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화 (137/262)

143화

“뭘…… 도와 달라는 거지?”

“뭘 부탁할지는 각하께서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고 약속해 주신다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내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후작이 난색을 표했다.

“미리 말해 줘야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죄송해요. 만약 각하께서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저 역시 난감해지는 터라, 지금은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그에게 남은 선택지가 이것밖에 없다는 걸 아는데, 굳이 내가 가진 카드를 보여 줄 필요는 없지.

프라시스 후작은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이틀 정도 생각할 시간을 가져도 될까?”

바로 고개를 끄덕이면 내게 주도권을 빼앗길 테니, 시간을 끌며 주도권을 가지려는 가당찮은 수가 훤히 보였다.

“물론이죠.”

그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인 건, 그와 같은 이유였다.

시간을 끌어도 주도권은 내가 가져올 자신이 있기도 했고.

“고맙네. 그럼 이틀 안에 어떻게 할지 결정해서 다시 찾아오도록 하지.”

그렇게 프라시스 후작이 돌아간 뒤. 

페르데스가 내게 물었다.

“영애가 한 거지?”

주어는 없었지만, 위조 금화를 말한다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싱긋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조금 놀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간도 크네. 만약 영애가 한 짓이라는 게 들키면 영애뿐만 아니라 공작가도 무너질 텐데.”

“절대 들키지 않을 테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만약 들킨다고 해도 내가 아닌 필로스 왕자가 있는 아르티나 왕국의 책임이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곧 필로스 왕자의 대관식이네.

2월의 마지막 날에 한다고 했으니,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대관식 축하 선물을 보내는 게 좋겠지?

내 이름으로 바로 보내면 그와의 친분을 과시하게 될 테니, 다른 루트로 보내야지.

“그런데 영애가 원하는 건 황제한테 복수하는 거 아니었어?”

“맞아요.”

“그런데 왜 자꾸 황후 쪽을 건드리는 거야? 설마…….”

말을 하다가 뭔가 눈치챘는지, 페르데스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내가 황태자가 가져온 케이크를 먹고 탈이 나서 그런 거야?”

“그 이유도 있지만, 그 이유만 있는 것도 아니에요.”

나는 위조 금화를 써서 뒤흔들 가문으로 3개의 가문을 정해 뒀는데, 그중 하나가 프라시스 후작가였다.

어떤 곳에 위조 금화를 써야 가장 효율이 좋을지 고민하던 찰나, 그런 일이 터져 그곳을 타깃으로 확정 지은 것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페르데스가 내게 물었다.

“알고 싶어요?”

“당연한 걸 왜 물어? 알기 싫은 데 물어봤을까 봐?”

“그럼 내일 저랑 같이 루센 공작가에 가요.”

레오폴드 공작가가 제국의 검이라면, 루센 공작가는 제국의 책이라고 불렸다.

그만큼 똑똑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한 가문으로, 현 루센 공작도 아카데미에서 문과 부분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최연소로 재상이 되었다.

정확히는 아버지인 전 루센 공작이 은퇴하고 그 직을 물려받은 거지만, 실력은 이미 전 루센 공작을 뛰어넘은 터라 그가 재상이 되는 데 이견을 단 자는 없었다.

만장일치가 나오기 어렵다는 귀족회에서도 그가 재상이 되는 걸 전부 동의했을 정도니 말 다 한 셈이다.

그만큼 루센 공작은 실력이 있고, 외모도 훈훈했으나 소문은 썩 좋지 않았다.

여자 문제나 도벽, 주사 등 그런 문제가 아닌…….

“루센 공작이라면 성격 파탄자로 소문난 놈인데…… 설마 그 작자를 만나러 가는 건 아니지?”

바로 성격 때문이었다.

그는 지독한 독설가로,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상대를 말로 찍어 눌렀다.

때문에 그의 훈훈한 외모와 신분에 반해서 접근했다가 호되게 당하고 눈물을 펑펑 흘린 영애들이 숱하게 많다고 했다.

루센 공작이 서른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태 결혼하지 못하고 혼자인 이유이기도 했고,

“맞아요. 루센 공작을 보러 갈 거예요.”

그런데 내가 루센 공작을 만나러 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페르데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꼭 그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해?”

“네. 루센 공작에게 부탁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뭘 부탁할 건데?”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흐음.”

페르데스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였다.

“보아하니 프라시스 후작가 같은 걸 부탁하려는 모양이네.”

눈치는 참 빠르지.

“가실 거죠?”

“싫다고 하면 포기할 거야?”

“아니요. 간다고 대답하실 때까지 괴롭힐 생각인데요.”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답하자 페르데스가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재수없는 남자를 보고 싶진 않지만, 영애한테 괴롭힘 당하고 싶진 않으니 어쩔 수 없지.”

“그럼 내일 2시까지 루센 공작가에 가야 하니, 1시에 홀에서 봐요.”

“그래.”

페르데스가 고개를 끄덕이곤 일어섰다.

그대로 응접실을 나가려는 듯 걸어가던 그는 문득 멈춰 서더니 날 돌아봤다.

