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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136/262)

142화

프라시스 후작은 초조한 마음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부산스럽게 응접실을 돌아다녔다.

가장 급한 불을 꺼야 해서 이곳에 오긴 했지만, 아직도 잘 온 건지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돌아갔다가 나중에 확신이 들면 다시 찾아올까.

아니야. 그사이에 아델 레오폴드가 알아채면 어떡해.

그리고 경비대나 법원 혹은 황제에게 신고라도 한다면…….

“후으으.”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프라시스 후작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절대로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가문은 물론 황후, 더 나아가 황태자도 위험해질 것이다.

‘아니, 황태자 전하는 이미 위험한 상태일지도.’

황태자에게 감시를 붙여 달라는 황후의 부탁에 따라 후작은 곧바로 그에게 감시를 붙였다.

그러다 보니 몇 가지 이상한 사실들을 알게 됐는데, 그중 하나가 황태자가 가끔 황궁을 나와 카지노에 간다는 거였다.

그것도 합법 시설이 아닌, 암흑 세력이 운영하는 불법 카지노에.

“도대체 불법 카지노는 왜 가시는 건지…….”

“불법 카지노요?”

“……!”

프라시스 후작은 아델의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문앞에 서 있는 아델과 페르데스가 보였다.

언제 온 거지?

노크 소리는커녕 문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아델이 소리소문 없이 나타난 게 약간 소름이 끼쳐서 프라시스 후작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아델은 싱긋 웃으며 그런 프라시스 후작을 바라봤다.

“소파에 앉아 계시지, 왜 이곳에 서 계시는 건가요, 후작 각하?”

“으응? 아, 그림이 너무 예뻐서 보고 있었네.”

후작은 차마 초조해서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대충 얼버무렸다.

마침 그의 앞에 커다란 천사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귀족 소양을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아주 유명한 그림이었다.

“이 그림, 미켈란이 그린 [천사의 나팔 소리] 맞지? 역시 명작은 명작이야. 아주 잘 그렸어. 색감도 훌륭…….”

“모작이에요.”

툭, 던지듯이 나온 말에 재잘거리던 프라시스의 후작의 입이 조가비처럼 다물어졌다.

명망 높은 공작가의 응접실에 모작이 걸려 있을 거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가만히 있었다면 중간이라도 갔을 텐데, 괜히 아는 척하는 바람에 굉장히 민망한 상황이 그려졌다.

순식간에 모작과 진품을 구별하지 못하는, 안목 없는 사람이 된 후작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하고 싶어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사실 이곳저곳에 물감이 번진 부분이 있어서 의아해하던 차였네.”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을 수습하는 건 이 방법밖에 없었다.

그는 그림을 자세히 보는 척하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지금 보니 선도 조금 흐릿하고…… 그림이 오래돼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모작이라 그런 거였군.”

“풋.”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할 때는 언제고, 모작이라는 걸 알자마자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니 그게 웃긴지 아델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 더욱 머쓱해진 후작이 생각나는 대로 말을 늘어놓았다.

“허허, 누가 따라 그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림 공부 좀 더 해야겠어. 이 명작을 이 정도밖에 따라 그리지 못하다니, 쯧쯧.”

“그 의견에는 저도 동의해요.”

“그렇지?”

“하지만 아쉽게도 여기서 더 그림 실력을 키우지는 못하실 것 같아요. 아버지께선 돌아가셨으니까요.”

“그…… 뭐?”

그러니까 뭐야.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레오폴드 공작이라고?

기껏 상황을 수습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더 망쳤다는 사실에 프라시스 후작은 입을 쩍 벌린 채 그대로 굳었다.

반면 아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한심한 눈으로 프라시스 후작을 바라보던 페르데스도 아델의 뒤를 따라갔다.

“이만 앉지.”

그리고 그 누구보다 먼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페르데스는 여기서 가장 나이가 어리지만, 가장 신분이 높으니 문제가 전혀 될 것 없는 행동이었다.

페르데스의 옆에 아델이 앉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프라시스 후작은 그들의 맞은편에 엉거주춤 앉았다.

후작은 메마른 입을 축이기 위해 차를 들이켰다.

“제게 하시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그가 찻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아델이 물었다.

“으응, 그렇지.”

후작은 어색하게 웃으며 아델이 아닌 그 옆에 앉은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단번에 그의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챈 페르데스가 픽, 웃으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후작께선 내가 여기 있는 게 불편한 모양입니다.”

“크, 크흠.”

정곡을 찔린 후작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아델이 찻잔을 들며 말했다.

“페르데스 님은 제 약혼자이시니 저와 한 몸이라 생각하시고,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후작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냐고 말하려다 꾹 눌러 참았다.

지금 그는 아델의 비위를 맞추며 잘 보여야 하는 처지였다.

조금 전, 의도치 않게 그녀의 부친을 깎아내리는 발언을 해서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지금부터라도 무조건 말조심을 해야 했다.

