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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화 (151/262)

157화

도청 마법이라니. 

당황스러운 말에 나는 황급히 팔찌를 집어 들고 이리저리 확인했다.

니콜도 궁금했는지 사슴처럼 목을 쑥, 빼고 팔찌를 쳐다봤다.

손목이 닿는 안쪽 부분에 마법진이 작게 그려져 있긴 했지만, 마법 팔찌인 만큼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냥 봐서는 도청 마법이 걸려 있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페르데스가 아무 이유 없이 저런 말을 할 리가 없으니, 도청 마법이 걸려 있는 건 확실할 터.

“이게 어떻게 된 거죠, 테시스 백작?”

“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테시스 백작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벌떡 일어섰다.

“도, 도청 마법이라니! 그런 게 걸려 있는 주,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누가 부자지간 아니랄까 봐 말을 더듬는 게 니콜 테시스랑 똑같네.

“저, 정말입니다! 정말로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표정이나 말투, 그리고 행동만 보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페르데스처럼 연기력이 뛰어난 것일 수도 있으니까.

페르데스가 테시스 백작에게 물었다.

“그럼 이 팔찌를 어디서 샀는지 말해.”

테시스 백작이 엉거주춤 다시 앉으며 대답했다.

“구, 구입처는 모릅니다.”

“팔찌를 선물한 당사자가 구입처를 모른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저, 정말입니다! 저도 스미든 백작에게 대신 구해 달라고 한 터라 어디서 사, 샀는지는 모릅니다.”

스미든 백작이라면 황제파 귀족이었다. 

즉, 이번 일에 황제가 연관되어 있다는 의미.

“잠깐만, 잠깐만요.”

니콜 테시스가 두 손을 휘휘 내저으며, 한층 작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정말 도청 마법진이라면 지금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상대 쪽에서 전부 훔쳐 듣고 있다는 거 아닌가요?”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 응접실에는 마나 차단 마법이 걸려 있으니까.”

“아, 다행이네요.”

니콜 테시스는 진심으로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페르데스가 다시 테시스 백작에게 물었다.

“스미든 백작이 저 팔찌를 구해 준 게 확실하겠지?”

“물론입니다! 제가 공작 각하께 축하 선물로 드릴 마법 액세서리를 구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먼저 나서서 구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인지는 확인해 보면 알겠지.”

지금 당장 알아볼 생각인지 페르데스가 일어섰다.

“제가 도와드릴 건 없나요?”

“됐어. 이 정도는 나 혼자 알아볼 수 있으니까, 그대는 여기 일을 마무리하도록 해.”

페르데스는 그 말을 남기고 휙,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고, 응접실에는 약간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나는 도청 마법이 걸린 팔찌를 물끄러미 내려다봤고, 테시스 백작은 안절부절못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건 니콜 테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와 테시스 백작의 눈치를 동시에 살피더니,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지는 정말로 도청 마법에 대해 전혀 아시는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공작 각하.”

“그건 공자의 부친이라 편을 드는 건가?”

“아, 아니요! 그, 그런 것이 아니라…….”

“농담이야.”

조금 전만 해도 반신반의했는데, 페르데스가 확인하러 간다고 했을 때, 그의 눈동자가 전혀 흔들리지 않는 걸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백작도 저처럼 스미든 백작에게 이용당한 것 같군요.”

“공작 각하……처럼요?”

“네. 저 역시 암흑 상단에 이용을 당한 것 같거든요.”

나는 뺨에 손을 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프라시스 후작의 뒤통수를 친 배후가 저냐고 물었지요.”

“…….”

“아닙니다. 제가 프라시스 후작의 뒤통수를 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럼 그 많은 마법 물품들은 어디서 구하셨는지…….”

“코스모스 상단이라는 곳에서 구입했습니다. 혹 제 말이 의심된다면 계약서를 보여 드리죠.”

내가 당장이라도 계약서를 가지러 갈 것처럼 일어서자, 테시스 백작이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아닙니다. 각하를 믿고 있으니,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어머, 절 믿는다고요? 방금까지는 의심한 것 같은데…….”

“아, 아닙니다! 그, 그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런 거지 절대 각하를 의심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많이 당황했는지 넓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 모습이 보기 안쓰럽기도 하고, 이 정도면 충분히 압박한 것 같으니 이쯤 해서 마무리를 지을까.

“꼴사납게 이용당한 게 소문나서 좋을 건 없으니, 우리 서로 이번 일은 묻도록 하죠.”

그리 말하며 눈앞에 문제의 팔찌를 내려놓았다.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감히 내게 도청 마법이 걸린 팔찌를 선물한 걸 공론화시키겠다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숨은 의미를 알아들은 건지 테시스 백작은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컨대 아무한테도 이 일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귀족들에게 가문은 자존심이고 명예였으며 목숨이니, 가문의 이름을 걸고 한 맹세는 믿을 수 있었다.

“그럼 프라시스 후작이 범인을 찾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한 건 어떻게 할 건가요?”

“글쎄요. 그 부분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으니, 안타깝지만 후작 각하를 도와드릴 수가 없을 것 같군요.”

바로 말 바꾸는 거 봐.

“크흠.”

웃겨서 웃었더니 조금 부러웠는지 테시스 백작은 크게 헛기침을 하며 내가 내려놓은 팔찌를 쳐다봤다.

“그럼 이 팔찌는…….”

