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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화 (147/262)

153화

알도르 경이 내 명령에 따르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내보이는 경우는 대부분 내 안전과 관련된 거였다.

가령 내가 위험한 일을 한다거나, 그의 호위를 거절하는 경우.

그러나 이번에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엔 알도르 경이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저렇게 말하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왜 그러죠? 혹시 내일 개인적인 일정이라도 있나요?”

알도르 경의 성격상, 휴일도 아닌데 개인적인 일정을 잡아 뒀을 리가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그러자 알도르 경의 표정이 순간 흐려졌다.

그는 뭔가 생각하는 듯 시선을 약간 아래로 내리더니, 이내 다시 날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아가씨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가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지만, 차마 내게 말할 수가 없어 마지못해 명령에 복종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다른 때라면 그의 기분과 사정을 고려해서 보내지 않았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말고 이번 일을 부탁할 사람이 없으니까.

“내일 떠나려면 할 일이 많을 테니, 이만 가 봐도 좋아요.”

기분이 다소 찝찝했지만, 어쩔 수 없이 무시하고 알도르 경을 내보냈다.

“쯧쯧.”

그렇게 알도르 경이 나가자마자 페르데스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왜 그러세요?”

“저 남자가 불쌍해서.”

“알도르 경이요?”

“그래.”

페르데스가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삐딱하게 턱을 괬다.

“그대가 이런 쪽에 눈치가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정말이지, 불쌍해.”

이번엔 알도르 경이 아닌 그 자신이 불쌍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이겠지.

“그런데 정말로 저 남자가 왜 저런 말을 했는지 모르는 거야?”

“페르데스 님은 그 이유를 아세요?”

“당연히 알지.”

페르데스가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답했다.

“내일 그 소년을 데리고 몬테솔로 가면 그대의 공작위 승계식을 보지 못하게 되잖아.”

수도에서 몬테솔까지는 마차를 타고 이틀 정도 거리니, 왕복으로 치면 나흘이 걸렸다.

거기에 내가 따로 부탁한 소년의 조사까지 하려면, 최소 닷새 후는 지나야 수도에 돌아올 수 있다는 의미.

내 공작위 승계식은 사흘 뒤에 열리니, 알도르 경이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승계식을 보는 건 무리였다.

그렇긴 하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네.”

정곡을 찌르는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고작 공작위 승계식 하나 때문에 그랬다는 게 믿기지 않을 뿐이에요.”

“그대한테는 고작일지 몰라도 그 남자한테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던 거지.”

그런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다르니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동시에 페르데스도 알도르 경과 같은 생각이면 어쩌나 걱정돼서 슬쩍 물었다.

“페르데스 님도 제 공작위 승계식을 보고 싶으세요?”

그러자 페르데스가 가자미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쳐다보며 되물었다.

“내게도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군.”

역시 눈치가 빠르다니까.

“별 건 아니고, 저를 대신해서 황후에게 여기 적힌 내용을 물어봐 주셨으면 해요.”

나는 문제의 쪽지를 페르데스에게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직접 하고 싶지만, 황제의 감시가 심해지는 바람에 괜히 나섰다가 이상한 오해를 받을까 봐 페르데스 님에게 부탁드리는 거예요.”

물론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니지만, 가장 큰 이유이긴 했다.

어쩌면 공작위 승계식을 일찍 연 것도 나를 그의 영역에 두고 감시하려고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지난 생과 달리 지금의 레오폴드 공작령은 내 영역이었으니까.

기껏 영지에 심어 두었던 첩자들이 그를 배신하거나 암살당했으니, 더욱 나를 레오폴드 영지로 보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황제의 감시를 받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 괜찮겠어?”

“괜찮아요. 페르데스 님에 대한 감시가 느슨해지는 그때를 노릴 거니까요.”

“언제 감시가 느슨해지는데?”

“언제긴요. 바로 작위 승계식 때죠.”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페르데스의 입에서 곧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그러고 보니 황후랑 황비들은 작위 승계식에 참석할 수가 없지.”

“네. 하지만 황제는 반드시 참석해야 해요.”

작위 승계식을 여는 사람이 황제인데 그가 불참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 외 다른 황족들은 선택 사항이었으나 황제가 참석하는 만큼,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웬만하면 참석했다.

“감시 1순위인 제가 눈앞에 있으면 황제의 모든 관심은 제게 쏠릴 거예요. 승계식에는 수많은 귀족들이 참석하니 더더욱 절 집중해서 감시하겠죠.”

혹 내가 귀족들과 작당 모의를 하지는 않는지, 등등 눈에 불을 켜고 나를 감시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페르데스의 감시는 소홀해질 터.

“그때를 노려서 황후와 접촉하시면 돼요. 페르데스 님이라면 가능하시잖아요.”

