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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149/262)

155화

작위 승계식이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었다.

수많은 귀족들과 황족들이 보는 앞에서 황제에게 보검을 하사받고, 내가 공작이 됐음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게 전부였다.

보통 귀족들은 황제가 자신을 위해 직접 주관해서 무언가를 해 준다는 것에 의의를 두며 영광으로 생각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황제에 대한 존경심이나 충성심 같은 게 전혀 없으니, 그딴 걸 영광으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귀찮았고, 황제가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 건지 궁금했다.

페르데스가 잘하고 있을지 걱정되기도 했고.

“아델 레오폴드 공작에게 황실의 검을 내리겠노라.”

그래도 황제에게 보검을 하사받을 때는 감정이 조금 울컥했다.

황제에 대한 존경심이나 그런 이유에서가 아닌, 어떻게서든 이 자리를 얻기 위해 발악했던 지난날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수한 고통과 악몽, 그리고 괴로운 경험들이 쌓인 후에야 얻은 자리인 만큼 만감이 교차했다.

“비로소 레오폴드 공작가가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아, 짐은 아주 기쁘다. 이제…….”

보검을 받은 내가 자리로 돌아가자 황제는 위엄 있게 연설을 시작했다.

기껏해야 10분 남짓으로 끝날 줄 알았던 연설은 30분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경청해서 듣던 귀족들도 하나둘씩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게 보였고, 황제의 눈을 피해 딴짓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좋겠군. 이상이다.”

짝, 짝짝짝-

그래서일까. 마침내 황제의 연설이 마침표를 찍자, 그 어느 때보다 우렁찬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 역시 지루한 연설이 끝난 걸 진심으로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황제의 연설을 끝으로 작위 승계식은 끝났다.

본래라면 이 뒤에 작은 축하연이 열렸으나, 페르데스의 백치병이 다시 도진 걸 핑계로 축하연은 취소했다.

“공작위를 승계받으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각하.”

“돌아가신 선대 레오폴드 공작 각하도 이제 편히 눈을 감으실 겁니다.”

“모두 고맙네.”

귀족들의 쏟아지는 축하 인사에 가볍게 대응하고 대연회장을 벗어나려는데,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진짜 공작이 됐네.”

바로 루센 공작이었다.

“공작이 된 걸 진심으로 축하해, 레오폴드 공작.”

그는 다른 귀족들처럼 가볍게 대응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기에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제게 하대를 할 생각입니까?”

“흐음?”

“루센 공작이 말한 대로 진짜 공작이 됐으니, 그만한 예우를 해 줬으면 합니다.”

내 요구에 루센 공작의 눈동자가 유난스럽게 반짝거렸다. 마치 재미난 장난감을 찾은 어린아이의 눈동자였다.

“내가 큰 결례를 했군요.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길 바랍니다, 레오폴드 공작.”

장난스럽게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달리 말투와 행동은 너무 정중해서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아닙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는 겁니까? 축하연까지 취소하고.”

“4황자 전하께 가는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백치병이 다시 발병했다고 들었습니다. 이것 참, 걱정이 크겠군요.”

“네. 그래서 얼른 가 보려고요.”

“저도 4황자 전하의 안위가 무척 걱정되니, 같이 가도록 하죠.”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내가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자 루센 공작이 싱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이전에 말했을 텐데요. 4황자 전하께 관심이 있다고.”

“농담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4황자 전하께서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한 것뿐입니다.”

“그랬나요?”

“네. 아, 물론 레오폴드 공작에게도 지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니 황자 전하를 질투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가 질투를 한다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신 상태였다.

루센 공작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 전혀 페르데스 님을 질투하지 않습니다.”

나와 페르데스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걸 보여 주고자 일부러 이름을 언급했다.

그러자 루센 공작이 난감하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이것 참, 마음을 숨기려고 너무 애쓰시는 것 같아, 보기 안쓰럽군요.”

도대체 누가 어떤 마음을 숨긴다는 건지.

황당했지만,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아 그 부분은 언급하지 않았다.

“페르데스 님을 걱정해 주는 마음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누군가를 만나실 상태가 아니실 테니, 면회는 다음에 오시죠.”

“다음이 언제일까요? 설마 레오폴드 공작령까지 가야 하는 겁니까?”

“아니요. 당분간은 수도에 있을 예정이니, 수도의 공작저로 오시면 됩니다.”

나야 영지의 일 때문에 수도와 공작령을 자주 오고 갈 테지만, 페르데스는 계속 수도에 둘 생각이었다.

