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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133/262)

139화

단순히 페르데스와 니콜 테시스의 관계가 궁금해서 몰래 뒤를 밟았을 뿐인데, 뜻밖에도 좋은 정보를 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창고라니.

그 물건들을 보관하기 너무 적절한 장소였다.

물류 창고의 담당자가 페르데스의 동업자인 니콜 테시스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내가 아는 그는 가볍게 입을 놀리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좀 더 고민하고 찾아다녀도 지금보다 더 좋은 조건의 창고를 찾는 건 힘들었다.

놓치고 싶지 않아.

무조건 잡고 싶었다.

마음은 조급했지만, 일단 진정하고 나중에 페르데스와 따로 이야기를 해 봐야지.

“제가 도와줄까요?”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그들의 앞에 나선 후였다.

나도 참 성격이 급하다니까.

“여, 영애?”

날 발견한 니콜 테시스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

페르데스 역시 많이 놀란 표정이었다.

“제가 테시스 공자의 창고 문제를 도와줄 수 있어요.”

내가 재차 제안하자 페르데스는 언제 놀랐냐는 듯 눈을 가자미처럼 얇게 뜨고 날 쳐다봤다.

니콜 테시스는 아까와 다른 의미로 놀란 듯 눈을 크게 깜빡이다가 내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페르데스야 원래 경계심과 의심이 많은 성격이니 이런 반응이 당연했지만.

니콜 테시스의 반응은 조금 의외였다.

앞으로 남은 그의 일생이 걸린 골치 아픈 문젯거리를 해결해 준다는데 좋아하기보다 내 눈치를 살핀다니.

섣부른 성격은 아닌 모양이네.

좋아. 아주 마음에 들어.

자고로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눈앞에 맛있는 먹이가 있다고 바로 달려드는 게 아니라, 그 먹이가 정말 안전한지 확인해 봐야지.

암, 그렇고말고.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저절로 그려졌다.

역시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제가 창고 문제를 도와드려도 괜찮을까요?”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페르데스는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고.

니콜 테시스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이번엔 페르데스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하죠, 페르데스 님?”

“……글쎄.”

비로소 입을 연 페르데스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덧붙였다.

“일단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 보도록 하지.”

“잘 생각하셨어요. 지금은 긴가민가하셔도 제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선뜻 제 제안을 받아들이실 거예요. 테시스 공자는 물론 페르데스 님에게도 아주 좋은 조건이니까요.”

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 내자 기껏 사라졌던 의심의 눈초리가 다시 쏟아졌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싱긋 웃으며 받아쳤다.

“크흠.”

그러자 페르데스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언뜻 드러난 그의 귓불이 붉었다.

머쓱한 듯 만지고 있는 목덜미 역시 불그스름했다.

페르데스는 예전에도 종종 대화하다가 저런 모습을 보였었다.

그때는 왜 저러는 건지 궁금했는데, 이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를 좋아해서.

나를 한 사람이 아닌 이성으로 생각해서 부끄럽고 설레는 마음에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게 분명했다.

“…….”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페르데스의 얼굴을 보기가 조금 민망해서, 나는 니콜 테시스만 보며 말했다.

“그럼 함께 공작저로 돌아가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도록 할까요?”

* * *

“그래서 뭘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지?”

하녀가 티 테이블을 세팅하고 나가기 무섭게 페르데스가 다그치듯이 물었다.

“니콜은 물론 내게도 좋은 조건이라는 건 뭐지?”

니콜 테시스도 페르데스와 같은 게 궁금했는지,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고 정자세로 앉아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성격이 급하네.

뭐, 불쑥 다가가서 다짜고짜 도와주겠다고 말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리고 급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급한 걸 티 내면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으니, 나는 조급한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여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차를 마시는 내내 두 쌍의 시선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슬슬 이야기를 꺼내는 게 좋을 것 같아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마법 물품과 퓨라.”

내가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건지 구구절절 설명하기 보다 그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부터 먼저 말했다.

“그걸로 테시스 공자가 맡은 창고를 가득 채워 드리죠.”

대륙에서 가장 큰 수송업을 운영하는 테시스 백작가에서 취급하지 못한 물품이 바로 퓨라와 마법 물품이었다.

퓨라와 마법 물품들은 워낙 고가라서 물류 창고가 아닌 금고에 보관했고.

거래할 때도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상단 직원이 직접 들고 가서 물건을 주고 대금을 받아 오는 형식으로 하니 따로 수송 상단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

“말도 안 돼.”

그런데 그것들을 물류 창고가 가득 찰 정도로 채워 주겠다고 하니, 두 사람이 저리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계속 말도 안 된다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니콜 테시스가 조심스럽게 내게 말했다.

“혹시 창고 크기가 작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 먼저 말씀드리면, 크기는 대략 700제곱미터 정도 됩니다.”

“딱 좋네요.”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창고의 크기였다.

“그러시다면 다행인데…….”

니콜 테시스가 약간 떨떠름해하며 입을 다물자, 그 자리를 페르데스가 채웠다.

