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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134/262)

140화

페르데스의 조언을 들은 니콜 테시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폴드 영애를 믿고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내가 아니라 페르데스를 믿는 것 같은데.

조금 떨떠름하긴 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그가 누굴 믿든 간에 아무 상관이 없기도 했고.

“그럼 계약서를 작성하죠.”

중요한 건 이번 계획에서 꼭 필요한 창고를 확보했다는 거였다.

니콜 테시스가 맡은 창고는 크기뿐만 아니라 위치도 적절한 장소에 있었다.

테시스 백작이 날 도와주기 위해 니콜 테시스에게 그 물류 창고를 맡긴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삼박자가 딱딱 들어맞았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비밀을 유지해 달라고 거듭 당부한 뒤, 니콜 테시스를 보냈다.

그리고 중요한 계약서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페르데스가 물었다.

“이제 말해 보지, 그래?”

뭘 말하라는 거지?

나는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페르데스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나한테도 좋은 제안 말이야.”

“네?”

“처음에 말했잖아. 나한테도 좋은 제안을 할 거라고.”

아, 그렇게 말했었지.

“이게 페르데스 님에게도 좋은 제안이에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

“니콜 테시스는 페르데스 님의 사업 동업자죠.”

페르데스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우리의 대화를 엿들은 거지.”

“글쎄요. 페르데스 님이 니콜 테시스와 언제부터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니, 대답하기가 애매하네요.”

“하여간 말은 잘하지.”

페르데스가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서, 나와 니콜이 동업자인 게 왜?”

“나중에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마법 물품과 퓨라의 운송권을 페르데스 님에게 전적으로 맡길게요.”

니콜 테시스와 동업하는 걸 보면 페르데스가 하는 사업은 수송 관련 사업일 가능성이 컸다.

아니어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그땐 니콜 테시스가 테시스 백작가의 후계자가 되어 있을 테니, 그를 통해 테시스 수송단을 이용하면 되니까.

그 정도 직위가 되면 배 한 척 정도는 비밀리에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제안이 아니라 일을 떠맡기는 거잖아.”

“그에 대한 보수를 평균보다 두 배로 쳐 준다면요?”

“…….”

보수 이야기가 나오자 새처럼 재잘거리던 페르데스의 입이 다물어졌다.

“일이 잘 마무리되면, 추가금까지 드리죠.”

차후 모든 계약이 끝나고, 페르데스가 자유롭게 대륙을 여행하기 위해선 많은 돈이 필요했다.

물론 이전에 말했던 것처럼 위장 신분은 물론 여행 경비도 대 줄 생각이 있었지만, 페르데스의 성격상 받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도 사업을 하며 돈을 불려 놓으려는 거겠지.

그런 그에게 운송비를 평균보다 두 배로, 게다가 추가금까지 준다는 건 아주 매력적인…….

“거절하지.”

“네?”

……조건일 텐데, 거절한다고?

예상과 전혀 다른 페르데스의 반응에 약간 당황하며 그를 바라봤다.

페르데스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재차 말했다.

“영애의 제안을 거절하겠어.”

어쩐지 확인 사살을 당하는 기분이네.

“그러니 다른 제안을 해 봐.”

다른 제안이라.

뭘 해야 하는 거지?

당연히 페르데스가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해서 차선책을 따로 생각해 두지 않은 터라 당황스러웠다.

“혹시 없다면 내가 대신 제안해도 될까?”

“아.”

그렇게 된 거군.

뒤늦게 페르데스의 의도를 파악한 나는 픽, 웃으며 질문을 되돌려 주었다.

“제게 달리 제안하고 싶은 게 있으시군요?”

“그렇지.”

“뭔가요?”

“방금 영애가 한 부탁도 그렇고, 다 들어줄 테니까 나중에 내 부탁도 하나만 들어줘.”

제안이 아니라 거래인가.

그리고 무슨 부탁을 할지 바로 말하지 않는 걸 보면, 지금은 할 수 없는 부탁인가 보다.

아니면 아직 생각해 둔 게 없지만, 차후 생길지도 모르니 미리 약속을 받아 두려는 것일 수도 있고.

“영애가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상식적인 선 안에서 부탁할 테니, 혹시 이상한 부탁을 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런 걱정은 안 해요.”

다른 사람이 저런 말을 했다면, 말재간으로 날 현혹한다고 생각했겠지만, 페르데스가 말하니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만큼 그를 믿고 있다는 의미.

새삼 내가 페르데스를 이만큼 믿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좋아요. 대신 유효 기간을 정해야 할 것 같아요.”

“언제까지?”

“1년으로 하죠.”

마음에 들지 않는지, 페르데스가 눈을 찡그렸다.

“너무 짧은데.”

“전혀요. 지금 당장 무슨 부탁을 할지 말하라고 하는 것보단 낫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페르데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때 하도록 하지.”

그 순간, 페르데스의 눈동자는 굳은 결심을 한 사람처럼 결연하게 반짝였다.

* * *

니콜 테시스가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창고가 확보됐으니, 이제 남은 건 계획에 박차를 가하는 거였다.

그래야 하는데…… 이게 다 뭐람.

