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화 (150/262)

156화

모른다는 건 황후에게 그 물건에 대해서 듣지 못했다는 걸까.

아니면 황후도 그 물건이 뭔지 모른다는 걸까.

어느 쪽인지 물어보려는데 페르데스가 먼저 말을 덧붙였다.

“황후가 말하길 체르노서도 황제한테 어떤 물건을 가지고 와 달라고 명령만 받았을 뿐, 그 물건이 뭔지 듣지 못했대.”

“뭔지도 모르는 물건을 가지고 오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요.”

“나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황후가 그렇게 말한 데다가, 달리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그렇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그건 그렇지.

죽은 체르노서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하여간 황후는 체르노서한테 그 물건이 뭔지 알게 되면 바로 알려 달라고 했다더군.”

“그럼 2황자가 황후한테 보낸 편지에는 그 물건과 관련된 내용이 적혀 있겠네요.”

“아마도. 하지만 황후는 지난 10년간 체르노서에게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없다고 했어.”

즉, 문제의 편지도 받지 못했다는 의미.

체르노서가 내게 이런 쪽지를 남긴 걸 봐서 황후에게 편지를 보낸 건 확실했다.

그런데 받지 못했다는 건, 누군가 중간에서 그 편지를 가로챘다는 의미.

범인은 그 호위 기사겠지.

체르노서는 그 호위 기사를 믿고 있었으니까…… 잠깐만.

‘믿었을 리가 없어.’

만약 체르노서가 호위 기사를 믿었다면 이런 쪽지를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내게 쪽지를 남긴 것부터 이상했다.

만약 지하실에서 무사히 살아서 돌아왔다면, 황후에게 편지가 잘 전해졌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어째서 쪽지를 남긴 거지?

혹시 무한의 미궁에 갇혀 돌아오지 못할 걸 알았던 걸까?

아니야. 그럼 처음부터 지하실에 들어가지 않았을 거야.

체르노서는 그 누구보다 겁이 많고, 자기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니까.

아무리 황제의 명령이라고 할지라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고, 황후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다른 방법을 연구했을 것이다.

“황제가 가지고 오라고 한 물건이 뭔지 짐작 가는 게 있어?”

페르데스의 질문에 혼자만의 생각에서 깨어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하지만 황제가 그 물건을 아직 손에 넣지 못한 건 확실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황제가 노리고 있는 그 물건이 그가 레오폴드 공작가를 집어삼키려고 했던 이유와 깊은 연관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 * *

마음 같아선 당장 공작저의 지하실로 달려가서 황제가 체르노서를 시켜서 반드시 가지고 오라고 한 물건이 뭔지 찾아보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발목을 잡는 문제점들이 너무 많았다.

황제가 원하는 물건이 뭔지 모른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지하실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이 다르다는 거였다.

실종된 체르노서를 찾으러 공작저의 지하실에 들어갔을 때, 나는 잠깐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의 시간은 무려 이틀이나 지났다.

시간의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정체불명의 물건을 찾으러 가는 건, 지금까지 세운 계획들을 전부 수포로 돌리는 바보 같은 짓이었다.

하여 나는 지하실에 들어가는 대신 레오폴드 공작가의 역사서나 기록들을 뒤지는 등, 지하실에 황제가 탐낼 만한 물건이 뭐가 있는지 찾아봤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 봐도 단서가 될 만한 건 나오지 않았다.

역시 지하실로 직접 들어가서 확인해 봐야 하는 건가.

그러려면 최소 이틀은 시간을 비워야 하니, 눈앞에 닥친 일들을 빠르게 해치우는 와중 니콜 테시스와 약속한 날이 됐다.

정확히는 창고 문제로 테시스 백작과 만나는 날이었다.

“어떡해, 어떡해.”

그것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레오폴드 공작저를 찾아온 니콜 테시스는 안절부절못하며 응접실을 서성거렸다.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은데 조금 정신 사납네.

“정신 사나우니까 얌전히 앉아 있어, 니콜.”

마치 내 마음을 읽은 듯 페르데스가 지적하자, 니콜은 약간 의기소침하며 페르데스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부루퉁한 목소리로 불만을 토로했다.

“아버지를 뵈는 건 오랜만이라 긴장돼서 그런 건데, 너무 하세요.”

“그냥 앉으라고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뭐가 너무해?”

“제 기분을 이해해 주지 못하신다는 거잖아요. 명색의 동업자인데 이해 좀 해 주세요.”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

새삼 느끼는 거지만, 페르데스와 니콜 테시스는 상당히 사이가 좋은 편이네.

한편의 만담을 듣는 것처럼 티격태격 싸우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공작 각하. 테시스 백작님께서 오셨습니다.”

“힉.”

부친이 왔다는 말에 니콜 테시스의 얼굴은 수프 한 그릇 얻어먹지 못한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툭, 건드리면 그대로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렇게 긴장되면 잠깐 나가서 긴장을 풀고 와도 돼.”

페르데스의 배려에 니콜 테시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괜찮겠어?”

“네, 네. 저, 정말 괜찮으니, 아, 아버지에게 드, 들어오라고 하세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지만,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내버려 두었다.

