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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140/262)

146화

루센 공작에게 기분 좋게 내기 체스를 이긴 다음 날.

프라시스 후작이 다시 날 찾아왔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영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네.”

선택지가 이것밖에 없다는 걸 뻔히 아는데, 날 위하는 척 말하는 꼴이 웃겼다.

“역시 후작 각하께선 자상하시군요.”

“크흠. 내가 좀 그런 편이지.”

빈말을 좋다고 받아들이는 것도 웃겼고.

“그럼 이 계약서에 각하의 인장을 찍어 주세요.”

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계약서를 내밀었다.

내가 계약서까지 준비할 줄 몰랐는지, 후작이 눈썹을 찡그렸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큰돈이 걸려 있는 만큼 확실하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야 서로 말을 바꾸는 일이 없을 테니까요.”

“흠, 그건 그렇지.”

후작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계약서를 확인했다.

“영애가 뭘 부탁할지는 안 적어 두었군.”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각하께서 확실하게 제 부탁을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시면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그것 역시 따로 계약서를 쓰도록 하지. 나도 확실히 하는 편이 좋거든.”

“알겠습니다.”

내 입장에선 더 좋은 일이었다.

나는 곧바로 집사에게 계약서 종이와 만년필을 준비해 달라고 말했다.

그사이 계약서를 다시 꼼꼼하게 확인한 후작이 맨 아래 인장을 찍었다.

“이러면 되는 건가?”

“네.”

나는 프라시스 후작의 인장이 맞는지 확인한 뒤, 집사가 가져온 계약서에 내가 그에게 부탁할 게 뭔지 적었다.

[로이쉘 프라시스는 아델 레오폴드가 공작위를 승계받는 것에 찬성합니다.]

“여기에도 인장을 찍으시면 됩니다.”

“……!”

계약서 내용을 본 후작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영애 이건…….”

“약속, 지키셔야죠?”

나는 프라시스 후작이 앞서 찍은 계약서를 흔들며 싱긋 웃었다.

그러자 후작의 표정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세상을 다 잃은 듯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하던 후작은 이내 긴 한숨을 내쉬며 계약서 아래 인장을 찍었다.

* * *

“어떻게 됐어?”

어지간히도 결과가 궁금했는지, 페르데스는 프라시스 후작이 돌아가자마자 찾아와 물었다.

나는 말없이 계약서 두 장을 보여 주었다.

계약서를 확인한 페르데스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프라시스 후작은 황제파 귀족이라서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용케 했네.”

“그만큼 급하다는 거죠. 제 손에 위조 금화가 들어온 게 절대 들키면 안 되는 상황이기도 하고요.”

“그 부분이 조금 이해가 안 됐는데, 왜 들키면 안 되는 거야?”

페르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프라시스 후작은 단순히 피해자일 뿐인데?”

“상황에 따라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수도 있죠. 특히 황제에겐 그럴 만한 힘이 있기도 하고요.”

“황제? 설마 황후랑 황제랑 대립하고 있다는 거야?”

“네. 두 사람은 원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어요. 정확히는 황후가 황태자 때문에 황제에게 적당히 맞춰 주고 있던 거죠.”

그런데 체르노서가 갑자기 죽으면서 균열이 깨졌다.

“황후는 황제가 2황자를 죽였다고 의심하며 뒤를 파고 있어요. 황제의 성격상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죠.”

“그렇네. 그런 상황에서 위조 금화 사건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프라시스 후작가는 물론 황후도 무사하지 못하겠군.”

“네. 바로 그거예요. 그러니 프라시스 후작이 어떻게든 무마하려고 제 손을 잡은 거죠.”

물론 내가 공작이 되는 걸 찬성한 것만으로도 황제의 눈밖에 벗어나겠지만, 위조 금화 사건이 터지는 것보단 나았다.

적어도 황제가 대놓고 황후와 프라시스 후작가를 핍박하지 못할 테니까.

“이걸로 4표를 얻었군. 과반수의 동의를 얻으려면 6표가 되어야 하는데 남은 2표는 어떻게 할 거야?”

“다른 황제파 귀족들은 약점을 잡기 힘들기도 하고 그런다고 넘어올 리도 없으니, 반 황제파를 노려야죠.”

“어떻게? 알레테이아까진 며칠 안 남았는데 뭔가 하려면 지금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반황제파는 알레테이아에서 바로 설득할 거니까요.”

“응? 그건 너무 도박인 것 같은데.”

“그렇게 보여요?”

싱긋 웃으며 되묻자 페르데스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을 설득할 좋은 방법을 알고 있나 보군.”

“네. 신전 편을 들 거예요.”

반황제파는 황제의 뜻에 반하는 것과 동시에 신전의 뜻을 따르는 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괜찮겠어? 노골적으로 반황제파의 편을 드는 건 조금 위험할 것 같은데.”

페르데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게다가 레오폴드 공작가는 대대로 황제파였잖아.”

그랬지. 

그래서 아버지는 항상 황실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내게 강조했었고.

……그리고 황태자를 구하다가 죽었지.

새삼 떠오르는 아버지와의 기억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나는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할 겸, 페르데스에게 돌려받은 계약서를 금고에 넣으며 대답했다.