그래야 내가 없는 동안 내 역할을 대신해 줄 테니까.

페르데스에게 처음 손을 내밀었을 때만 해도 무사히 공작위를 승계받으면 내보낼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어쩌다 보니 그를 계속 곁에 두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계획에도 그와 함께할 생각을 하고 있으니, 조금 아이러니했다.

이래서 사람 일은 모른다고 하는 걸까?

“그것 참 아쉽군요. 모처럼 레오폴드 공작령에 놀러 가려고 했는데.”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공작령으로 초대하겠습니다.”

평생 그 기회가 찾아올 일은 없을 테지만.

“알겠습니다. 그럼 전하를 뵙는 건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죠.”

“이해해 줘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공작과 프로페테스 4세와 상당한 친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프로페테스 4세는 지난달, 왕위에 오른 필로스 왕자를 일컫는 명칭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언급되니 나는 돌아서다 말고 다시 루센 공작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친 그는 눈매를 초승달처럼 접으며 웃었다.

“요즘 프로페테스 4세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인다는 보고가 있어서 그런데…… 혹시 아는 바가 있습니까?”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벌써 냄새를 맡은 건가.

그렇다는 건 황제 쪽도 냄새를 맡았을 수 있다는 의미.

이런. 좀 더 ‘그 일’을 빨리 터뜨려서 그들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려야겠네.

“글쎄요. 아카데미에서 친분을 쌓긴 했지만, 그뿐이라서요. 근황은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그렇습니까.”

“프로페테스 4세가 어떻게 했길래, 그러는 겁니까?”

“아직은 알아보는 단계인지라 말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역시나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이런.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요. 4황자 전하께서 애타게 기다리고 계실 테니 어서 가 보세요, 레오폴드 공작.”

“……그럼 이만.”

찝찝했으나 그를 붙잡고 이야기를 더 나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으니, 돌아섰다.

그리고 페르데스가 기다리는 봄의 궁으로 향했다.

봄의 궁은 평소보다 다소 어수선했다. 

나와 마주친 궁인들은 처음에는 흠칫 놀랐지만, 금방 표정을 갈무리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인사했다.

끝까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궁인들이 있었는데, 바로 페르데스의 침실을 지키는 호위 기사들이었다.

“각하.”

내가 침실 문앞에 서자 그중 신분이 높은 자가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와 말했다.

“잠시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뭐지?”

“송구하오나 황자 전하께서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시는 바람에 잠시 저희의 호위를 벗어나신 적이 있습니다.”

호위가 아니라 감시겠지.

“다행히 그동안 아무 일도 없으셨습니다. 다친 곳도 없으시고요.”

“…….”

“정말 송구합니다, 각하. 저희가 좀 더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호위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원무부에 말해 두도록 하지.”

그들이 감시를 소홀히 해 준 덕분에 페르데스가 무사히 황후를 만나고 돌아올 수 있었으니 처벌하고 싶지 않았지만, 규율상 그냥 넘어가는 건 말이 안 됐기에 원무부에 처벌을 넘겼다.

내게 보고했던 호위 기사가 엄숙하게 고개를 숙이곤 물러났다.

“페르데스 님. 저예요.”

나는 노크를 하며 왔다는 걸 알린 뒤, 침실 문을 열었다.

“왔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달려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 역시 백치 연기의 일부라는 걸 알기에 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의 등을 토닥였다.

“전부 나가.”

그리고 뒤따라 들어오려는 자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궁인들이 나간 후에야 내게서 떨어진 페르데스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백치 연기도 오랜만에 하니까, 할 게 못 되네.”

“그런 것치고 잘하시던데요.”

“뭐. 내가 워낙 연기력이 뛰어난 편이니까.”

다른 사람이 저렇게 말하면 무척 재수 없을 텐데, 페르데스가 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는 페르데스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그래서 황후에게 대답은 들었나요?”

“이걸 들었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니, 그렇다기보다 조금 이해가 안 되는 말을 들어서.”

“무슨 말을 들었는데요?”

“음, 그러니까…….”

페르데스는 어떻게 말할지 정리하는 듯,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일단 황후가 말하기를 체르노서가 공작저의 지하실에 들어간 건 황제가 어떤 물건을 가져다 달라고 했기 때문이야.”

“물건이요?”

“응. 아주 중요한 물건이니 꼭 가져다 달라고 했다던데.”

황제한테 아주 중요한 물건이 황궁이 아닌 레오폴드 공작저의 지하실에 있다고?

“그 물건이 뭔데요?”

궁금해서 묻자 페르데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나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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