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몬테솔은 제국의 수도에서 말을 타고 이틀 정도 가야 하는 작은 마을로, 수도로 가는 여행자들을 상대로 하는 숙박업이 발달했다.
“쟝, 물 좀 길어 오렴!”
“네!”
쟝은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여관의 직원이었다.
그는 늘 그랬듯이 물을 길어 오기 위해 물지게를 메고 강으로 향했다.
강물에 물통을 넣자 물고기와 자갈 등 불순물들도 딸려 들어왔다.
“에라이. 귀찮다. 정말 귀찮아 죽겠다아아…… 응? 이게 뭐지?”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불순물들을 빼내던 쟝은 손바닥만 한 유리병 안에 돌돌 말린 종이를 발견했다.
어느 집 아이가 장난이라도 친 걸까.
쟝은 물이 들어가지 않게 꼭 닫아 둔 마개를 열고, 종이를 꺼내 펼쳤다.
종이에는 글자들이 어지럽게 적혀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쟝은 글을 거의 읽을 줄 몰랐다.
제 이름과 일하는데 필요한 간단한 단어들만 읽고 쓸 줄 알았다.
제국 내에서 유명한 귀족 가문도 읽을 줄 알았는데, 이 역시 여관에 온 여행자 손님들에게 배운 거였다.
“레오폴드.”
덕분에 쟝은 문장 중간쯤에 적힌 레오폴드라는 단어는 확실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 뒤에 황제라는 단어가 적혀 있는 것 같은데, 이건 확실하지 않았다.
하여간 레오폴드라는 단어가 적혀 있는 걸 봐서 레오폴드 공작가에 대해 적혀 있는 쪽지인 것 같았다.
“며칠 뒤에 레오폴드 공작 각하의 작위 승계식이 있다고 하더니, 그에 관련된 쪽지인가?”
어쩌면 레오폴드 공작에게 가져다주면 큰 보상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보상. 생각만 해도 설레는 말이었다.
이게 만약 진짜 레오폴드 공작과 관련된 쪽지라면 더더욱 좋은 보상을 줄 터.
쟝은 쪽지를 돌돌 말아 다시 유리병에 넣은 뒤,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 *
법원에 허가서를 제출하고, 곧바로 레오폴드 공작령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갑자기 작위 승계식을 하는 바람에 수도에 남았다.
수도에서 공작령으로 가는 데만 최소 나흘이 걸리는데, 일주일 안에 왕복하는 건 도저히 무리였다.
작위 승계식 초대장은 황제가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남은 시간 동안 작위 승계식 때 입을 의상을 준비하고, 수도의 공작저를 내 스타일로 새로 꾸몄다.
이제 이 공작저의 주인은 완벽하게 나였으니까.
내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었다.
인테리어 전문 업자들에게 맡길까 싶다가도, 내가 직접 꾸미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세세하게 지시했다.
가장 먼저 바꾼 곳은 당연히 집무실이었다.
그런 다음 응접실도 조금씩 손봤다.
그렇게 이곳저곳 신경 쓰다 보니 어느새 나흘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고, 내 연락을 받은 페르데스가 수도의 공작저에 도착했다.
“공작위를 승계받은 걸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레오폴드 공작.”
페르데스가 날 보자마자 한 말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았지만, 페르데스의 인사는 상당히 뜻깊었다.
그가 성심성의껏 날 도와준 덕분에 이룰 수 있는 결과였으니까.
그리고 페르데스의 말과 표정에선 진심이 느껴졌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자 전하.”
나 역시 진심으로 웃으며 페르데스의 축하 인사를 받았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페르데스는 주변을 크게 둘러보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못 본 사이에 집무실 내부가 많이 바뀌었네.”
“그래요?”
아직 조금밖에 못 바꿨는데, 그렇게 티가 많이 나는 건가?
“예전에는 그냥 공작가의 저택이구나, 라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공작의 느낌이 많이 묻어나.”
그런가. 나는 주변을 둘러봤지만, 내 눈에는 비슷하게 보였다.
마치 집무실에 처음 온 사람처럼 구경을 하던 페르데스가 소파에 앉으며 내게 물었다.
“도대체 황제를 어떻게 설득했길래, 그 작자가 공작위 승계식을 해 준다는 거야?”
“설득한 적 없어요. 저도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미리 말 안 해 줘서 섭섭하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더니 작위 승계식을 해 준다고 한 거예요.”
“진짜? 나한테 말한 것만 들어 보면 절대 안 해 줄 것 같았는데, 웬일이래.”
역시 페르데스에게 연락을 했구나.
하긴 황제의 성격상 안 했을 리가 없지.
“황제가 뭐라고 하던가요?”
“뻔하지, 뭐. 왜 아델 레오폴드에게 공작위를 넘겨준 거냐. 지금 날 배신하는 거냐 등등 막 뭐라고 하더라.”
페르데스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래서 내가 본래 영애의 자리라 준 건데 뭐가 문제냐고 다시 물었어. 그랬더니 아무 말도 못 하고 막 내 이름만 부르며 화를 내는 거 있지?”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어떻게 했긴. 영애 축하 파티 준비를 해야 한다며 끊자고 했지. 그리고 통신 반지는 물에 담가서 고장 냈어.”
