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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144/262)

150화

“오랜만에 뵙습니다, 레오폴드 영애.”

우리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은 다름 아닌 황제의 보좌관, 콜린 브래들리 자작이었다.

황제가 알레테이아에서 있었던 일을 듣고 사람을 보낸 모양이네.

그런데 어쩌지. 이미 공작위를 승계받았는데.

작위를 수여하는 건 황제의 권한이었지만, 승계는 오로지 귀족들의 권한이었다.

제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마음대로 결정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런데 잠깐만. 레오폴드 ‘영애’라고?

“호칭을 정정해 주십시오, 브래들리 자작. 이분은 레오폴드 공작 각하이십니다.”

알도르 경이 날 대신해서 브래들리 자작에게 말했다.

그러자 자작이 약간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이내 허리를 깊이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공작 각하. 제가 소식이 늦었습니다.”

새빨간 거짓말.

만약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그 정도 놀라는 걸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까 그 관리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중얼거리거나 정말이냐고 의심하며 되물었겠지.

한데 그다지 놀라지 않고 선뜻 받아들인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공작위를 승계받으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내가 반말을 하자 자작의 입꼬리가 약간 실룩거렸다.

그의 딸뻘이 되는 내가 반말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달라질 건 없지만.

나이보다 중요한 게 작위였고, 신분이었다.

뭐,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존댓말을 쓰며 어느 정도 존중은 해 줄 수 있지만…… 그것도 사람에 따라 다른 법이지.

황제 편인 사람을 존중해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여긴 무슨 일이지?”

“황제 폐하께서 공작 각하를 찾으십니다.”

“나를? 무슨 일로?”

“거기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영애를 만나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모시고 오라는 황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설마 이미 승계받은 작위를 거둬 가려는 건 아닐 테고.

불가능하기도 했지만.

공작위 승계식을 해 주려는 것도 아니라면,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제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은 것에 대한 화풀이.

어쩌면 페르데스에게 이미 연락해서 이미 화풀이를 했을 수도 있었다.

다시 한번 느끼는 거지만, 그를 수도로 데리고 오지 않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작 각하.”

공작이 돼도 황제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건 몹시 짜증 나고 성가신 일이었다.

“그래. 가자꾸나.”

어서 빨리 황제를 끌어내려야겠다고 다짐하며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 * *

“공작이 된 걸 진심으로 축하하네.”

황제궁에서 대면한 황제의 첫 마디였다.

황제한테 축하의 인사를 듣게 될 줄이야.

황당하면서도 웃겨서 조소가 저절로 나왔다.

“뭐가 재미있어서 웃는 거지?”

“아, 송구합니다. 폐하.”

나는 조소를 그린 표정 그대로 대답했다.

“설마 폐하께 축하한다는 인사를 들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해서……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황제가 두 팔을 뻗으며 다소 과장되게 말했다.

“당연히 축하해야 하는 일인 것을. 물론 내게 말도 없이 그런 건 조금 섭섭하다네.”

“폐하께서 제가 공작이 되는 걸 썩 반기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숨겼었는데, 그리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편안하네요.”

나는 황제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했다는 걸 유감없이 표현했다.

어차피 공작위는 내 손에 들어왔으니까.

내가 반역에 가까운 범죄를 치지 않는 이상 황제는 내게서 작위를 빼앗을 수 없었다.

물론 그런 범죄를 저지를 거지만…… 그땐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빼앗을 생각도 하지 못할 테고.

“허허, 이것 참. 사소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군.”

황제는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가 공작이 되는 걸 반기지 않았던 게 아니라 걱정했던 거네. 자네도 알다시피 레오폴드 공작가는 대대로 제국의 검이라고 불리는 가문이니까. 여자가 감당하기는 다소 힘든 자리지.”

“폐하께선 이 자리를 여자는 감당하기 힘들지만, 백치병이 있는 4황자 전하는 감당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

내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자, 웃고 있던 얼굴에 약간 실금이 갔다.

그래. 당신은 웃고 있는 얼굴보다 그렇게 찡그리는 게 더 어울려.

“농담이었습니다, 폐하.”

기분이 좋은 만큼 활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4황자 전하의 백치병도 이제 말끔하게 나으셨으니, 폐하께서 전하께 따로 작위를 수여하신다면 훌륭히 그 역할을 수행하실 겁니다.”

한마디로 페르데스에게 작위를 주고 싶다면, 이 자리를 탐내지 말고 그가 직접 주라는 의미였다.

“그래. 안 그래도 그 부분도 생각하고 있었네.”

황제 정도면 숨겨진 의미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허허,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래도 걱정이긴 하군. 여자의 몸으로 제국의 검 노릇을 잘할 수 있을지 참 걱정이야.”

