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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138/262)

144화

다음 날,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약속한 시각에 딱 맞춰 홀로 내려갔다.

페르데스는 이미 준비를 끝내고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우리의 호위를 맡아 줄 알도르 경과 에런 경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중앙 계단을 거의 내려오자 두 사람이 움직였다.

페르데스와 알도르 경이었다.

“…….”

“…….”

동시에 앞으로 나온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봤다.

그중 먼저 고개를 돌린 사람은 알도르 경이었다.

그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자 페르데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오늘 예쁘게 꾸몄네.”

나는 조금 의기소침해 보이는 알도르 경을 곁눈질로 흘겨본 뒤, 페르데스가 내민 손에 내 손을 살포시 올렸다.

“평소에는 예쁘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들리네요.”

“이런. 내가 말실수했네. 오늘따라 더 예쁘다는 의미였어.”

페르데스가 너스레를 떨며 말하자, 나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그를 바라봤다.

환하게 웃는 표정과 달리 안색은 썩 좋지 않았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보였다.

기분이 유난히 좋아 보여서 좋은 일이 있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안색이 나쁜 걸 숨기고자 일부러 과장된 행동을 보인 거였다.

“어젯밤에 못 주무셨나 봐요.”

페르데스의 입꼬리가 순간 흔들렸다.

그가 다른 손으로 마른 뺨을 만졌다.

“조금 긴장돼서 잠을 설쳤는데…… 많이 티가 나? 루센 공작이 알아채려나.”

“그건 아닐 거예요.”

평소보다 다크서클이 조금 짙을 뿐이니, 그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럼 다행이고.”

많이 긴장되는지 눈썹이 살짝 떨렸다.

나는 당신이 이길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려다, 그조차도 부담될 것 같아 말을 아꼈다.

“그럼 갈까요.”

우리는 곧장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다.

마부는 곧장 루센 공작가로 말을 몰았다.

고위 귀족들은 대부분 화이트 리엔 거리에 살고 있어, 루센 공작가까진 마차를 타고 고작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루센 공작가에 가 본 적 있어?”

“네. 어렸을 때 부모님과 함께 가 본 적이 있어요.”

“어떤 곳이야?”

“책과 그림이 많은 곳이에요. 지금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요.”

선대 가주가 죽고 새로운 가주가 생기면, 그 가주의 취향에 맞게 저택을 새로 꾸몄다.

그러니 내가 갔을 때와 사뭇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많이 바뀌었네.”

바꿔 봤자 내부 인테리어 정도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택 외관 전체가 바뀌었다.

하얀색과 검은색의 조화를 이룬 저택은 마치…….

“체스판 같네.”

페르데스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며 혀를 찼다.

“루센 공작이 체스에 미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요…….”

“건전한 취미라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제국이 발칵 뒤집혔겠어.”

나는 페르데스의 말에 침묵으로 동의했다.

경비원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자, 홀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와 사용인들이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루센 공작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4황자 전하, 레오폴드 영애.”

나는 사용인에게 외투와 가방을 건네주며 물었다.

“공작 각하께선?”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야 공작 영애니 그렇다 쳐도, 황자인 페르데스가 직접 왔는데 마중을 나오지 않고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다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항간에는 루센 공작이 귀족 기본 소양을 배울 때, 예의만 쏙 빼놓고 전부 배웠다는 소문이 돌던데…… 그 소문이 사실인 건가.

혹 페르데스가 기분 나빠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의 표정은 괜찮았다.

하긴 그도 평범한 황족은 아니니까.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집사를 따라 응접실로 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택 내부를 구경하게 됐다.

저택 외관을 체스판 같은 느낌으로 칠했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내부 인테리어도 체스 느낌이 나도록 했다.

진짜 체스에 미친 남자구나.

신기한 구경을 하며 응접실로 가고 있는데, 묘한 시선이 뒤통수에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누가 쳐다보는 것 같은데 막상 뒤를 돌아보면 날 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뭐지? 분명 시선이 느껴졌는데.

“사용인들이야.”

바로 옆에서 따라오던 페르데스가 의문을 해결해 줬다.

“그들이 지나가면서 영애를 쳐다보는 거야.”

“저를 왜요?”

“그건 나도 모르지. 대놓고 쳐다본다면 붙잡아서 물어볼 텐데,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흘끗 보는 거라 그러기도 애매해.”

“그래도 페르데스 님은 알아채셨네요.”

“원래 이런 건 주변 사람이 더 잘 보는 편이거든.”

그런가.

도대체 사용인들이 지나가면서 날 왜 보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응접실에 도착했다.

똑똑-

“각하. 황자 전하와 레오폴드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모셔라.”

“안으로 드십시오.”

예의를 아예 수프에 말아 먹은 건 아닌지, 루센 공작은 일어서서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황자 전하. 오랜만에 보는군, 레오폴드 영애. 7년만인가?”

“네. 그 정도 된 것 같네요.”

체감상으론 더 오래된 것 같았지만, 지금 시간으로 따지면 그 정도가 맞았다. 

“그땐 마냥 작은 꼬맹이였는데, 이젠 다 큰 숙녀가 됐군.”

“성인이니까요”

“그렇지.”