페르데스는 그리 말하며 반짝이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 모습이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았다.
“잘하셨어요.”
“칭찬을 받으니까, 좋네.”
역시 내 칭찬을 바랐던 건지, 페르데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진짜 강아지 같네.
강아지라고 하기엔 덩치도 크고, 완벽한 성인이니 개라고 하는 게 맞겠지만…… 개 같다는 건 너무 욕 같으니 그냥 강아지로 지칭해야지.
“영애가…… 아차, 실수.”
페르데스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영애라는 호칭이 입에 붙어서 실수했네. 공작이라고 부르는 게 어색하기도 하고.”
“그럼 지금처럼 사적인 자리에선 편하게 제 이름을 부르세요.”
“……이름을?”
“네. 어차피 저도 페르데스 님의 이름을 부르잖아요. 그러니 편하게 이름을 부르셔도 돼요.”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흠, 흠.”
페르데스는 크게 헛기침을 하더니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아델.”
“네, 페르데스 님.”
내가 대답하며 쳐다보자 페르데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손을 가져다 대면 데일 것 같은 얼굴이었다.
“괜찮으세요, 페르데스 님?”
“아, 응. 괜찮아. 괜찮고말고.”
표정은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그런데 황제는 도대체 왜 공작위 승계식을 열어 주는 걸까?”
페르데스가 유연하게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귀족들의 시선 때문에? 공작위 계승식을 열어 주지 않는다는 건 레오폴드 공작가와 불화가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꼴이 되니까 그런 건가?”
“그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닐 거예요.”
“그 말은 짐작 가는 이유가 있다는 거네.”
“꼭 그런 건 아니고, 이것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게 있긴 해요.”
“그게 뭔데?”
“몬스터 토벌이요.”
몇 년 전부터 몬스터들이 기승을 부리는 바람에 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몬스터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했던 거지.
검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바보 같은 황태자를 데리고서.
“아델, 토벌이 끝나면 한 달가량 쉴 예정이니 그때 같이 남쪽으로 휴양이나 떠날까.”
문득 아버지가 토벌을 떠나기 전,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난 뭐라고 했더라.
레오폴드 공작령은 어쩌고, 태평하게 휴양을 떠나냐고 타박했었지.
……설마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새삼 떠오른 잔인한 과거의 기억이 심장을 파고들며, 이성을 좀먹었다.
이대로는 이성을 잃고 마구 소리를 지를 것 같아, 차를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몬스터 토벌이라.”
그동안 내가 던진 말을 소가 되새김질하듯이 곰곰이 되짚어 보던 페르데스가 물었다.
“그게 작위 승계식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거야?”
“몬스터 토벌을 할 때, 토벌대장은 실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황실에서 신뢰하는 자가 맡죠.”
그래서 아버지가 토벌대장을 맡았던 거고.
“그런데 저와 사이가 안 좋다고 알려진 상황에서 대뜸 몬스터 토벌대장직을 맡기면, 다른 귀족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겠죠.”
“그렇겠지. 황제가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그대한테 맡겼다고 생각할 거야. 가령…….”
“사고로 가장해서 절 죽이려는 속셈이라던가.”
페르데스가 미처 말을 잇지 못하자 내가 대신 말했다.
그러자 페르데스의 표정이 약간 흐려졌다.
“그대는 죽는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것 같아.”
“걱정하지 마세요. 진짜 죽을 생각은 없으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페르데스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몬스터 토벌 때문에 작위 승계식을 열어 그대와 사이가 괜찮다는 걸 귀족들에게 보여 주려고 한다는 거지?”
“확실한 건 아니에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지.”
그건 그렇지.
“만약 정말로 황제가 몬스터 토벌을 생각하고 있고, 그대를 토벌대장으로 선정하려고 한다면 거절해. 무조건 거절해야 해.”
거절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강조하는 페르데스의 말투와 표정에서 나에 대한 걱정이 듬뿍 묻어났다.
나는 안심하라는 의미로 옅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황제는 몬스터 토벌을 하고 싶어도 절대 하지 못할 테니까.”
“무슨 소리야?”
“음, 그게…….”
똑똑-
내 계획을 전부 다 말해 주진 못해도, 적당히 알려 줘도 될 것 같아 말하려는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알도르 경이었다.
그는 내게 다가와 유리병을 내밀었다.
유리병 안에는 돌돌 말린 종이가 있었다.
“이게 뭔가요?”
“공작저 입구에서 서성이던 한 소년이 가지고 있던 유리병입니다.”
“소년이요?”
“네. 그 소년이 말하길 이 종이에 레오폴드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건 글자를 몰라서 읽지 못했지만, 그 단어만큼은 확실하게 읽었다고 했습니다.”
“확인하고 가지고 온 건가?”
페르데스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자, 알도르 경은 그를 보며 대답했다.
“아가씨께서 먼저 읽어 보시는 게 좋다고 판단하여 확인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잘했어요, 알도르 경.”
나는 알도르 경이 준 유리병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이상한 마법 같은 건 걸려 있지 않았다.
하긴 그 정도는 알도르 경도 확인하고 가져온 거겠지.
그럼 안심하고 열어도 될 것 같아 마개를 열고 종이를 꺼내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