“레오폴드 공작가라는 명성에 누가 되지 않게 최선을 다 할 테니, 너무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

“이것 참, 든든하군. 자네가 그렇게 말해 주니 한시름 덜었어.”

겉으로는 나를 인정해 주는 것처럼 계속 말했지만, 아니었다.

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단 한 번도 나를 공작이라고 부르지 않은 게 그 증거였다.

“다른 귀족들은 아직 자네가 공작위를 승계받은 걸 모르니, 모든 귀족들이 알 수 있게 작위 승계식을 열어야겠군.”

그런 주제에 작위 승계식은 열어 준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다음 주 금요일에 작위 승계식을 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지?”

“그렇게 빨리 말입니까?”

“그래. 작위 승계식이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니고, 늦장 부릴 필요는 없지.”

그렇기는 하지만, 상대가 황제이다 보니 의심이 들었다.

귀족들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작위 승계식을 연다고 해도 페르데스와 결혼한 후의 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열고자 하는 목적이 뭘까.

필시 다른 목적이 있을 텐데, 그게 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긴 황제가 기를 쓰고 레오폴드 공작가를 집어삼키려고 하는 이유도 모르는데, 이걸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체르노서를 왜 공작저의 지하실에 밀어 넣었는지도 아직 모르고.

“왜 그러지?”

내가 대답이 없자, 황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다음 주에 특별한 일정이 있나?”

“그게 아니라 지금부터 귀족들에게 초대장을 돌리려면 바쁠 것 같아서 잠시 고민했을 뿐입니다.”

“하하, 걱정하지 말게. 궁내부에서 알아서 해 줄 테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궁내부 관리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벌써 들리는 것 같네.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그럼 다음 주 금요일에 작위 승계식을 하는 걸로 하지.”

“폐하께서 절 이렇게 생각해 주시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계속 거짓말을 하려니, 입 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차를 마시고 싶었지만, 눈앞에 있는 차는 독극물이나 다름없으니 마른침만 삼키며 버텼다.

페르데스가 이상한 약을 먹고 쓰러진 이후, 황궁에서 나온 건 물 한 잔도 먹고 싶지 않았다.

“작위 승계식을 하려면 준비할 게 많으니,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심해서 돌아가게.”

당연히 붙잡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황제는 순순히 날 보내 주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그는 정말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 * *

아델이 나간 후.

“흐음.”

황제, 다이몬은 신음하며 소파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는 지금까지 아델을 마냥 순하고 말 잘 듣는, 바보 같은 영애라고 생각했었다.

선대 레오폴드 공작이 죽기 전, 몇 번 봤었던 그녀는 실제로 그런 성격이었고.

그러니 적당히 잘 구슬리면 제 입맛대로 다룰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전부 착각이었다.

그녀는 생각 외로 교활했다.

그건 페르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 페르데스와 연락을 주고받았던 걸 떠올린 다이몬은 인상을 팍 쓰며, 소파 손잡이를 세게 내리쳤다.

콰직-

그러자 단단한 나무로 만든 소파 손잡이가 맥없이 부서졌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놀랄 법도 하건만 다이몬은 익숙하다는 듯 손에 박힌 나뭇조각을 털어 냈다.

나뭇조각이 깊게 박혀 피가 진득하게 묻었지만, 정작 손에는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다이몬이 그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거슬려.”

아델과 페르데스도 거슬렸지만, 더 거슬리는 건 그가 심어 둔 첩자인 잭과 메이가 그를 배신했다는 거였다.

잭이야, 원래 페르데스의 편이었으니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그래서 잭에게 페르데스를 돌본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감시나 간단한 심부름만 시켰다.

하지만 메이는 아니었다. 궁인 출신이니, 당연히 자신의 무서움을 알고 제 명령을 잘 따를 줄 알았는데 이 역시 착각이었다.

또 다른 첩자였던 리네도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잘 안 되더니,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마 아델 레오폴드가 처리한 거겠지.’

만약 그렇다면 그녀가 자신의 시커먼 속내를 알고 있다는 의미가 되니 일이 번거롭게 됐다.

귀찮기도 했고.

곤란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델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봤자, 미꾸라지가 흙탕물을 일으키는 수준이었으니까.

“나한테는 상대가 안 되지.”

레오폴드 공작이 됐다고 해도, 진정한 힘을 깨닫지 못한 햇병아리였다.

그 병아리가 크기 전에 찍어 누르면 돼.

그래, 그러면 되는 거였다.

다이몬은 비릿하게 웃으며, 찻잔을 치우러 온 시종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황태자를 불러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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