“처음 뵙는 군요, 루센 공작.”

의미 없는 안부 인사를 주고받고 있는데, 페르데스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루센 공작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페르데스에게 옮겨졌다.

루센 공작가의 특징인 선홍색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반짝였다.

“그렇군요. 다른 황족분들은 사교 모임이나 기념행사 때 자주 뵀는데, 4황자 전화를 뵙는 건 처음이군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루센 공작은 내가 페르데스와 약혼하겠다고 선언했을 당시, 그 장소에 있었다.

오늘 처음 그를 봤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왜 저런 거짓말을 하는 거지?

루센 공작의 의중을 가늠하기 위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페르데스가 내 어깨를 잡더니 그의 품 쪽으로 끌어당겼다.

무슨……?

“내 약혼녀가 공작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같이 가 달라고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온 거니, 내가 온 걸 너무 부담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약혼녀’라는 부분에 강한 악센트가 들어간 것처럼 느껴진 건 내 착각이 아닐 것이다.

루센 공작도 느꼈는지 묘한 눈으로 페르데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짤막한 웃음을 터뜨리며 소파를 가리켰다.

“다리 아프게 계속 서 계시지 마시고,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고맙습니다. 가지, 영애.”

나는 페르데스가 이끄는 대로 소파에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한 거지, 레오폴드 영애?”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루센 공작이 본론을 물었다.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 아닌, 얼른 말하고 꺼지라는 뉘앙스였다.

보통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기분이 나쁠 텐데, 루센 공작이라 그런가. 

역시 성격 나쁜 루센 공작답구나, 라는 생각만 들 뿐,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나 역시 이러는 편이 더 편하기도 했고.

“공작 각하께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이리 찾아왔습니다.”

“내게 부탁하고 싶은 것?”

“3월 둘째 주, 금요일에 올해 첫 번째 정식 알레테이아가 열리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알레테이아.

귀족회에 속한 12명의 귀족들이 모여 토론하는 정식 귀족 회의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아버지가 없는 지금은 11명이었지만.

하여간 알레테이아는 3개월에 한 번씩 열렸는데, 올해 첫 번째 귀족 회의는 3월에 열릴 예정이다.

“그때 특별한 안건이 나올 겁니다.”

“특별한 안건?”

“네.”

이제 시작이구나.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조금 울렁이는 마음을 다스린 뒤, 말했다.

“전 레오폴드 공작이 될 생각입니다.”

“……!”

내 말에 페르데스가 깜짝 놀라며 날 쳐다봤다.

나는 그에게 내가 공작이 될 거라고 누누이 말했었다.

그런데 그가 놀란 건, 내가 이 이야기를 대놓고 할 줄 몰랐기 때문이겠지.

루센 공작이 내 편을 들어주겠다고 하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니 그가 놀라는 건 당연했다.

“호오.”

반면 루센 공작은 몹시 흥미롭다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 눈빛은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찾은 어린아이 같았다.

……어린아이다운 순수함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4황자 전하께서 공작위를 받는 게 아니라, 영애가 직접 공작이 되겠다는 건가?”

“레오폴드 공작가의 핏줄은 바로 저, 아델 레오폴드입니다. 그러니 레오폴드 공작은 제가 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제가 공작이 되기 위해선 귀족회에서 과반수가 동의를 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나보고 찬성표를 던져 달라는 건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센 공작이 턱을 쓰다듬으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내가 동의한다면 날 따르는 중립파 귀족들도 동의하겠지.”

현재 귀족회에 속한 11명의 귀족 중, 황제파 귀족이 4명, 반황제파 귀족이 4명, 그리고 중립파 귀족이 3명이었다.

루센 공작은 중립파 귀족의 수장이니, 그의 말대로 그가 동의해 준다면 나머지 두 명의 표도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었다.

“영애가 공작이 되려면 최소 6명의 표를 얻어야 하는데…… 나머지 3표는 어디서 얻을 거지?”

“그 역시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으니, 각하께선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시고 동의해 주시면 됩니다.”

“그냥 입 닥치고, 동의나 하라는 건가. 재미있군.”

루센 공작의 입술이 매끄럽게 올라갔다.

“설마 맨입으로 도와달라는 건 아닐 테고…… 내가 도와주면 영애는 나한테 뭘 줄 거지?”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글쎄. 내가 필요한 것 중에 영애가 줄 수 있는 게 있을지 모르겠네.”

명백하게 날 깔보는 말투.

이건 조금 기분이 나빴지만,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물었다.

“내기 체스를 하는 건 어떠세요?”

체스 이야기가 나오자 루센 공작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가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나한테 내기 체스를 제안하다니. 설마 아버지가 이겼다고 그 딸인 영애까지 날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공작을 상대할 사람은 바로 접니다.”

페르데스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자, 루센 공작의 시선이 그에게 옮겨졌다.

“4황자 전하께서 절 상대하신단 말씀입니까?”

“네. 혹시 질까 봐 겁이 나십니까?”

명백한 도발에 루센 공작의 입술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그럴 리가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루센 공작은 곧바로 집사에게 체스판을 준비해 달라고 말했다.

“대신 내기 체스인 만큼, 저한테 졌을 경우 대가를 각오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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