“아, 이건 혹시 모르니 제가 들고 있겠습니다.”

“그, 그러시겠습니까.”

손가락이 허공을 휘젓는 걸 봐서 팔찌를 다시 가져가고 싶은 것 같았지만, 그렇게는 안 되지.

만약의 사태를 위해 증거물은 내가 보관하는 게 맞았다.

나는 팔찌를 다시 상자에 넣으며 말했다.

“그럼 테시스 공자의 일을 마무리 지어 볼까요.”

내가 말을 꺼내긴 했지만, 할 일은 없었다.

이 다음부터는 오로지 니콜 테시스의 몫이었기에 그를 쳐다봤다.

“후우.”

니콜 테시스는 울렁이는 마음을 가다듬으려는 듯 크게 심호흡한 뒤, 진지하게 말했다.

“아버지께선 제 능력을 확인해 보고 싶으니, 두 달 안에 빈 물류 창고를 채울 계약을 따오라고 말씀하셨죠.”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지만.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로 창고를 채웠을 뿐만 아니라 테시스 상단에서 그토록 바라던 퓨라 운송권도 따냈습니다.”

호오, 테시스 상단에서 퓨라 운송권을 탐냈었구나.

처음 알았네.

하긴 테시스 상단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퓨라의 운송권을 가져간 적이 없으니 탐낼 만도 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도 약속을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

테시스 백작의 얼굴이 한순간 흐려졌다.

그는 내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했으니 지켜야지. 백작가로 돌아가는 즉시 가신들을 불러 모아서 널 정식 후계자라고 선포하겠다.”

“아니요. 후계자 자리는 필요 없습니다.”

“그게 무슨…….”

“전 애초에 후계자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원한다고 생각하는 건, 순전히 아버지와 형님의 착각이었죠.”

어느새 목소리의 떨림이 완전히 사라졌다.

니콜 테시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결연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바라는 건 그 누구의 간섭도 없는 완전한 자유입니다.”

“……!”

“그러니 앞으로는 제가 무얼 하든 간에 신경 쓰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 * *

니콜 테시스의 폭탄선언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는지, 테시스 백작은 반쯤 넋이 나간 상태에서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갔다.

반면 니콜 테시스는 모든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해 보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니콜 테시스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각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전부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니야. 나 역시 영식의 도움을 받았으니,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제가 도움 되었다니, 정말 기쁘네요.”

“그런데 정말 후계자 자리를 거절해도 괜찮겠어? 테시스 백작가와 상단을 전부 가질 좋은 기회인데, 욕심나지 않아?”

“욕심이 전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죠.”

니콜 테시스가 쓰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그걸 가지기 위해선 형님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수많은 질투와 시기, 그리고 음모들을 견뎌야 하는데…… 전 그걸 견딜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구나.”

“하하, 죄송합니다. 기껏 도와주셨는데, 이런 한심한 말이나 하고…….”

“아니야. 한심하다고 생각한 적 없으니까, 그런 자책은 안 해도 돼.”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르니, 니콜 테시스가 어떤 걸 선택하든 간에 내가 평가할 수는 없었다.

“공작 각하께는 큰 은혜를 입었으니,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무슨 일이든 발 벗고 나서겠습니다.”

나는 거절하려다 그에게 부탁할 만한 일이 떠올라 다른 걸 물었다.

“혹시 글로아 섬이라고 알아?”

“글로아 섬이요? 어디 있는 섬인가요?”

“음, 잠깐만.”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 주는 게 나을 것 같아, 지도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펼쳤다.

“여기야.”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지점을 가리켰다.

“너무 작은 섬이라서 대륙 지도에는 표시가 안 되어 있는데…… 역시 처음 듣지?”

“네.”

“그럼 이곳은 알아?”

근처에 있는 루미아 섬을 가리키자 니콜 테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여기 테시스 상단 지부가 있을까?”

“아니요. 그곳은 저희 상단이 없습니다. 대신 루미아 섬에서 오래 터를 잡은 다른 운송 상단이 있죠.”

“혹시 그 상단 사람들이랑 친해?”

“전부 다 친한 건 아니지만, 선장님과는 친한 사이입니다.”

선장이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건데 월척이었다.

“혹시 그 선장에게 글로아 섬까지 배를 운항해 달라고 할 수 있을까?”

“배를요?”

“응. 글로아 섬에 가야 할 일이 있는데, 이곳까지 가는 배를 구하는 게 어렵네.”

“아, 그런 거라면 부탁해 보겠습니다. 공작 각하의 부탁이니 굳이 제가 부탁하지 않아도 들어주실 겁니다.”

“아니. 내가 부탁한 건 비밀로 해 줘.”

“네? 하지만 글로아 섬에 가실 일이 있다고…….”

“그곳에 가는 건 내가 아니야.”

“그럼 누가 가는데요?”

나는 대답하는 대신 니콜 테시스를 빤히 쳐다봤다.

내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알아들은 그는 기함하며 되물었다.

“서, 설마 저보고 그곳에 가라는 겁니까?”

“맞아.”

“아니, 잠깐만, 왜…….”

“영식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말했었지?”

불과 10분 전에 했던 말을 되짚어 주자, 니콜 테시스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런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우선 배를 글로아 섬까지 운항해 줄 수 있는지부터 확인해 줘. 다음 계획은 그걸 확인한 뒤에 말해 주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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