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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141/262)

147화

시간이 촉박할 줄 알았는데, 다들 내 생각대로 움직여 준 덕분에 알레테이아에서 터뜨릴 폭탄이 빠르게 준비됐다.

그 외 다른 것들도 준비가 거의 다 됐다.

약간의 여유가 생긴 나는 바빠서 미뤄 두었던 수도 공작저에 있는 아버지의 집무실을 정리하기로 했다.

책장 정리는 사용인들에게 맡기고, 나는 아버지의 책상 정리를 도맡아 했다.

같은 삶을 네 번이나 반복했지만, 수도 공작저의 집무실을 정리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첫 번째 생에선 내가 미처 정리할 틈도 없이, 체르노서가 전부 버렸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생에선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수도에 거의 오지 못해서 정리할 수가 없었다.

책상 첫 번째 서랍을 여니 만년필과 잉크, 수첩 등 아버지가 살아생전 자주 쓰시던 물건들이 보였다.

나는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만년필을 꺼내 종이에 끄적였다.

하지만 잉크가 마른 건지, 아무것도 적히지 않았다. 

펜촉도 뭉개져서 잉크를 넣어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고칠 수 있으려나.”

평범한 만년필이라면 바로 버렸겠지만,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라 그런지 버리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수리공한테 한번 맡겨 봐야지.

나는 만년필을 따로 챙겨 두고 이번엔 수첩을 꺼내 펼쳤다.

아버지가 몬스터 토벌을 떠나기 직전까지 수행했던 스케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천천히 아버지의 행보를 되새기고 싶었지만, 지금은 물건 정리가 우선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서랍에 있던 물건들을 상자에 담고, 세 번째 서랍을 열었건만, 덜컹거리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자물쇠 같은 건 없는데.”

열쇠 구멍이 숨겨져 있는 건가 싶어 이리저리 살펴보던 나는 서랍 손잡이 아래 작게 그려진 마법진을 발견했다.

자물쇠가 아닌 마법으로 서랍을 잠가 둔 거였다.

그만큼 이 안에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다는 의미.

이걸 어떻게 열어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페르데스가 마법진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떠올리고 그를 불렀다.

“날 불렀다고?”

“이거 보세요, 페르데스 님.”

잠시 후, 페르데스가 도착하자 나는 그에게 서랍에 그려진 마법진을 보여 주었다.

“뭔지 아시겠어요?”

“응. 스테레오스네.”

이 마법진의 이름이 스테레오스인 모양이다.

“이것 때문에 서랍이 잠겨서 열리지 않아서 날 부른 거야?”

“네. 혹시 이 마법진을 해제할 수 있을까요?”

“음, 글쎄.”

페르데스는 마법진을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쉽진 않을 것 같지만, 한번 해 볼게. 정 안 되면 스승님에게도 물어보지 뭐.”

* * *

3월 둘째 주 금요일, 오후 1시.

외궁의 대회의실에서 귀족회 정기 회의인 알레테이아가 열렸다.

“어서 오게.”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맥밀 후작 각하.”

12시 30분부터 귀족회에 속한 귀족들이 속속히 대회의실로 모여들었다.

1시가 거의 다 됐을 무렵에는 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자리를 제외하고 모든 자리에 귀족들이 착석했다.

빈자리는 레오폴드 공작의 자리였다. 

원칙대로라면 공석이 생기는 즉시, 알레테이아를 열어 새로운 일원을 받아들여야 했다.

하나 레오폴드 공작가는 귀족회 원로 가문인데다가, 황자 중 누군가 레오폴드 공작위를 받는다고 하니 이례적으로 자리를 비워 두었다.

빈자리를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황제파 귀족들이, 왼쪽에는 반황제파 귀족들이 앉았으며 맞은편에는 중립 귀족들이 앉았다.

1시 정각이 되자 이번에 사회자를 맡은 맥밀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쓱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 착석하신 것 같으니 올해 첫 번째 알레테이아를 시작하겠습니다.”

가벼운 박수 소리를 끝으로 처음부터 무거운 안건이 거론됐다.

바로 누가 황실 기사를 매수해서 체르노서를 죽였는가, 였다.

체르노서가 살해당한 지 두 달이 다 됐건만, 시신을 찾지 못한 건 물론 누가 배후인지도 알아내지 못했으니 다들 열띤 토론을 나눴다.

저마다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 가운데, 반황제파 귀족이자 신전 소속 성기사인 에먼 백작이 웃으며 말했다.

“듣기로 그 황실 기사가 황제 폐하의 비밀 친위대인 아나토메 소속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맞습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황제파 귀족인 스미든 백작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2황자 전하께선 황제 폐하의 친자이십니다!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 2황자 전하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전 그저 그 호위 기사가 아나토메 소속이 맞는지 물어봤을 뿐인데, 왜 그렇게 발끈하는지 모르겠군요.”

에먼 백작이 어깨를 으쓱이며 농담하듯 대꾸했다.

“이럴 때 쓰는 말이 있죠. 도둑이 제 발 저린다.”

“하하, 명언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

반황제파 귀족들은 아주 재미난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었지만, 황제파 귀족들의 얼굴은 점차 썩어 들어갔다.

두 파벌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중립파 귀족들은 시큰둥하게 앉아 있었다.

