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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화 (135/262)

141화

체르노서가 죽고 난 뒤, 가장 분위기가 어두운 곳을 꼽으라면 단연 황후궁이었다.

그나마 황태자가 달콤한 간식을 들고 자주 찾아오고.

타국에 시집간 2황녀가 손수 편지를 써 주거나.

황후의 친가인 프라시스 후작 부부, 그리고 여러 귀족들이 성심성의껏 황후를 위로해 준 덕분에 황후궁에 낀 먹구름은 점차 맑게 갰다.

그날도 프라시스 후작은 황후가 좋아할 만한 소식을 가지고 황후궁을 방문했다.

“마법 물품을 대량으로 거래하기로 했다고요?”

“네, 폐하.”

프라시스 후작의 얼굴은 보름달이 뜬 것처럼 환했다.

“막스 상단에서 소유한 모든 마법 물품을 팔기로 했습니다.”

막스 상단에서 소유한 마법 물품은 최소 천 골드가 넘는 고가였다.

그런데 그걸 전부 팔기로 했다니 놀랍고 신기하면서도 약간 의심스러웠다.

혹시 프라시스 후작이 사기를 당한 건 아닐까?

그게 아니라도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 황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느 상단과 거래하기로 하셨습니까?”

“뒤에 배후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거래는 암흑 상단이랑 하기로 했습니다.”

암흑 상단이라니.

매끈했던 황후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암흑 상단.

정식으로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상단으로, 주로 음지에서 활동하며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하기로 유명했다.

그게 설령 사람을 죽이는 일일지라도.

그래서 귀족들은 암흑 상단을 경멸하면서도 그들을 적극적으로 잡지 않는 건, 가끔 그들에게만 부탁해야 하는 불가피한 일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프라시스 후작도 암흑 상단의 손을 몇 번 빌렸었다.

가령 그의 앞길을 막는 숙적을 제거하는 일이라던가.

그런데 암흑 상단과 거래를 한다고 하니 걱정됐다.

한두 푼도 아니고 몇만 골드가 오고 가는 거래인지라 더욱 신경이 쓰였다.

만약 암흑 상단이 뒤통수를 치거나, 잠적이라도 한다면 프라시스 후작가는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아버님?”

“괜찮습니다.”

걱정하는 황후와 달리 프라시스 후작은 호탕하게 웃었다.

“계약서도 썼고, 선금도 이미 절반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수표나 어음이 아닌 금화로요.”

황후는 아까와 다른 의미로 놀라며 되물었다.

“5만 골드를 전부 금화로 가지고 왔단 말입니까?”

“네. 어휴, 정말 5만 골드가 맞는지 세느라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고생했다는 말과 달리 프라시스 후작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남은 잔금은 물건을 넘겨주는 그 날, 받기로 했습니다. 그때도 전부 금화로 가지고 오겠다고 하더라고요.”

도합 10만 골드.

도시의 연간 운영비에 맞먹는 거금이었다.

그렇게 큰돈을 전부 금화로 내는 건 몹시 의심스러운 일이었지만, 상대가 암흑 상단이라면 이해됐다.

어음이나 수표는 사용하면 흔적이 남지만, 금화는 흔적이 남지 않았으니까.

실제로 암흑 상단은 거래할 때 금화만 받았다.

“여기 계약서입니다.”

계약서도 완벽했다. 흠잡을 곳은 없었다.

“그들이 왜 마법 물품을 사려는 건지는 알아보셨습니까?”

“알아보나 마나 마법 물품을 부숴서 퓨라를 얻어 새로 가공하려는 거겠지요.”

이러는 것보다 순수한 퓨라를 사는 게 싸고 편리했다.

하지만 레오폴드 공작가는 불순한 무리가 이상한 마법 물품을 만들어 대륙을 혼란에 빠뜨리는 걸 막기 위해 암흑 상단 같은 어둠 세력에겐 절대 퓨라를 팔지 않았다.

그러니 어둠 세력은 퓨라를 얻기 위해 번거롭지만 이런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만든 마법 물품은 어둠 루트를 통해 더 비싼 값에 팔리기도 했고.

“최근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암흑 세력 쪽에 조금 큰 분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거기 쓰려고 대량으로 마법 물품을 구매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이유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상대가 암흑 상단이라는 것 말고 꺼림칙한 부분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지.

황후는 마침표 하나까지 외울 정도로 몇 번이고 계약서를 읽은 뒤, 후작에게 넘겨주었다.

“눈에 보이는 이상한 점은 없지만, 상대가 암흑 상단인 만큼 항상 경계를 늦추면 안 됩니다, 아버님.”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정말 명심하는 게 맞는지.

황후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싱글벙글 웃는 후작을 보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버님에게 부탁할 게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뭐든 말씀하십시오.”

황후는 흘끗, 굳게 닫힌 문을 보곤 후작에게 귀를 가까이 가져오라고 손짓했다.

