”

“네?”

덧붙여 나온 어이없는 말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장담컨대 아버지께선 고대 마법진이 뭔지도 모르셨을걸요?”

“하긴. 나도 스승님에게 물어보기 전에는 몰랐던 거니까.”

페르데스가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더욱 마탑에 가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봐야겠어.”

공작령에 돌아가기 전에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다더니 마탑인가 보네.

마법진에 대한 거라면 나 역시 궁금했던 터라 보내 주고 싶었지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죄송하지만 마탑은 다음에 가시고 이번엔 저와 함께 공작령으로 돌아가요. 페르데스 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거든요.”

“그래? 그럼 돌아가야지.”

무슨 일이냐고, 급한 거냐고 물어볼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고 곧바로 나온 대답이 약간 당황스러워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렇게 봐?”

“제가 뭘 부탁하려는 건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궁금해.”

“그런데 왜 안 물어보세요?”

“내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다 말해 줄 거잖아.”

그거야…… 그렇지.

“그리고 지금까지 경험해 본바, 그대는 물어본다고 다 대답해 주지 않으니, 먼저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어.”

묘하게 체념한 듯한 말투가 미안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죄송해요.”

“죄송할 게 뭐가 있어. 그만큼 조심스러운 성격이라는 거니 좋은 거지. 그리고 나는 그런 그대를…….”

목소리가 급격하게 줄어들더니, 그는 휙 고개를 돌리며 일어섰다.

“아, 덥다.”

그리고 손부채질하며 딴청을 피웠다. 

언뜻 보이는 그의 귓불과 목선이 붉었다.

“아직 3월인데 벌써 이렇게 덥다니. 올해 여름은 엄청 덥겠네.”

“…….”

“참, 내일 떠난다고 했지? 그럼 얼른 준비해야겠네. 나 먼저 짐 챙기러 갈게.”

페르데스는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제 할 말만 빠르게 한 뒤, 밖으로 나갔다.

그가 쏟아 낸 말 때문에 정신이 없는 것도 있지만.

가장 내 혼을 쏙 빼놓은 건, 목소리가 급격하게 줄어들었을 때 그가 했던 말이었다.

“나는 그런 그대를…… 좋아해.”

“…….”

나는 왜인지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럴 땐 보통 사람보다 우월한 신체 능력이 썩 도움이 되지 않았다.

* * *

공작령으로 돌아온 다음 날.

나는 30분짜리 모래시계와 회중시계를 챙겨 들고 공작저의 지하실로 들어갔다.

어두운 통로도, 서재를 연상시키는 방도 예전에 왔던 모습 그대로였다.

심지어 체르노서가 쓴 걸로 추정되는 피의 글씨도 그대로 있었다.

“저건 나중에 지워야겠네.”

보기 흉한데다가 냄새도 역했다. 

체르노서의 피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나는 본격적인 작업을 하기 전,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멈췄네.”

지하실에 들어오기 전만 해도 멀쩡하게 작동했는데, 지금은 시곗바늘이 헛돌고 있었다.

설마 모래시계도 안 되는 건 아니겠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모래시계는 제대로 작동했다.

“모래시계가 한 바퀴 돌면 나가야지.”

주어진 시간이 한 시간 남짓밖에 되지 않는 만큼, 1분 1초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우선 그곳부터 가 볼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오로지 레오폴드 공작만 들어갈 수 있는 성스러운 장소.

나는 뒤집은 모래시계를 탁자 위에 올려 두고 주변을 크게 둘러봤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다른 곳으로 통하는 문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곳이 아닌가?

그럴 리가 없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통로는 하나밖에 없으니까. 다른 길 같은 건 없었다.

필시 숨겨진 비밀 통로가 있다고 확신한 나는 벽이나 책장을 유심히 살펴봤다.

“있다.”

마침내 벽에서 공작의 반지가 들어갈 만한 작고 동그란 틈을 발견한 나는 거기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드르륵, 쿵-

그러자 육중한 소리와 함께 눈앞의 벽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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