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화 (139/262)

145화

내기는 5판 3선승제로, 첫 번째와 두 번째 판은 당연하지만 루센 공작이 이겼다.

그것도 압도적인 승리였다.

페르데스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패배했다.

‘이대로 3연패를 하면 어떡하지?’

지더라도 루센 공작의 찬성표를 얻을 방법은 있었지만, 그의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게 문제였다.

‘제발 페르데스가 이기길.’

아델이 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가운데, 3번째 경기가 시작됐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주도권을 잡은 사람은 루센 공작이었다.

루센 공작이 승리에 찬 미소를 지으며 룩을 내려놓았다.

“이것 참.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지 생각해 둬야겠군.”

이대로 있다간 체크메이트를 당해 게임이 끝날 것 같은데.

아델은 불안한 눈으로 페르데스를 바라봤다.

“……훗.”

웃고…… 있어?

곤란해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과 다른 페르데스의 반응에 아델은 약간 당황했다.

그건 루센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센 공작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왜 웃으시는 겁니까?”

“상황이 재미있어서요.”

“재미……있다고요?”

루센 공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자, 페르데스의 입가에 핀 미소가 깊어졌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었죠. 아무리 유리한 상황이라도 자만하는 순간, 상대에게 이길 기회를 주는 거라고.”

“무슨…….”

“체크메이트.”

“……!”

체크메이트라니.

루센 공작은 물론 아델도 놀라며 체스판을 내려다봤다.

페르데스의 화이트 룩이 루센 공작의 블랙 킹을 정확하게 노리고 있었다.

루센 공작은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막을 방법을 찾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막을 방법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페르데스가 체크메이트를 외치지 않았겠지.

“……졌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뱉는 패배 선언이었다.

페르데스는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개 숙이고 있는 루센 공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번 경기를 통해 공작의 수는 전부 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제가 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

루센 공작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고작 한 번 이기셨다고, 너무 자만하시는 거 아닙니까? 게다가 방금 전하의 입으로 자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면서?”

“이건 자만이 아니라 자신감입니다. 이제 계속 제가 이길 테니까요.”

“……진짜 재미있네.”

루센 공작의 눈동자에 순간 섬뜩한 섬광이 깃들었다.

“페르데스 님.”

상대를 도발하는 건 좋지만, 너무 지나친 것 같아 아델은 페르데스의 어깨를 잡으며 만류했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그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게다가 제겐 이토록 아름다운 승리의 여신이 있으니, 이제 제가 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 * *

페르데스는 자만심이 아니라 자신감이었다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하듯 4번째 경기도 승리를 가져왔다.

쉬운 승리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연속 두 경기를 이겼다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부디 이 승기를 계속 거머쥐며 5번째 경기도 이기길 바랐지만…… 쉽지 않을 것 같네.

나는 첫 번째 수부터 신중하게 고민하는 루센 공작을 쳐다봤다.

그의 표정은 몹시 심각했다.

반드시 이기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보이기도 했다.

이번 판은 더 힘들겠네.

승부의 마지막을 결정 짓는 판이니 당연히 그렇겠지만…….

탁, 체스 말을 놓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상황.

공방이 치열한 가운데, 승리의 여신이 미소를 지은 곳은.

“체크메이트.”

바로 페르데스였다.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확인한 루센 공작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그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체스판을 샅샅이 훑어보더니 이내 두 손을 어깨높이까지 들었다.

“제가 졌습니다.”

“하아.”

루센 공작의 패배 선언에 꽉 조이고 있던 긴장의 끈이 확 풀리면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 자리를 채운 건 기쁨과 환희였다.

“페르데스 님!”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루센 공작이 보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페르데스를 꽉 끌어안았다.

“여, 영애?”

그러자 페르데스가 당황하며 그를 끌어안은 내 팔을 잡았다.

“아.”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나는 황급히 떨어졌다.

페르데스의 귓불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갰다.

“죄송해요. 너무 기쁜 나머지 저도 모르게…….”

“기쁠 만하지. 날 이겼으니까.”

루센 공작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설마 레오폴드 공작과 같은 전법으로 질 줄은 몰랐습니다.”

루센 공작은 픽, 웃으며 페르데스를 바라봤다.

“말씀하시는 것도 그렇고, 4황자 전하께선 레오폴드 공작과 묘하게 닮은 부분이 많군요.”

페르데스가 아버지와 닮았다고?

지금까지 페르데스를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는 터라, 조금 의아했다.

“그럼 영애의 소원을 들어줄 시간이군.”