“노골적으로 편을 드는 건 아니니 괜찮을 거예요.”

“신전 편을 드는데 노골적으로 편을 드는 게 아니라고?”

“네. 제가 꺼낼 카드는 기부금이거든요.”

황실에선 신전에 매년 10만 골드가량 기부금을 냈는데, 기부금이 너무 많으니 6만 골드로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신전 측에선 반대했고, 그 공방이 벌써 3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황실에서 기부금을 줄인 만큼 레오폴드 공작가에서 내겠다고 하면, 양쪽 모두 불만이 없을 겁니다.”

“음, 그렇긴 한데 그럼 출혈이 너무 크지 않겠어? 신전에서 이걸 빌미로 더 큰 요구를 할 수도 있고…….”

“괜찮아요. 한 번만 내면 되니까요.”

“한 번만이라니? 무슨 의미야?”

이번에는 대답해 줄 수가 없어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눈치가 빠른 페르데스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것보다 황제한테 따로 연락이 온 게 없나요?”

“없어.”

이상하네.

나와 페르데스를 빨리 결혼시키는 걸 실패했으니, 다른 방법으로 조여 올 줄 알았는데 너무 잠잠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혹시 그 섬에 사는 소년의 존재를 알아챈 건가?

아니면 체르노서를 공작저의 지하실에 밀어 넣으면서 다른 무언가를 손에 쥔 건가?

“걱정하지 마.”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페르데스가 말했다.

“잭이랑 다른 사람에게도 물어봤는데, 다들 황제가 잠잠하다고 했어.”

다른 사람?

“잭 말고 또 누가 있는 거죠?”

설마 메이는 아닐 테고.

의아해서 묻자 페르데스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페르데스 님.”

나는 목소리를 약간 내리깔며 진지하게 말했다.

“저한테 비밀 만들지 말아 주세요. 특히 황제에 관한 건 더더욱 숨기시면 안 돼요.”

“……영애는 나한테 비밀 많이 만들잖아.”

“그래서 계속 숨기신다는 건가요?”

내가 약간 날카로운 목소리로 묻자 페르데스가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음, 그러니까…… 혹시 기억해? 네가 쫓아낸 하녀 말이야.”

내가 쫓아낸 하녀라니. 설마…….

“리네를…… 말하는 건가요?”

“맞아. 그 하녀. 공작저에서 쫓겨난 뒤,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황제 편에 붙었더라고.”

“……!”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지 않으면 폐하께서 제 동생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아가씨, 죄송합니다.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흑, 흑.”

3번째 생에서 리네가 날 배신하는 바람에 독을 먹고 죽었던 일이 떠오르면서 눈앞이 새카매졌다.

“영애!”

다리에 힘이 풀린 내가 바닥에 주저앉자, 페르데스가 깜짝 놀라며 날 부축했다.

“……찮아? 정신…… 봐.”

페르데스가 옆에서 뭐라고 계속 말했지만,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날 배신해 놓고 울고 불며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리네의 목소리만 계속 귓가에 메아리쳤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내보냈는데, 또 나를 배신했다고?

또. 또. 또!

“역시…… 그때 죽였어야 했어.”

그랬더라면 이런 비참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 텐데.

또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래. 지금이라도 죽이면 돼.

감히 날 독살해 놓고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다니는 그 여자를…….

“아델 레오폴드!”

“……!”

어깨를 크게 뒤흔드는 손길에 공포와 증오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정신이 돌아왔다.

새카맸던 시야에 빛이 깃들면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페르데스가 보였다.

“페르……데스 님.”

“정신이 들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데스는 안도하며 크게 숨을 토해 냈다.

“죄송해요.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아니야. 괜찮아. 그래도 한때 전속 시녀로 뒀을 정도로 아꼈던 아이인데 황제의 편을 들었다고 하니 충격받을 만하지. 이해해.”

단지 그것뿐이었다면, 이렇게 패닉이 오진 않았을 텐데.

나는 말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그 여자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중 첩자로 부려 먹으면서 잘 감시하고 있으니까.”

“감시요?”

“응. 일단 돈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하니 광부들의 식당에서 서빙을 시켰어. 만약 도망치거나 허튼짓을 하면 그 여자뿐만 아니라 그렇게 아끼는 동생들도 무사치 못할 거라고 겁도 줬고.”

“……그래도 믿을 수 없어요.”

한 번 배신한 사람은 얼마든지 또 배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 여자를 보내요. 보내는 게 힘들다면 그냥 그 여자를 죽이는 것도…….”

“미안.”

페르데스는 느닷없이 나를 꽉 끌어안고 사과했다.

“영애가 이렇게 괴로워할 줄은 몰랐어. 정말 미안해.”

“…….”

“내가 저지른 잘못이니까, 뒤처리도 내가 할게. 영애의 눈에 띄지 않게 치워 버릴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떻게 치울 거냐고, 혹시 리네를 죽일 거냐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삼켰다.

더 이상 리네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를 생각하면 3번째 생의 일이 떠올라 너무 괴로워서.

나 때문에 페르데스가 손에 사람의 피를 묻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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