“물론 전하와 영애는 곧 결혼할 사이니 한 몸과 다름없긴 하지만…… 때로는 서로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황자 전하.”

하여 후작은 아델이 아닌 페르데스에게 양해를 구했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이니 실례가 안 된다면 잠깐만 자리를 비켜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기 싫다면요.”

그런데 페르데스가 딱 잘라 거절했다.

“페르데스 님이 듣지 못할 이야기라면 저 역시 듣고 싶지 않네요.”

아델까지 거들고 나서니 후작은 속으로 짜증을 삼켰다.

제 손자뻘 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제 처지가 새삼 서럽게 느껴졌다.

“더 하실 말씀이 없다면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 아닐세.”

아델이 금방이라도 일어설 것처럼 굴자 프라시스 후작은 손을 황급히 내저었다.

“말하겠네. 다 말하겠어.”

페르데스가 여전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보다 문제 해결이 우선이었다.

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모든 게 말짱 도루묵이 되니 프라시스는 깊은 한숨과 함께 무거운 입을 열었다.

“혹시 일주일 전에 막스 상단에서 남은 퓨라 대금을 전부 지불한 걸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담당 관리가 대금 지불이 일찍 돼서 무척 좋아했었죠.”

퓨라가 워낙 가격이 비싸다 보니, 막스 상단은 퓨라를 살 때 전체 금액의 약 40%를 지불하고, 남은 60%는 그 퓨라로 마법 물품을 만들어 팔고 나면 지불하는 형식으로 계약되어 있었다.

물론 기간은 2년이었고, 물건을 팔지 못해도 그 안에 무조건 대금을 지불해야 했다.

보통은 기간을 간당간당하게 맞춰 잔금이 들어오는데, 이번에는 고작 4개월 만에 들어왔으니 담당 관리가 좋아하는 것도 당연했다.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하시는 건가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문제가 생기긴 했는데…….”

이걸 말하려고 온 건데, 막상 말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기도 했고.

프라시스 후작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지자, 아델의 표정 역시 심각해졌다.

그건 페르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슨 문제가 생긴 거지? 잔금은 확실히 들어왔다고 하던데.”

페르데스는 더 이상 공작가 일을 하지 않지만, 담당 관리가 워낙 자랑하고 다닌 탓에 잘 알고 있었다.

페르데스까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에 프라시스 후작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말을 할 듯 말 듯, 입술을 달싹거리며 쭈뼛거리다가 이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위조…… 금화입니다.”

“뭐?”

“막스 상단에서…… 레사에 잔금으로 보낸 금화들이 전부 위조 금화였습니다.”

위조 금화를 만드는 건 반역만큼이나 중죄로 다스려졌다.

한데 위조 금화 이야기가 나오니 페르데스는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그건 아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 두는데 절대 고의가 아니네, 영애.”

프라시스 후작이 손을 휘휘 저으면서 다급하게 변명했다.

“나는 물론이고, 막스 상단의 직원들도 전혀 모르는 일이었네. 만약 알았다면, 그리고 고의로 그런 거라면 이렇게 영애를 찾아와서 실토하지 않았겠지. 정말로, 정말로 난 모르는 일일세.”

구차한 변명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사실이기도 했고.

프라시스 후작 역시 위조 금화 이야기를 상단주에게 듣고 깜짝 놀라며 황급히 거래한 암흑 상단을 찾아갔다.

그러나 암흑 상단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졸지에 10만 골드를 사기당한 프라시스 후작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두 다리가 후들거려 똑바로 일어설 수도 없었다.

하지만 계속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는 법.

상단의 존폐가 위험할 정도로 막심한 손해를 입었으니, 어떻게든 메꿔야 했다.

그리고 레오폴드 공작가와 마법사의 탑에 위조 금화가 흘러 들어간 것도 해결해야 했다.

양쪽에 흘러간 위조 금화의 액수는 약 5만 골드.

그들이 이 사실을 알아채서 공론화하기 전에 어떻게든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에 프라시스 후작은 허겁지겁 그녀를 만나러 온 것.

과연 자신의 진심을 믿어 줄까.

프라시스 후작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아델에게 간청했다.

“어떻게든 범인을 잡아 볼 테니, 그때까지만 이 일을 묻어 주게.”

“범인을 잡을 수는 있나요?”

“그것이…….”

상대가 암흑 상단인 만큼 확답을 줄 수가 없어 프라시스 후작은 머뭇거렸다.

아델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제가 그 돈을 다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10만 골드를 전부 다 해결해 주겠다고?”

“위조 금화가 10만 골드나 되는 모양이군요.”

아, 이것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놀란 마음에 의도치 않게 그 사실을 폭로한 프라시스 후작은 아까보다 더 많이 흐르는 식은땀을 부지런히 닦았다.

“10만 골드든 20만 골드든 제가 해결해 드리죠.”

반면 아델은 금액을 듣고도 전혀 놀란 기색 없이,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후작 각하께서도 절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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