아, 맞다. 소원.

“제 소원을 들어주시죠.”

“그래. 들어줘야지. 내기는 내기니까. 그런데 그거 알고 있나, 영애?”

루센 공작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굳이 소원권을 쓰지 않았어도, 난 영애가 공작이 되는 걸 찬성했을 거야.”

어라?

“영애의 말대로 공작은 혈족이 되어야 하는 거니까.”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인데.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생에서 나는 루센 공작을 비롯한 고위 귀족들에게 내가 공작이 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런데 저런 말을 하니 약간 당황스러우면서도, 그가 진심으로 한 말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럼 소원권을 무를게요.”

“그건 안 돼. 이미 소원을 빌었으니, 다시 되돌릴 수는 없어.”

치사하게…….

내가 눈썹을 찡그리자 루센 공작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말이 진심인지는 모르겠으나, 얄궂은 표정을 보아하니 날 약 올리려고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건 확실했다.

내기 체스에 진 걸 이렇게 화풀이하려는 거겠지.

새삼 느끼는 거지만 성격 참 더럽다니까.

“루센 공작은 생각했던 것보다 옹졸한 사람이었군요.”

페르데스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했다.

비꼬는 말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루센 공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분하시면 다음에 또 붙도록 하죠. 올해 건국제 때 체스 대회를 여니, 그때 꼭 참가해 주셨으면 합니다.”

“글쎄요.”

페르데스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건 제가 아니라 영애에게 부탁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참가하길 바라는 사람은 영애가 아니라 전하입니다만.”

“그래서입니다.”

페르데스가 싱긋 웃으며 루센 공작을 쳐다봤다.

“전 영애가 원하는 일만 하거든요. 그러니 제 의사를 묻는 것보다 영애의 허락을 구하는 게 더 빠를 겁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많이 하는 거지.

당황스러우면서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페르데스가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 야릇한 손길에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페르데스를 내려다봤다.

페르데스 역시 날 보고 있었다.

깨끗하게 반짝이는 황금색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은 마치…….

“푸핫.”

“……!”

돌연 귓가에 꽂히는 루센 공작의 웃음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화들짝 놀라며 루센 공작을 쳐다봤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루센 공작은 눈물이 글썽거릴 정도로 웃고 있었다.

“하하, 집사와 다른 사용인들이 이 모습을 봐야 했는데. 하하하.”

“무슨 의미인가요?”

“어라, 여기 오면서 이상한 시선 못 느꼈어?”

이상한 시선이라고 하면…….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저를 흘끗 쳐다봤던 거, 말인가요?”

내 말에 체스판을 정리하던 하인이 움찔하며 루센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루센 공작은 그조차도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내가 곧 서른인데도 불구하고 아직 결혼을 안 했잖아. 그것 때문에 집사랑 사용인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그게 사용인들이 절 흘끗 보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이런. 눈치가 빠른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이런 쪽에는 눈치가 꽝이구나?”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내가 말없이 쳐다보자 루센 공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다들 영애와 내가 잘되길 바라고 있었다는 거야.”

“네?”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란 말인가.

“루센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제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가요?”

“그럴 리가. 다들 아주 잘 알고 있지.”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그야 단순히 약혼일 뿐이니까. 약혼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잖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페르데스가 부루퉁하게 말하자 루센 공작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하하, 꼭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

“다들 제가 유부녀나 아주 나이가 많은 여자가 아니라면 누구든 좋으니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러는 거니 너무 언짢게 생각지는 말아 주십시오.”

언짢은 이야기를 해 놓고, 그러지 말라니.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저는 레오폴드 영애한테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루센 공작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그는 턱을 괴고 페르데스를 지그시 바라봤다.

“4황자 전하에게 더 관심이 많지요.”

장난인 걸까. 진담인 걸까.

표정만 보면 장난인 것 같았지만, 눈빛이 진지해서 마냥 그렇게 여길 수도 없었다.

그의 의중을 가늠하기 위해 루센 공작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페르데스가 턱에 힘을 바짝 주며 말했다.

“관심은 감사합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전 남자에게 관심이 없거든요.”

이건 또 무슨…….

나는 당황하며 페르데스를 내려다봤다.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진심으로 한 말이라는 의미였다.

“푸하하핫!”

루센 공작도 페르데스가 진심으로 한 말이라는 걸 알아챘는지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풋…….”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인마저 눈으로 웃고 있는 가운데, 페르데스 혼자 진지하게 앉아 있으니 더 웃겨서 우리는 한참 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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