“그런데 루센 공작도 프라시스 후작과 같은 걸로 협박한 거야?”

“그럴 리가요.”

루센 공작에게 이런 어쭙잖은 수를 썼다간 바로 들통날 테니, 처음부터 그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설마 무작정 부탁을 들어달라고 떼를 쓸 생각은 아닐 테고. 어떻게 그 남자의 도움을 받아 낼 생각이지?”

“체스요.”

“체스?”

“네. 정확히는 내기 체스에서 이겨서 소원권을 얻어 낼 생각이에요.”

루센 공작은 매년 사비로 체스 대회를 열 만큼 체스를 좋아했으며 잘했다.

“루센 공작이라면 제국 내에서 가장 체스를 잘하는 사람이잖아.”

페르데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약간 놀라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그 자랑 내기 체스를 하겠다고? 괜찮겠어? 지면 타격이 클 것 같은데.”

“그건 제가 페르데스 님에게 묻고 싶은 말인데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요. 제가 아닌 페르데스 님이 루센 공작과 체스를 둔다는 거죠.”

순간 정적이 흘렀다.

페르데스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날 바라봤다.

“괜찮으세요?”

“……영애가 나라면 괜찮겠어?”

음, 그런가.

“괜찮아요. 페르데스 님은 잘하실 수 있어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 후우.”

페르데스는 속 깊은 곳에서 끓어 나온 듯한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만약 내가 내기에서 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럼 제가 루센 공작의 소원을 들어줘야겠죠?”

“……그거 위험한 거잖아요.”

“괜찮아요.”

나는 페르데스의 앞으로 다가가 서며 활짝 웃었다.

“페르데스 님이 질 리가 없으니까요.”

반면 페르데스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그걸 영애가 어떻게 장담해?”

“루센 공작이 지금까지 체스 대회를 10번 이겼는데, 그중 9번을 그가 우승했어요.”

주최자가 대회 우승을 하다니.

자칫 손가락질 받을 만한 일이었지만, 애초에 체스 대회는 루센 공작이 체스를 두고 싶어서 여는 거니 다들 인정했다.

“그럼 그 사람한테 가서 부탁하는 게 낫지 않아?”

“그럴 수가 없어요. 돌아가셨거든요.”

누구라고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 내 아버지라는 걸 바로 눈치챈 페르데스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사과했다.

“미안. 아픈 곳을 찌를 생각은 없었는데…….”

“괜찮아요.”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고의가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페르데스는 조금 머쓱했는지 크게 헛기침을 한 뒤, 대화의 주제를 다시 원래의 궤도로 돌렸다.

“흠, 흠. 그럼 영애도 그 남자랑 체스를 둔 적 있어?”

“아니요. 하지만 제가 아는 체스 전들은 전부 아버지에게 배운 거예요. 페르데스 님은 그런 저를 이기셨으니, 루센 공작도 이길 수 있을 거예요.”

“조금 억지인 것 같지만…… 그래. 영애가 날 믿어 주니까 한번 해 볼게.”

“잘 부탁드려요, 페르데스 님.”

다른 방법도 생각해 두긴 했지만, 가장 좋은 건 역시 페르데스가 내기 체스에서 이기는 거였다.

그러니 그가 꼭 이겨 주길 바라는 마음에 간곡히 부탁했더니, 페르데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새삼 느끼는 건데 영애는 참 여우상인 것 같아.”

“그거 좋네요. 미련한 곰보다 교활한 여우가 전 더 좋아요.”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쳐다보며 누구냐고 물어보려는 그때.

“……나도 여우가 좋아.”

페르데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좋아한다는 말이 가슴에 확, 꽂히면서 이상한 울림을 만들어 냈다.

그가 단순히 여우가 좋다는 의미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누구지?”

“알도르 입니다, 아가씨.”

“지금 나갈게.”

하지만 받아 줄 수 없는 마음이기에.

괜히 그 부분을 언급하면 기껏 좋아졌던 사이가 다시 어색해질 수 있기에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척 연기하며 응접실을 나왔다.

* * *

“바보 같은 자식.”

갑자기 왜 그런 이상한 말을 해서는…….

아델이 나가고, 혼자 남은 페르데스는 깊은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몇 번을 곱씹어 봐도 정신이 나간 짓이었다.

약에 취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아델이 자신의 말을 듣지 못했다는 거였다.

……정말 듣지 못했을까?

만약 들었는데,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어서 모르는 척한 거라면?

“하아, 미치겠다. 정말.”

페르데스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마음을 접으려고 했다.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사이라는 걸 알기에 포기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오히려 포기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녀를 향한 마음은 반발심을 가지고 점점 몸집을 키웠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주체하지 못한 마음이 흘러나오곤 했다.

이대로 있다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지도 몰라.

그래서 아델이 자신을 경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떠날까.”

아델의 복수가 끝날 때까지 도와주려고 했는데, 이 상태로는 도저히 무리였다.

“그래, 떠나자.”

그러는 게 나를 위해서도, 그녀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야.

페르데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막상 그녀를 떠날 걸 생각하니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치는 것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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