“마법 물품은 레오폴드 공작가에서 가지고 있는 걸로 채울 생각인가? 그렇게 큰 창고를 다 채울 만큼 공작가에서 보유한 마법 물품이 많지 않은 걸로 아는데. 게다가 대다수는 사용 중이고.”

2년간, 날 대신해서 공작가의 업무와 안살림을 담당한 탓인지, 빠삭하게 잘 알고 있었다.

“설마 마법 물품을 넣고 남은 부분을 퓨라로 채울 생각은 아닐 테고.”

“당연히 아니죠.”

크기가 커 봐야 아기 주먹만 한 퓨라로 창고를 채우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퓨라가 필요했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캔다고 해도, 그 많은 퓨라를 다 캐는 건 불가능했다.

장담하건대 10분의 1도 캐지 못할 것이다.

내가 운영하는 유령 상단인 코스모스 상단에서 가지고 있는 퓨라와 합쳐도 무리였다.

“그리고 공작가에서 보유한 마법 물품으로 창고를 채울 생각도 없어요.”

“그럼?”

“당연히 앞으로 거래할 물건으로 채우는 거죠.”

“거래?”

페르데스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언제부터 레사에서 마법 물품도 다뤘지?”

레사는 레오폴드 공작가에서 운영하는 상단의 이름이었다.

주로 다루는 물품은 퓨라였지만, 레오폴드 영지에서 나오는 특산품이나 농작물도 도맡아서 판매했다.

“마법 물품을 거래할 상단은 레사가 아니에요.”

“그럼 어디랑……!”

뭔가 떠올랐는지 페르데스가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눈치챈 모양이네.

내가 말하는 상단이 ‘코스모스’ 상단이라는 걸.

“……그 상단도 마법 물품을 거래하진 않을 텐데.”

“지금은 거래하지 않지만, 앞으로는 하려고 한대요.”

마치 남 일처럼 말하자 어처구니가 없는지 페르데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 상단이 어디입니까?”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니콜 테시스는 어리둥절하며 페르데스에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그 상단의 정체에 대해선 아직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페르데스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인 만큼, 내가 직접 대답했다.

그러자 니콜 테시스가 다소 당황하며 말했다.

“아무것도 말씀해 주실 수 없다니. 그럼 전 뭘 믿고 영애의 손을 잡으면 되나요?”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는 건지.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당당하게 말했다.

“절 믿으면 되죠.”

아델 레오폴드.

제국의 검이라고 불리는 레오폴드 공작가의 유일한 혈육.

그것만으로도 내 말을 믿을 이유는 충분했으니까.

비록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공작가의 위세가 예전만큼 드높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의 거래에서 신뢰를 받지 못할 만큼 추락한 건 아니었다.

니콜 테시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께서 그리 장담하신다면 믿을 수는 있습니다만…… 그 전에 조건을 듣고 싶군요.”

처음 봤을 때와 달리 그의 표정은 진지하고 신중했다.

“영애께서 아무 조건 없이 절 도와주시는 건 아닐 테니까요.”

니콜 테시스가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서자, 페르데스는 팔짱을 끼고 소파 등받이에 기대앉아서 방관했다.

“당연히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비밀 유지요. 제가 됐다고 말할 때까지, 저희의 계약 내용이나 그 창고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외부에 절대 발설하면 안 됩니다. 물론 공자의 부친인 테시스 백작도 포함입니다.”

니콜 테시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하지만 두 달 뒤에 아버지께 결과를 보고해야 하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길어야 두 달 내로 전부 끝날 테니까요.”

“아아, 그러면 상관없습니다.”

그는 비로소 안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 조건은 뭡니까?”

“없는데요?”

“……네?”

“제 조건은 그게 전부입니다. 비밀 유지만 해 주신다면 마법 물품과 퓨라로 공자의 창고를 전부 채우는 건 물론, 차후 그 물자들의 수송도 테시스 가문의 상단에 맡기겠습니다. 당연히 창고 이용료도 낼 거고요.”

실로 파격적인 조건에 믿을 수 없는지 니콜 테시스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듯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다녔다.

“하실 건가요?”

“…….”

“얼른 결정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생각할 시간을 많이 주면 쓸데없는 잡생각을 할 테니, 틈을 주지 않고 재촉했다.

그러자 니콜 테시스는 조금 난감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다가 페르데스를 돌아봤다.

“페르데스 님의 생각은 어떠세요?”

페르데스가 삐딱하게 턱을 괴며 대답했다.

“거절할 이유는 없지. 하나부터 열까지 너한테 좋은 조건들이니까.”

분명 니콜 테시스에게 말을 하고 있는데.

“물론 너무 좋아서 꺼림칙할 수도 있겠지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째서 시선은 나에게 고정된 건지.

그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워 차를 마시는 척 슬쩍 시선을 내리깔며 찻잔을 들었다.

“레오폴드 영애는 절대 나한테 해가 될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거든.”

하지만 뒤이어 나온 말에 나는 차를 한 모금도 마실 수가 없었다.

나를 향한 올곧은 믿음이 심장을 묵직하게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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