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화 (132/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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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데스가 검술을 오래 배운 건 사실이지만, 워낙 재능이 없어 실력은 제자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한테 검을 골라 달라고 부탁하는 게 조금 황당했지만, 나서지 않았다.

같은 남자에게 부탁하는 거라고 딱 잘라 선을 긋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런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을 하면서까지 페르데스의 도움을 받고 싶다니 받게 해 줘야지.

뭐, 그가 부탁을 받아 줄 리가 없지만.

“그래. 그렇게 하지.”

……받아 줬다고?

진심이야?

당연히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밖의 대답에 나는 깜짝 놀라며 페르데스를 돌아봤다.

페르데스는 남은 맥주를 말끔하게 비운 뒤, 일어섰다.

“마침 나도 검을 사고 싶었으니, 다녀올게.”

페르데스 님. 어떤 검이 좋은지 볼 줄은 아세요?

그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억지로 삼켰다.

페르데스를 무시하고, 그의 자존심을 깎는 언사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고.

“다녀오세요.”

그리고 페르데스가 없는 동안 나도 편하게 창고를 알아보면 되니 허락해 주긴 했는데…… 걱정되네.

그의 자존심을 지켜 주려다 오히려 더 개망신을 당하게 하는 건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나도 창고를 알아봐야 하니 좀 더 있다가, 두 사람이 있는 무기점으로 가 봐야지.

그리 생각하며 나는 샌드위치를 입에 넣었다.

신선한 야채와 짭조름한 고기가 어우러진 샌드위치는 제법 맛있었다.

그러고 보니 페르데스가 먹은 건 맥주뿐인데, 괜찮으려나.

남은 샌드위치를 포장해 달라고 할까?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직원을 불러서 남은 샌드위치를 포장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음식값을 계산하려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페르데스는 수중에 가진 돈이 없다는 거였다.

니콜 테시스가 검을 골라 준 보답으로 그의 검을 골라 줄 수도 있지만, 그건 제대로 된 검을 골라 줬을 때의 이야기였다.

이상한 걸 골라 줬는데 그 보답으로 좋은 검이라도 받아 오면, 체면이 와장창 구겨졌다.

나중에 두고두고 욕을 먹을 수도 있었고.

“하아, 어쩔 수 없지.”

창고를 알아보고 가려고 했는데, 그냥 지금 가 보는 수밖에.

나는 재빨리 계산을 마치고, 페르데스와 니콜 테시스가 사라진 쪽으로 향했다.

직원이 포장해 준 샌드위치를 가지고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이 근처에 무기점이 있었던가?

올 때 못 본 것 같은데.

무기점은커녕 대장간도 보지 못했다.

그럼 니콜 테시스는 어디서 검을 산다고 페르데스를 데리고 간 거지?

의문점을 품고, 그들을 찾고 있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그 표정이 사뭇 심각하고 진지했다.

특히 니콜 테시스가 페르데스 쪽에 바짝 붙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역시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모르는 뭔가 있어.

그리 확신을 내린 나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그들의 뒤를 밟았다.

* * *

페르데스는 아델의 시야가 닿지 않은 곳에 도착하자 니콜 테시스를 맹렬히 노려봤다.

“내가 괜찮다고 할 때를 제외하곤 아는 척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니콜 테시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조금 섭섭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에이. 명색이 어깨를 나란히 한 사업 동료인데 너무 쌀쌀맞으시네요, 페르데스 님.”

아델이 예상한 대로 두 사람 사이엔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

바로 페르데스가 황실에서 주는 품위 유지비로 벌인 사업의 공동 창업주가 니콜 테시스라는 거였다.

페르데스가 사업 계획을 세우고 그에 맞는 자금을 주면, 니콜 테시스는 그것들을 실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들의 사업이 고작 2년 만에 성황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대외적으론 니콜 테시스 혼자 하는 사업이었고, 페르데스의 존재는 철저하게 숨겼다.

그의 존재가 드러나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니콜 테시스와 친분이 있는 것도 철저하게 숨겼는데, 그가 갑자기 아는 척을 해 오니 페르데스는 몹시 당황했었다.

난감하기도 했고.

아델이 그와 자신의 관계를 눈치채는 건 아닌지 걱정돼서, 계속 그녀의 눈치를 살피게 됐다.

페르데스는 어서 니콜 테시스가 사라져 주길 바랐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럴 생각이 없는지 싱글벙글 웃으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했다.

자신이 검술을 잘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검을 골라 달라고 부탁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론 검술을 잘하는 것과 검을 볼 줄 아는 건 다른 문제였지만, 보통 검을 잘 다루는 사람들은 검을 볼 줄도 알았다.