후작이 상체를 숙이고 귀를 가져다 대자, 그에게만 들릴 정도의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황태자에게 감시를 붙여 주세요.”

“네?”

황후가 누군가에게 감시를 붙여 달라고 부탁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1황비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자식들, 귀족, 심지어 평민에게도 감시를 붙여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진심이십니까, 황후 폐하?”

그런데 후작이 깜짝 놀라며 되물어 본 건, 감시 상대가 그녀의 아들인 황태자였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감시를 붙이다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란 말인가.

“어째서 황태자 전하께 감시를 붙이시려는 겁니까?”

그야 황제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으니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체르노서를 사지로 떠민 게 황제 같기도 하고요.

차마 할 수 없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다가 사라졌다.

황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짚었다.

그녀 역시 사랑하는 아들에게 감시를 붙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눈치 빠른 황제에게 감시를 붙이는 건 오크의 목에 방울을 달기보다 어려웠다.

괜히 들키기라도 한다면 문제가 커질 수도 있었고.

그리고…… 어쩌면 황태자도 자신이 아닌 황제의 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황태자는 괜히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울 수 있으니 그의 말을 들어주는 척하는 거라고 했지만, 과연 그럴까?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버님.”

확실하게 알아보고 싶어 황후는 후작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허허, 참.”

속사정을 알 리가 없는 후작은 황당하다는 듯 웃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황태자 전하께 사람을 붙여 두도록 하겠습니다.”

* * *

니콜 테시스와 계약하고 정확하게 3주 뒤.

관리하는 물류 창고를 마법 물품과 퓨라로 가득 채웠다.

그동안 내가 창고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씩 옮긴 터라, 니콜 테시스와 페르데스가 이 사실을 알아챈 건 창고가 가득 찬 후였다.

정확히는 직접 내가 데리고 가서 보여 준 거지만.

“말도 안 돼.”

두 눈으로 그 사실을 확인한 니콜 테시스는 고장 난 녹음기처럼 말도 안 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페르데스도 많이 놀랐는지 멍하니 물건으로 가득 들어찬 창고를 둘러봤다.

“퓨라가 든 상자는 총 14개로, 각 상자당 15개씩 들어 있어요. 그 외 상자들은 전부 마법 물품입니다.”

“……마법 물품이 어림잡아도 100상자는 넘어 보이네요.”

“그건 아니에요. 정확하기 87상자거든요.”

“그래도 많은데요…….”

많이 놀란 그의 표정을 보니,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 많은 마법 물품들을 구한 겁니까?”

“개인적으로 힘 좀 썼어요.”

“사비를 썼다는 말씀이십니까?”

아, 그게 이렇게 연결되는 건가?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물론 사비를 써도 구할 수 있지만, 이런 곳에 돈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설마 훔친 건 아니겠지?”

“네에?”

“풋.”

페르데스가 툭 던진 말에 니콜 테시스는 깜짝 놀라며 반문했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치지 마세요, 페르데스 님. 테시스 영식이 진짜라고 생각하잖아요.”

“아, 장난이었습니까…….”

비로소 안심한 듯 니콜 테시스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장난으로 한 말 아닌데.”

페르데스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고.

니콜 테시스가 못 들은 것 같으니 가볍게 무시했다.

훔치는 것보다 더 나쁜 짓을 한 터라 양심이 조금 찔리는 것도 있었다.

“당분간 이 창고는 문을 걸어 잠그고, 그 누구도 출입하지 못하게 보호 마법 장치를 작동하려고 하는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네, 네. 물론입니다. 이렇게 비싼 물건을 지키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요.”

“고마워요.”

니콜 테시스의 적극적인 협조도 받았겠다, 이제 남은 건 물고기가 내가 던진 미끼를 물기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 *

물고기가 미끼를 건드린 건, 그로부터 약 일주일 뒤였다.

겨울에는 비교적 할 일이 적다지만, 그래도 영지를 오래 비울 수는 없어, 영지에 사흘 정도 머물고 다시 수도로 돌아왔을 때였다.

“아가씨, 프라시스 후작 각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네.

웃는 나와 달리 페르데스는 의아해하며 내게 물었다.

“프라시스 후작이라면 황후의 친가지?”

“네, 맞아요.”

“그가 왜 영애를 찾아온 거지?”

“글쎄요. 제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죠.”

뭐 때문에 온 건지 알지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집사에게 외투를 벗어 건네주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외투를 벗어 하인에게 건네주는 페르데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궁금하면 같이 가실래요?”

페르데스의 얼굴이 약간 환해졌다.

“그래도 돼?”

“물론이죠.”

어차피 그도 알아야 할 일이었으니까.

페르데스는 냉큼 내 옆에 붙었다.

슬쩍 알도르 경도 따라오려고 하자, 손으로 막았다.

“알도르 경은 따라오지 않아도 돼요.”

“……네.”

순간 상처받은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나는 페르데스와 함께 프라시스 후작이 기다리는 응접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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