“그렇긴 한데, 내가 아무 이유 없이 작위 승계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은데.”

“이유야 만들면 되죠.”

“어떻게?”

“그전에 페르데스 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말해.”

“혹시 백치병 연기, 다시 해도 괜찮으시겠어요?”

“……뭐?”

갑작스러운 요구에 당황한 듯 페르데스가 눈만 깜빡이자 나는 설명을 덧붙였다.

“계속 백치인 척 연기하라는 건 아니에요. 그날 하루만, 저와 함께 황궁에 들어가자마자 연기를 시작하시면 돼요. 물론 황후를 만날 때는 제외하고요.”

“하?”

말없이 내 이야기를 듣던 페르데스가 실소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 참, 단순히 황제의 감시를 피하고 싶어서 내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아니었군.”

“그래서 제 부탁, 들어주실 건가요?”

“그래.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그러는 편이 그대에게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도와줘야지.”

잠깐이라고 해도 다시 백치 연기를 해야 하는 만큼, 혹시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래도 그대의 공작위 승계식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쉽네.”

“그다지 의미 없는 의식이니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나중에 더 좋은 걸 보실 수 있을 거예요.

나는 그 말을 삼키며, 여전히 아쉽다고 투덜대는 페르데스를 달랬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아델의 명령대로 몬테솔로 떠날 준비를 끝내고 방을 나서는 알도르의 앞에 뜻밖의 인물이 나타났다.

“지금 가는 건가?”

바로 페르데스였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알도르는 겉으로는 무덤덤하게 인사했지만, 속으로는 그가 온 이유를 생각했다.

분명 그는 아델의 공작위 승계식을 보는데, 자신은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에 대해 약올리려고 온 거겠지.

그것 말고 페르데스가 이렇게 찾아올 이유가 없어, 당연히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그녀의 공작위 승계식을 못 봐.”

예상했던 것과 다른 뜻밖의 이야기가 나오자 알도르는 약간 당황하며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흠, 흠.”

그와 눈이 마주친 페르데스는 조금 머쓱한 듯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자네만 승계식을 못 보는 건 아니니, 너무 섭섭해하지 말고 다녀오도록.”

“……왜 그런 이야기를 저한테 해 주시는 겁니까?”

친한 사이라든가,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해 줄 수 있는 말이었지만, 아니었다.

눈만 마주치면 물어뜯는 앙숙까진 아니더라도 서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관계이건만, 알도르는 페르데스가 이런 위로의 말을 해 주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다시 알도르를 쳐다봤다.

“불쌍해서.”

말뿐만 아니라 시선에도 연민과 동정이 묻어났지만, 그 대상이 알도르에게만 국한된 건 아닌 것 같았다.

“너무 불쌍해서 그랬어.”

그는 그 자신도 불쌍하게 여기고 있구나.

페르데스의 입가에 번지는 씁쓸한 미소를 보고 알아챈 알도르도 쓰게 웃었다.

그는 처음으로 페르데스에게 진한 동질감을 느꼈다.

* * *

체르노서가 보낸 걸로 추정되는 쪽지 소동이 일어났던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쪽지는 우선 황후의 대답을 들은 뒤, 어떻게 할지 방향성을 정할 거라 일단 묻어 두고 다른 일을 신경 썼다.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 작위 승계식 날이 찾아왔다.

대외적으로 중요한 날인 만큼, 새벽부터 일어나 말끔하게 단장했다.

화려한 드레스가 아닌 레오폴드 기사단장들이 입는 붉은 제복을 입고, 머리는 높게 틀어 묶었다.

화장은 거의 하지 않은 듯 옅게 하고 장신구는 커프스단추와 브로치를 제외하고 일절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끝낸 뒤, 어디 이상한 곳이 없는지 거울을 보며 최종 점검을 하고 있는데, 페르데스가 찾아왔다.

그는 이미 작위 승계식에 참석할 준비를 완벽하게 끝낸 뒤였다.

평소와 달리 말끔하게 머리를 올리고, 단정한 정장을 입어서 그런지 그는 한층 더 성숙해 보였다.

내가 알던 여린 소년의 느낌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이 대견하면서도, 약간 섭섭해서 그를 빤히 쳐다봤다.

“왜 그렇게 봐? 이상해?”

“그럴 리가요. 너무 근사해서 본 거예요.”

“크흠.”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페르데스가 귓불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그대도 멋져. 이렇게 차려입으니까 공작 같아.”

“진짜 공작이긴 하죠. 공작위를 승계받았으니까요.”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알아요. 장난이었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나는 웃으며 페르데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실까요, 황자 전하.”

페르데스도 웃음으로 화답하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러죠, 레오폴드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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