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2화 (146/262)

152화

색이 약간 바랜 종이에는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어머니가 내 편지를 받았는지 확인해 주길 바랍니다, 아델 레오폴드 영애.]

내 이름이 언급됐다는 것만 빼면 내용 자체는 별것 없었다.

오히려 내가 왜 이런 걸 확인해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 이 필체의 주인이 체르노서의 것이라는 걸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정말 체르노서의 필체가 맞는 건가?

혹시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어 몇 번이나 확인해 봤는데 확실했다.

하지만 체르노서가 이 쪽지를 썼다고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필체는 얼마든지 따라 할 수 있으니까.

인장이라도 찍혀 있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었고.

게다가 체르노서는 죽었으니, 정말 그가 보낸 게 맞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표정이 별로 안 좋네.”

내가 쪽지를 유심히 보고 있자, 페르데스가 물었다.

“쪽지에 안 좋은 이야기라도 적혀 있어?”

“여기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페르데스에게 쪽지를 보여 주었다.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페르데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이게 뭐야? 누가 이런 장난을 한 거야?”

“2황자 전하요.”

“……뭐?”

페르데스의 표정이 단숨에 심각해졌다.

나가지 않고, 같이 이야기를 듣던 알도르 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자식이 왜 아델, 그대한테 편지를 보내는 건데?”

“2황자 전하께서 어째서 아가씨에게 쪽지를 보낸 겁니까?”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나온 말이었다.

그래 놓고 그들은 놀라더니 서로를 쳐다봤다.

“아까부터 왜 자꾸 아델을 아가씨라고 부르는 거야?”

“어째서 아가씨의 성함을 부르시는 겁니까?”

이번에도 말이 동시에 나왔다.

이에 그들은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쓰더니, 입을 꾹 다물고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서로를 쳐다봤다.

이번엔 페르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쪽이 먼저 대답해.”

“……아가씨께서 공작이라는 호칭보다는 그쪽이 편하다고 계속 아가씨라고 불러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나랑 이유가 같네.”

그게 마음에 안 드는지 페르데스가 인상을 팍, 썼다.

그건 알도르 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다 그만하세요.”

이대로 있다간 괜한 싸움이 날 것 같아 말렸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

알도르 경은 내게 고개 숙여 사과했지만, 페르데스는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쪽지의 내용을 재차 확인하더니, 내게 물었다.

“아무리 봐도 2황자가 보냈다는 흔적이 없는데, 그 자식이 보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지?”

“필체예요.”

“그 자식의 필체도 알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요.”

알기만 하는 게 아니라 똑같이 따라 쓸 수도 있었다.

첫 번째 생에서 체르노서를 대신해서 이곳저곳에 초대장이나 편지를 보내느라 대필했던 게 습관처럼 남아 있는 탓이었다.

“그럼 여기에 적혀 있는 어머니는 황후인가.”

“2황자가 적은 게 맞다면 그렇겠죠.”

“하긴 필체는 얼마든지 따라 할 수 있으니까.”

페르데스는 ‘필체 감정을 받아 봐야 하나…….’하고 중얼거리며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일단 종이는 고급이네. 평민들이 쓸 만한 종이는 아니야. 색이 약간 바랜 걸 봐서 오래되기도 했고.”

그는 나와 같은 감상평을 내리며 말을 덧붙였다.

“만약 그 자식이 죽기 전에 이 쪽지를 썼고, 그걸 누군가 가지고 있다가 이제야 그대한테 전해 주는 거라면 종이의 색이 약간 바랜 게 이해되긴 하는데…….”

“그럼 보관한 사람이 귀족은 아닐 거예요. 귀족이라면 황자가 전해 달라고 부탁한 쪽지의 색이 바래게 함부로 보관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3달이나 지나서 그대에게 전해 줄 리도 없고.”

필체는 체르노서의 것이지만, 그가 보낸 게 맞는지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당사자에게 이 쪽지를 보낸 사람이 당신이 맞는지 물어볼 수도 없으니,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 쪽지를 가져온 사람은 지금 어디 있죠?”

쪽지를 가져온 사람을 만나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수밖에.

“홀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응접실로 데리고 와요.”

“네, 아가씨.”

알도르 경이 나가고, 그 뒤를 이어 나와 페르데스는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 먼저 도착해서 다시 쪽지에 대한 열띤 토론을 나누고 있는데, 알도르 경이 그 사람을 데리고 왔다.

“아,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앳된 소년이었다.

많이 쳐 봐야 17살 정도 됐으려나.

“아가씨를 만나 뵙게 돼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소년은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파들파들 떨며 인사했다.

공작이 아닌 아가씨라는 호칭을 쓰면서.

그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페르데스에겐 전혀 인사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고의가 아니라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건데…….

“이름이 뭐지?”

“쟈, 쟝이라고 합니다. 성은 없습니다.”