나는 높은 천장에 닿을 정도로 쌓여 있는 상자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 귀족들이 보낸 내 생일 선물이었다.

신년제를 비롯한 이런저런 사정으로 생일 파티를 열지는 않아도 생일 선물은 많이 받았다.

아버지와 평소 가깝게 지내던 귀족들이나 마티나 백작같이 제국의 북부령을 다스리는 귀족들이 보내는 거였다.

물론 황실에서도 선물을 보냈다.

내 생일은 1월이지만, 생일 선물은 12월에 도착했다.

1월에는 폭설로 기차 운행이 멈추고, 북부령의 도로가 마비돼서 생일 선물을 보내기가 힘드니 한 달 전에 미리 보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생일 선물은 거의 오지 않았는데, 내가 아카데미에 있다고 생각하고 귀족들이 보내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도 한몫했고.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내가 아카데미에 있더라도 꾸역꾸역 선물을 보냈겠지.

그들의 이중성에 웃음이 나왔지만, 섭섭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진심이라곤 한 스푼도 없는 의례적인 축하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보내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하여간 이번 생일은 큰 소란 없이 조용히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생일 이틀 전부터 귀족들이 보낸 생일 선물이 메뚜기떼처럼 들이닥쳤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하급 귀족이 보낸 선물부터 시작해서 황실에서 보낸 선물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냈는지 감히 헤아리기 무서울 정도로 엄청나게 쏟아졌다.

어림잡아도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보다 더 많이 온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내가 수도에 있으니, 선물을 보내기 쉬워 막 보낸 것 같은데…….

“미치겠네.”

뒤처리해야 하는 사람 입장도 생각해 주지, 이렇게 막 보내면 어쩌자는 거야.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답장을 보낼 생각을 하니 벌써 눈앞이 까마득했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보태는 귀족들에게 짜증이 나기도 했고.

“이럴 줄 알았다면 영지에 돌아가 있을걸.”

실행해야 하는 계획도 있고, 수도의 공작저도 정리할 겸 남은 건데 실수였다.

때늦은 후회를 하며 나는 가장 번쩍거리는 황금색 상자를 집어 들었다.

황실에서 보낸 선물이었다.

다른 건 답장을 조금 늦게 보내도 상관없지만, 황실에는 바로 답장을 보내야 했다.

“뭐가 들은 거지?”

상자가 제법 묵직한 걸 봐서 반지나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는 아닌 것 같은데.

설마 폭탄은 아니겠지?

약간 우스운 상상을 하며 상자를 열려는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설마 또 누가 생일 선물을 보낸 건 아니겠지.

“잠깐 시간 돼?”

아, 다행히 그건 아니네.

나는 황금색 상자를 옆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허락하자 페르데스가 쭈뼛거리며 들어왔다.

약간 굳은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응? 아니. 아무 일도 없어.”

아무 일도 없긴. 

표정이 무슨 일이 있다고 다 말해 주고 있는데.

“혹시 니콜 테시스의 일이 걱정돼서 오신 거라면, 잘 진행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페르데스는 멋쩍은 듯 볼을 긁적이더니, 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오른손을 뻗었다.

“오늘 영애 생일이잖아.”

그 손에는 붉은 리본으로 꼼꼼하게 포장한 상자가 있었다.

“생일 축하해.”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처음 해 본 것도 아닐 텐데, 뭐 저리 쑥스러워하는 건지.

나는 작게 웃으며 선물을 받았다. 

“고마워요. 풀어 봐도 돼요?”

“아, 안 돼!”

페르데스는 목소리를 높이며 두 손을 격하게 저었다.

“내가 나간 뒤에 풀어 봐. 지금 나갈 거니까, 바로 풀어 보면 돼! 그,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이상하게 생각하진 마! 그냥, 그냥 단순히 생일 선물이니까!”

그리고 속사포로 말을 쏟아 내더니, 붙잡을 틈도 없이 빠르게 방을 나갔다.

도대체 뭐지…….

황당한 페르데스의 행동에 나는 다소 떨떠름하며 페르데스의 자취를 쫓다가, 그가 두고 간 생일 선물을 내려다봤다.

도대체 안에 뭐가 들어 있길래 저런 반응을 보인 걸까.

궁금해서 곧바로 상자를 열어 봤다.

그러자 크리스털로 만든 오르골이 보였다.

퓨라가 박혀 있는 걸 보니 마법 오르골인 모양이다.

요즘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한 마법 오르골이 유행한다더니, 설마 그건가?

[흠, 흠. 생일 축하해. 영애]

설마 했는데, 정답이었다.

게다가 이 뒤에는 페르데스가 직접 부른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페르데스가 그의 노래를 녹음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건 노래를 무척 잘 부른다는 거였다.

이런 쪽에 문외한인 내가 들어 봐도 훌륭한 실력이었다.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와 오르골 특유의 고요하고 맑은 선율이 하모니처럼 잘 어울렸다.

페르데스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페르데스의 노래를 감상했다.

노래가 너무 감미로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요 며칠, 이런저런 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일까.

의식이 조금씩 흐려지더니, 어느 순간 그의 노랫소리와 함께 깊은 수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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