“…….”

잠시 후, 테시스 백작이 들어오자 니콜 테시스는 차마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린 두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어서 오세요, 테시스 백작.”

이제 공작이니 반말을 해도 되지만, 내 아버지뻘 되는 연장자니 적당히 말을 높여 대우해 줬다.

“제국의 찬란한 별이신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테시스 백작은 여기서 가장 신분이 높은 페르데스를 향해 먼저 인사한 뒤, 내게 인사했다.

“공작위를 승계받으신 걸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레오폴드 공작 각하. 이건 제 작은 축하 선물입니다.”

테시스 백작이 준 상자 안에는 퓨라가 촘촘하게 박힌 마법 팔찌가 들어 있었다.

마법 액세서리는 상당히 비쌀 텐데, 무리했네.

그만큼 나한테 잘 보이고 싶다는 거겠지.

나는 별 감흥 없는 눈으로 팔찌를 바라봤으나 페르데스는 아니었다.

“…….”

그는 눈썹을 살짝 구기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팔찌, 잠시 볼 수 있을까?”

“물론이죠.”

조금 의아한 요구였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 순순히 넘겨주었다.

그때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니콜 테시스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며 결연한 눈으로 테시스 백작을 쳐다봤다.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아버지.”

눈빛과 달리 부질없이 떨리는 목소리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테시스 백작은 그런 그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나와 페르데스를 향해 고개 숙여 사과했다.

“제 아들놈이 그동안 두 분께 상당한 민폐를 끼쳤다고 들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왜 그런 오해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테시스 공자는 저희에게 민폐를 끼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도움이 됐지요.”

“애써 아들의 허물을 포장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각하.”

“포장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말하는 겁니다. 테시스 공자와 저는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좋은 사업 파트너입니다.”

“맞습니다! 공작 각하와 정식으로 사업 계약도 맺었습니다!”

니콜 테시스가 지원 사격을 하려는 듯 대화에 끼어들자, 테시스 백작이 인상을 쓰며 그에게 말했다.

“페르데스 님과의 친분을 빌미로 공작 각하께 계약해 달라고 떼를 쓴 걸 내가 모를 것 같으냐.”

“아, 아닙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아버지!”

“시끄럽다. 이런 일로 공작 각하와 황자 전하께 민폐를 끼치다니. 내가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구나.”

“친분을 앞세워서 계약을 따내면 부끄러운 일인가요?”

내가 무심하게 말을 툭, 던지자 부자가 동시에 날 쳐다봤다.

나는 찻잔을 들며 테시스 백작에게 재차 물었다.

“사업가에게 있어서 친분 역시 중요한 사업 수단인 걸로 아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테시스 백작?”

테시스 백작은 잠시 주춤했다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친분 역시 중요한 사업 수단인 건 맞지만, 그래도 억지를 부려 없던 걸 만들어 내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니콜 테시스는 억지를 부린 적이 없습니다. 제가 먼저 사업 제안을 했거든요.”

“……!”

한순간 테시스 백작의 눈이 커졌다.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니콜 테시스를 바라봤다. 내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눈빛이다.

그사이 긴장이 조금 풀린 건지, 니콜 테시스는 한층 안정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아버지. 제가 빈 물류 창고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공작 각하께서 먼저 사업 제안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테시스 백작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는 뭔가 생각하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눈을 뜨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혹 공작 각하께서…… 프라시스 후작 각하의 뒤통수를 친 암흑 상단의 배후였습니까?”

느닷없이 프라시스 후작의 이름이 당황스러웠지만, 조금도 티 내지 않고 되물었다.

“백작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군요.”

“며칠 전, 프라시스 후작 각하께서 자신의 뒤통수를 친 암흑 상단을 찾아야 한다며 제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 쓴맛을 봤으면 얌전히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범인을 찾는답시고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닌 건가.

정말이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남자였다.

“마법 물품을 잔뜩 가지고 있는 상단이나 사람을 알게 되면 꼭 자신에게 알려 달라고 신신당부하더군요.”

그래도 위조 금화에 대해선 말하지 않은 모양이네.

하긴 정신이 똑바로 박혀 있다면, 위조 금화에 대한 걸 함부로 떠들고 다닐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런데 니콜이 공작 각하와 계약한 물건이 마법 물품과 퓨라라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퓨라는 그렇다 쳐도 마법 물품은 레사에서 담당하는 물품이 아니니까요.”

“…….”

“당연히 두 분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암흑 상단에 속은 니콜이 공작 각하와 황자 전하께 민폐를 끼친 거라고 생각했는데…… 각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반대였군요.”

프라시스 후작의 괜한 짓 때문에 대화의 흐름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생각하고 있는데.

“나도 질문 하나만 하지, 테시스 백작.”

그때까지 팔찌를 뚫어지도록 보던 페르데스가 그 팔찌를 테시스 백작 쪽으로 던지듯 내려놓으며, 물었다.

“자네는 무슨 생각으로 도청 마법이 걸린 팔찌를 그녀에게 선물로 준 거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