“하암.”

그중 루센 공작이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을 하자 대회의실에 있는 모든 귀족들이 그를 쳐다봤다.

쏟아지는 시선에도 루센 공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수건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손수건마저 그의 취향을 고스란히 반영한 검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체크무늬였다.

반황제파 귀족 중 한 명이 입술을 달싹이며 불만스레 말했다.

“루센 공작 각하께선 이번 회의가 상당히 지루하신 모양입니다.”

“지루합니다.”

보통은 그게 아니라 너무 피곤했다 등, 변명을 늘어놓을 텐데 루센 공작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에 중립파 귀족들은 또 시작이라는 듯 남몰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고, 다른 귀족들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회의실의 분위기가 두 파벌이 대립할 때보다 더 안 좋아졌지만, 루센 공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렇게 2황자 전하를 죽이라고 사주한 배후를 찾고 싶다면,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직접 나가서 찾아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백날 입으로 떠드는 것보다 그편이 더 빠를 것 같은데요.”

“저희라고 그러고 싶지 않아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닙니다. 범인을 찾으려면 증거를 수집해야 하니, 의논을 하는 게지요.”

“증거라.”

루센 공작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그의 앞에 놓인 서류를 들췄다.

“제가 보기에 이 정도면 증거는 충분히 수집한 것 같은데, 여기서 뭘 더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요.”

“그 증거를 토대로 의논을…….”

“글을 못 읽는 것도 아니고, 굳이 의논할 필요가 있습니까?”

“크흠.”

말싸움으로는 루센 공작을 이길 수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귀족이 입을 다물었지만, 그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자주 열리는 것도 아니고 3개월에 한 번씩 열리는 정기 회의인데,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으니 너무 지루합니다. 다음부터 이런 안건이 나오면, 전 잠시 눈을 붙이고 올 테니 다 끝나면 불러 주세요.”

“그래도 2황자 전하의 문제인데…….”

다른 귀족이 그 귀족을 두둔하고 나서자 루센 공작의 화살이 바로 그에게 꽂혔다.

“그래서 말하는 겁니다. 이런 일은 우리 귀족회가 아닌, 황궁 기사단이나 법원 소속 조사관들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지, 왜 우리가 고민하는 겁니까?”

“그건…….”

“아, 혹시 다들 할 일이 없어 한가한 겁니까? 그럼 제가 일을 좀 만들어 드릴까요?”

루센 공작의 눈동자에 순간 광기가 서린 걸 본 귀족들은 기함하며 하나 같이 아니라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자며 말했다.

그렇게 올라온 안건들을 하나둘씩 처리하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델 레오폴드 공작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레오폴드 영애가?”

“무슨 일이지?”

다들 의아해하는 가운데 루센 공작은 마치 재미난 구경거리를 기대하는 사람처럼 눈을 반짝거렸고.

프라시스 후작은 드디어 올 게 왔다는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알레테이아에 왔다는 건 직접 건의하고 싶은 게 있다는 의미. 귀족회의 규칙에 따라 영애를 들이도록 하죠.”

루센 공작은 좋아하는 일을 할 때를 제외하고 철저하게 방관자 역할을 했다.

한데 루센 공작이 적극적으로 나서니 프라시스 후작을 제외한 다른 귀족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몇몇 귀족들은 아델 레오폴드가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루센 공작이랑 관련이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잠시 후,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입장한 아델은 흔히 영애들이 입는 드레스가 아닌 기사단 제복을 입고 있었다.

“레오폴드 공작가의 아델이 제국의 기둥이신 귀족회 분들께 인사드립니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아델 레오폴드 영애.”

맥밀 후작이 묻자, 아델이 싱긋 웃었다.

“그야 귀족회 분들께 건의할 게 있어 찾아왔습니다.”

“그런 거라면 미리 안건을 올리는 게 좋았을 텐데요.”

“저도 그럴까 생각했는데, 중요한 사안인 만큼 직접 찾아와 귀족회 분들께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리 오게 됐습니다.”

“그래서 무슨 안건입니까?”

“레오폴드 공작위에 대한 것입니다.”

귀족들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4황자 전하께서 성인이 되셨으니 공작위를 물려받으실 때가 됐죠.”

“하지만 아직 레오폴드 영애와 결혼을 하지 않아 공작가의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신 걸로 압니다만.”

“2황자 전하의 일로 결혼식은 다소 늦게 하더라도, 혼인 서약서는 지금이라도 쓸 수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혼인 서약서는 쓰고 온 거겠지요, 영애?”

“아니요. 혼인 서약서 같은 건 쓰지 않았습니다.”

“네? 그럼 어떻게 4황자 전하께 공작위를 주겠다는 거지?”

“그 부분은 전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레오폴드 공작이 될 사람은 바로 저거든요.”

“……!”

비교적 담담하게 흘러나온 말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좌중이 조용해졌다.

루센 공작과 프라시스 후작을 제외한 모두가 기함하며 아델을 바라보는 상황.

그녀는 목을 꼿꼿하게 세운 상태에서 가슴에 손을 올리고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페르데스 황자 전하가 아닌, 레오폴드 공작가의 유일한 혈육이자 영애인 제가 레오폴드 공작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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