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귀족회의 작위 승계 허가서만 받는다고 해서 바로 공작이 되는 건 아니었다.
이 허가서를 법원에 제출하고, 내 작위를 레오폴드 공작이라고 정정해야 비로소 정식으로 공작이 됐다.
보통은 허가서를 법원에 제출하기 전에, 황실에서 작위 승계식을 열어 공작이 될 자에게 검이나 펜 등, 그 가문을 상징하는 물건을 황제가 직접 하사했다.
레오폴드 공작가 같은 경우엔 대대로 황제에게 보검을 하사받았다.
하지만 황제가 작위 승계식을 열어 줄 리가 없을뿐더러.
주변 눈을 의식해서 열어 준다고 해도 페르데스와 결혼한 뒤에 하자는 등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할 게 분명하니 바로 법원으로 향했다.
나는 마차를 타고 법원으로 가는 내내 작위 승계 허가서를 뚫어지도록 바라봤다.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던 허가서가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르면서도 울컥했다.
이걸 얻기 위해 무던히 고생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황제의 손아귀에 놀아나면서 세 번씩이나 죽임을 당했던, 지난 생들이 떠올라 더욱 감정이 격하게 올라왔다.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알도르 경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닦으십시오, 아가씨.”
“뭘 닦아요?”
알도르 경이 말없이 그의 눈을 가리켰다.
그 손짓에 나는 황급히 내 눈 주변을 만졌다. 촉촉했다. 감정이 격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던 모양이다.
바보 같게도.
나는 알도르 경이 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추한 모습을 보였네요.”
“아닙니다. 아가씨는 우는 모습도 아름다우십니다.”
“네?”
알도르 경답지 않은 닭살 멘트에 약간 당황하며 그를 쳐다봤다.
그 역시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실언……이었습니다.”
“어라, 그럼 제가 아름답지 않다는 건가요?”
“아, 아니요. 그건…….”
“농담이에요.”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알도르 경이 귓불을 확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귀엽기는. 나는 킥킥 웃으며 허가서를 다시 갈색 봉투에 넣었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많고, 인상도 차가운 편이었지만, 묘하게 귀여운 면이 있었다.
어느덧 마차는 법원 앞에 도착했다. 나는 알도르 경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법원으로 들어갔다.
알도르 경은 경비에게 작위 관리 부서의 위치를 물어본 뒤, 내게 보고했다.
“작위 관리 부서는 3층의 동쪽, 세 번째 방이라고 합니다, 아가씨.”
“바로 가죠.”
얼른 정식으로 공작이 되고 싶어 나도 모르게 빨리 걷게 됐다.
부서에 들어서자 문 근처 책상에서 업무를 보던 관리가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레오폴드 영애.”
자기 소개도 안 했는데, 내가 누군지 바로 알아보네.
하긴 이렇게 붉은 머리를 가진 사람은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밖에 없으니 모르는 게 이상하지.
“이거.”
입 아프게 설명하기보다 직접 보여 주는 게 빠를 테니, 바로 갈색 봉투를 내밀었다.
그 안에 든 작위 승계 허가서를 본 관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것은…….”
“레오폴드 공작위를 승계받으러 왔습니다.”
조금 크게 말했더니 다른 관리들도 일하며 이쪽을 바라봤다.
그래 봤자 3명밖에 없었지만.
가장 상석이 비어 있는 걸 봐서, 여기 부서장은 자리를 비운 모양이다.
서류를 받은 관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비비며 몇 번을 확인하더니, 내게 물었다.
“이 서류…… 진짜입니까?”
“무례한 질문이군요.”
내 뒤에 있던 알도르 경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 질문은 지금 아가씨께서 위조 서류를 만들어 왔다고 의심하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니라면 도대체 뭡니까? 질문한 의도를 말해 주시죠.”
알도르 경의 기세에 눌린 관리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이러다 울겠네.
“그만해요, 알도르 경.”
적당히 말려야 할 것 같아 손을 들었다.
알도르 경은 못마땅한 눈으로 관리를 바라보곤 다시 뒤로 물러났다.
“이해해요. 4황자 전하께서 레오폴드 공작이 될 줄 알았는데, 제가 공작위를 승계받는다고 하니 놀랄 만하죠.”
“네, 네.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놀란 겁니다.”
도망갈 곳을 찾고 있던 관리는 냉큼 내가 던진 먹이를 낚아챘다.
“그 서류는 진짜입니다. 방금 알레테이아에 참석해서 받아 온 거니 정 의심되시면 확인해 봐도 됩니다.”
“아, 아닙니다. 믿겠습니다.”
“그럼 얼른 처리해 줄래요?”
“네, 네. 알겠습니다. 일주일 내로 처리해서 결과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일주일이라니.
터무니없는 기간에 헛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황제가 벌써 관리 부서에 압박을 넣었을 리는 없고.