성이 없다는 건 평민이라는 의미였다.

나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거나, 페르데스를 못 알아보길래 혹시나 했는데 역시 평민이었구나.

나야 눈에 띄는 붉은 머리 덕분에 웬만하면 다 알아봤지만, 페르데스는 눈동자 말고 황족의 특색이 없으니 그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나는 곁눈질로 흘끗,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혹시 이걸로 그가 기분 나빠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

그는 담담한 눈으로 소년, 쟝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탐색하는 시선이기도 했다.

“이쪽으로 와서 앉으렴.”

쟝은 쭈뼛거리며 내가 가리킨 소파 겉에 걸쳐 앉았다.

그리고 차와 쿠키가 나왔을 때도 어찌 먹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하다가, 우리가 먹는 걸 보고 따라 먹었다.

물론 차를 마시는 소리가 나거나, 쿠키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등 예절은 형편없었다.

평민이니 당연히 예절이 형편없는 거겠지만…….

“평민 맞네.”

페르데스가 옆에 앉은 나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툭, 던지듯이 말했다.

나는 그의 의견에 동감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혹 평민인 척 연기하는 건 아닌지 의심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 이 쪽지를 가져온 사람이 너라고?”

내가 문제의 쪽지를 내밀며 묻자 쟝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어디서 이 쪽지를 얻었지? 누가 준 건가?”

“아니요. 유리병에 담긴 상태로 떠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상세하게 설명해 볼래?”

“그것이…….”

쟝은 말을 약간 더듬으며 그가 쪽지를 습득하게 된 경위를 자세하게 말했다.

“……전부입니다.”

“흐음.”

물을 긷다가 우연히 유리병이 담긴 쪽지를 주웠단 말이지.

다소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게다가 쟝이 물을 길으러 갔던 곳은 람바야 강으로, 그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레오폴드 영지에 흐르는 포에마 강이 나왔다.

물론 중간에 합류하는 다른 강도 있으니 포에마 강에서 이 유리병이 흘러나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체르노서가 죽기 전, 포에마 강에 이 쪽지가 담긴 유리병을 흘려보냈을 가능성이!

“이 쪽지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했니?”

“아니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쪽지 내용을 몰라서 말할 수도 없지만요…….”

“쪽지 내용을 모른다고?”

“네에. 저는 글을 몰라요.”

“그럼 어떻게 이 쪽지가 나한테 보내는 거라는 걸 알고 가지고 온 거지?”

강에서 주웠다면 누가 알려 준 것도 아닐 텐데?

“쪽지에 레오폴드라는 단어가 적혀 있길래 혹시나 해서 가져온 거예요! 글은 모르지만, 여관에 오신 손님들이 알려 주셔서 귀족 가문은 조금 알거든요.”

“그렇구나.”

조금 특이하지만, 아예 없는 경우는 아니었다.

“그럼 날 찾아온 것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겠네?”

“네. 그냥 휴가를 받아서 왔어요.”

“그렇구나. 언제까지 휴가지?”

“일주일 받았으니까 이제 나흘 남았어요!”

쟝이 사는 몬테솔에서 수도까지 이틀 남짓 걸리니, 쪽지를 발견하고 다음 날 바로 출발했다는 의미였다.

“그럼 몬테솔까지 데려다줄 테니, 오늘은 이곳에서 푹 쉬렴.”

“네, 네?”

내 말에 쟝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제 주제에 어찌 감히 이렇게 좋은 저택에서 머물겠습니까!”

“괜찮아. 나한테 쪽지를 가져다준 중요한 사람인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그, 그럼 취, 취소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선 취소가 아니라 사양하지 않는다고 해야 맞는데.

글을 모른다더니, 단어 선택도 이상했다.

“저…… 그런데요, 아가씨.”

“어려워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뭐든 말하렴.”

“그것이…….”

하기 어려운 말인지 쟝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내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 보상은 그게 다인가요?”

“풋.”

겁에 질린 듯하면서도 당돌한 요구에 페르데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 역시 웃겨서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아니지. 내일 돌아갈 때 챙겨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이만 가서 푹 쉬렴.”

“네, 네! 아가씨,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쟝은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한 뒤, 하녀를 따라 응접실을 나갔다.

나는 쟝이 나가자마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알도르 경을 불러 명령했다.

“그 소년에게 감시를 붙이세요, 알도르 경. 혹시 누군가와 접촉하는 듯한 낌새를 보이면 즉시 내게 보고하고요.”

“네, 아가씨.”

“그리고 내일 알도르 경이 저 소년을 직접 몬테솔에 데려다주면서 소년의 신상과 그가 쪽지를 주웠을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조사해 주세요.”

“…….”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왜 그래요, 알도르 경?”

의아해서 묻자, 알도르 경이 약간 흐린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제가 꼭…… 가야 하는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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