그리고 중요한 건 페르데스는 검도 볼 줄 몰랐다.

한데도 그의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받아들인 건, 니콜 테시스가 이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시라도 빨리 아델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고.

……뒤늦게 이러는 게 더 의심을 사는 행동이라는 걸 깨닫긴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었다.

페르데스는 나중에 아델이 니콜 테시스와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변명할지 생각해 두면서,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나한테 말을 건 거야?”

“페르데스 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고작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고작이라니요. 저한테는 아주 중요한 문제란 말입니다.”

니콜 테시스가 정말 섭섭하다는 듯 꿍얼거리자, 페르데스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무슨 일인지나 말해.”

“아버지께서 제게 수도의 물류 창고를 맡기셨습니다.”

니콜 테시스는 작위나 가업에 관심이 없었지만, 그의 형이자 테시스 가문의 장남인 루콜 테시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 능력이 좋은 동생이 언제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항상 전전긍긍했다.

테시스 백작도 그런 장남의 마음을 헤아려, 니콜 테시스를 최대한 가문의 일에 개입시키지 않았다.

니콜 테시스도 가문의 일에 욕심내지 않고, 페시스와 손을 잡아 따로 사업을 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물류 창고를 맡겼다고 하니, 황당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의도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혹시 이 일에 자네 형님의 입김이 작용한 건가?”

니콜 테시스가 한숨 섞인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것 같더라고요.”

“그 형님이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테시스 백작이 물류 창고를 대뜸 너한테 맡긴 거지?”

니콜 테시스는 입술을 일자로 그리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그 물류 창고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뭐?”

아무것도 없는 물류 창고를 줬다는 건 설마…….

“그 물류 창고를 너보고 채우라는 건가?”

“……네.”

“허.”

이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란 말인가.

페르데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물류 창고를 채우라는 건, 단순히 물건을 사서 넣으라는 게 아닌 새로운 거래처를 뚫으라는 의미였다.

게다가 아무것도 없는 물류 창고를 줬다는 건, 기존에 테시스 가문에서 취급하지 않은 물건으로 채우라는 것과 같았다.

테시스 가문은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 내에서도 가장 큰 수송업을 하고 있는 가문이었다.

기차를 통해서 운송하는 물건을 제외한 모든 물건은 테시스 가문을 거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테시스 가문에서 취급하지 않은 물건으로 창고를 가득 채우라니.

“기간은 두 달을 주셨습니다.”

게다가 기간까지 터무니없이 짧았다.

“형님에게 뭔가 실수한 모양이군. 그게 아니면 비위를 거스르는 짓을 했거나.”

그게 아니고서야 지금까지 잠잠하던 루콜 테시스가 갑자기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역시 뭔가 있는지 니콜 테시스가 한층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형님께서 제가 따로 사업을 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페르데스가 그런 의미로 되묻자 니콜 테시스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제가 따로 사업을 하는 이유가 가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은 것에 대한 반항이자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며…….”

허. 도대체 어떻게 해석하면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거지.

페르데스는 몹시 기가 막혀서 속으로 혀를 찼다.

게다가 루콜 테시스가 생각하는 이유와 오히려 반대였다.

니콜 테시스는 가업에 욕심이 없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 주기 위해 따로 사업을 한 거였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제가 사업에 재주가 없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보여 주겠다면서…….”

“이건 사업에 아주 뛰어난 재주가 있는 사람도 하기 힘든 일이야.”

페르데스는 짧은 순간, 머리를 굴리며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기간 안에 물류 창고를 채울 물건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 생각엔 이번 일은 못 하겠다고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러면 자존심은 조금 상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괜히 자존심 세운다고 버텼다가, 나중에 더 큰 개 쪽을 당하는 것보다 나았다.

“그리고 이번에 포기하면 네 형님도 다시 잠잠해질 테니, 그러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왜지?”

“아버지께서 이번에 실패하면, 저를 수도원에 집어넣는다고 하셨거든요.”

“……뭐?”

수도원에 넣는다는 건, 속세와 인연을 끊고 평생 신의 종이 되어 살라는 의미였다.

즉, 더 이상 니콜 테시스와 함께 사업을 할 수 없다는 의미.

그러면 그의 사정과 별개로 페르데스도 곤란해졌다.

“만약 성공하면?”

“그럼 제 능력을 인정해 주고, 제게 가문과 가업을 물려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테시스 백작, 마지막 도박을 걸었구나.

그렇다면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낸 것도 어느정도 이해됐다.

“미치겠네.”

어떻게든 이번 문제를 풀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페르데스가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작게 욕설을 읊조리는 그때.

“제가 도와줄까요?”

시린 겨울바람 사이로 따스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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