미리 들은 게 있어서 황제한테 확인차 물어보려고 기간을 일부러 길게 잡은 게 틀림없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나는 입술을 비틀며 관리에게서 다시 서류를 빼앗았다.
그러자 관리가 놀라며 날 바라봤다.
“무슨…….”
“당신, 이름이 뭐죠?”
“네?”
“어느 가문의 영식인가요? 아니면 작위가 있나요?”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 건지…….”
“궁금해서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가문이길래, 나와 내 가문을 무시하는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무, 무시라니요! 아닙니다!”
관리는 정말 억울하다는 듯 두 손을 격하게 저으며 말했다.
“저는 맹세코 레오폴드 공작가와 영애를 무시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작위 승계를 처리하는 데 일주일이나 걸린다는 거죠? 내가 알기로 30분 내외면 끝나는 걸로 아는데.”
“……!”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는지, 관리가 흠칫 놀라며 몸을 굳혔다.
나는 뺨에 손을 대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럼 대답해 보실까요?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그, 그것이…….”
관리는 식은땀까지 흘리며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전부 외면했다.
괜히 도와줬다가 불똥이 튀면 그들 역시 곤란해질 테니, 현명한 선택이었다.
“왜 말이 없습니까?”
알도르 경까지 나서서 재촉하자, 관리는 눈을 질끈 감더니 우리를 향해 허리 깊이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잠시 착각했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럴 수 있죠. 이해해요.”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를 쥐어짜 봤자 내게 득이 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얼른 승계를 받고 영지로 돌아가는 게 백 배는 더 나았다.
“귀빈실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당장 처리하겠습니다.”
“아니요. 여기서 당신이 일하는 걸 지켜보겠어요.”
“네, 네?”
“아직 업무에 미숙한 당신이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니, 옆에서 확실하게 처리하는지 지켜보겠다고 했어요”
관리가 멍청하게 되묻자,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중요한 사안인지라 불안해서 그런 거니, 부디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제가 당신의 잘못을 이해해 준 것처럼 말이죠.”
* * *
정확하게 30분 뒤, 관리는 작위 정정이 끝났다며 내게 서류를 보여 주었다.
“공식 서류에 공작 각하의 성함을 기재했습니다.”
나는 서류에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요.”
“아닙니다. 공작위를 승계받으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레오폴드 공작 각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공작 각하.”
다른 관리들도 허리 숙여 내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진심은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 가식적인 인사였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정식으로 공작이 됐으니까.
간절히 원했던 만큼,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벅찬 감동이 차올랐다.
만약 상대가 페르데스였다면 그를 끌어안고 이 기쁨을 만끽했을 텐데…….
잠깐, 페르데스라면 끌어안고 기뻐한다고?
왜? 지금처럼 그냥 기뻐해도 되는데?
생각이 이해할 수 없는 쪽으로 뻗어 나가면서 의문이 꼬리표처럼 달라붙었다.
“공작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각하.”
부서를 나서자마자 알도르 경이 말을 거는 바람에 금방 잊혔지만.
“계속 아가씨라고 불러도 돼요, 알도르 경.”
“하지만 이제 공작이신데…….”
“괜찮아요. 뭐, 내가 결혼하면 아가씨라는 호칭이 더 이상 맞지 않으니, 각하라고 불러야겠지만 지금은 상관없어요.”
“……그러십니까.”
순간 알도르 경의 표정이 슬퍼 보였던 건 내 착각일까?
“축하의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선물이요?”
“네.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뭐든 다 드리겠습니다.”
“하하, 그러다 제가 알도르 경의 목숨이라도 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런 무서운 말을 해요.”
농담 삼아 말한 건데, 알도르 경이 가슴에 손을 올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께서 제 목숨을 원하신다면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농담이에요. 농담. 제가 알도르 경의 목숨을 달라고 할 리가 없잖아요.”
나는 오히려 그가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었다.
하여간 장난을 못 치겠네.
“그리고 축하 선물은 안 줘도 돼요.”
“제가 꼭 드리고 싶습니다.”
고집불통이기도 하고.
“음, 그럼 마들렌으로 하죠.”
“마들렌……이요?”
“네. 알도르 경의 여동생이 마들렌을 잘 만들잖아요.”
알도르 경의 여동생이 만든 마들렌을 지금까지 딱 한 번 먹어 본 적이 있는데, 어찌나 맛있는지 지금까지도 그 맛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그걸 선물로 주세요. 괜찮죠?”
“물론 괜찮습니다만…… 어떻게 아신 겁니까?”
어라?
“아가씨께 제 여동생이 마들렌을 잘 만든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그 사실을 아신 겁니까?”
생각해 보니 이번 생에선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구나.
두 번째 생에서, 알도르 경이 상심에 빠진 날 위로하기 위해 마들렌을 가져다주며 말했던 건데 잠시 착각했다.
같은 생을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이렇게 기억이 뒤엉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고민하며 법원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데, 누군가 우리의 앞을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